85화.
갑자기 이게 뭔 말?
분명 이제껏 아무 말도 없었다. 사비나가 국왕을 만나고 왔음에도 매우 평온한 기색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발컨 백작이 그냥 제 추종자들을 데리고 큰소리친 것으로만 여겼다.
한데 갑자기 역모라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급한 표정을 지은 이들을 봤다. 부연 설명을 바랐지만 그런 내 손을 쥔 미카엘라가 먼저 움직였다.
“얼른 가자. 라피를 업게나.”
“어, 어어어? 나, 나눈…….”
전 약혼자의 반란도 겪어 본 나였다.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갑자기 그런 일이 또 터지니 놀라 발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근처에 있던 기사가 업었다.
“얼른 움직이시지요. 모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 어어…… 에, 에이 만나야 하눈데…… 씨엘!”
에이든과 만나야 하는데 만날 수가 없었다. 내 바람은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은 듯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으로 뛰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들의 얼굴은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훈련이라도 받았는지 시녀들 역시 비명을 지르거나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이 없었다.
빛조차 들어오지 않은 공간엔 캐츠아이가 안을 밝혔다. 안엔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의 식량과 식수, 보온을 위한 이불 등이 놓여 있었다.
“라피, 미안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해서 말 못 했어.”
“구게 무슨…….”
“사비나 공주님이 네게 들은 말을 아바마마께 하셨단다. 그래서 혹시 몰라 준비를 했는데 진짜로 역모를 일으킬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어.”
“…….”
“라피랑 에이든 님을 보내 드려야 옳은데 만약 그랬다가는 우리가 감지했다는 것을 그들에게 들킬까 봐…….”
한 마디로 내 말을 전해 들은 실베스터 왕족은 발컨 백작이 역모를 일으킬 것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문제라면 나에겐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나랑 에이든이 타인에게 말을 옮기거나 혹은 집에 말할까 봐 그러한 것 같았다.
이미 그런 뉘앙스를 풍기며 가족과 연락을 했었던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와 에이든을 돌려보내면 발컨 백작이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예고 없이 쳐들어올까 봐 숨겼다는 말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에이는 오디잇써여?”
“에이든 님은 지금 사비나 공주님과 함께 싸우고 계실 거야.”
“머라구여? 우리 에이가 싸워여?”
전쟁이나 그런 비슷한 것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에이든이었다. 그런 에이든의 타국의 일에 끼어 싸운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렇다는 것은 에이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한 분뿐인 고모를 깜찍하게 속였다. 어린아이가 되어 눈썰미가 없어진 것인가.
“에이 다치묜 앙대.”
“괜찮을 거야. 아! 에이든 님이 이걸 라피에게 건네주라고 했어.”
오늘은 아침에 고대어 해석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일주일 중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며 에이든이 학자들에게 강하게 말해서 얻어낸 날이다. 그렇기에 오전 내내 에이든과 뒹굴 예정이었지만 사비나와 데이트해야 한다며 나갔다.
그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다.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말없이 머리에 입맞춤을 하고는 방긋 미소 지었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냐고 타박하자 에이든은 그저 내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그러곤 데이트를 방해하지 말라고 하고는 그 길로 나가 버렸다.
“나아뿐 새끠 가트니라고.”
미카엘라가 준 종이를 펼친 나는 이를 사리물었다.
「고모 미안해.
고모가 엮어 준 사랑하는 사람이랑 뭐든 함께하고 싶어.
그래서 고모한테는 비밀로 했어. 미안, 고모는 다치면 안 되거든.
고모 다치면 고모할아버지가 내 목을 먼저 칠 거야. 아니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나를 불구덩이 속에 밀어 넣을 거야.
고모가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라. 하지만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것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고모는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고모…… 사랑해. 진짜야. 우리 말랑콩떡 고모, 혹시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가족한테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말해 줘.
그럼 고모 우리 다음에 봐. 다음에 만나면 내가 실컷 재롱부릴게.」
마치 유언이라도 적어 놓은 듯한 종이를 조그만 두 손으로 와락 구겼다.
“이 조카니미 나랑 장난하나.”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이곳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미카엘라를 봤다.
“요기소 나갈래여.”
“안 돼. 바깥에 무슨 일이 터진 줄 알고.”
“글애두 나갈래여. 우리 조카 지쿄야 해여. 에이, 약해여.”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오냐오냐하며 공부하고 마법만 배운 아이였다. 한마디로 이런 일에 경험이 없었다.
“라피, 나이 많은 조카님을 좀 믿어 보는 건 어떨까? 라피 입장에선 미덥지 못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티그리스 공작가의 후계자잖니.”
“앙대여! 우리 조카 다치묜 앙대! 낵아 가소 도아야 해여.”
“어린 네가 가서 뭘 어떻게 돕는다는 거니. 플라이 마법도 겨우 하면서. 정 나가고 싶으면 진정한 마법사가 되어서 조카 옆에 서렴.”
팩트로 가슴을 후벼 판 미카엘라를 본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미카엘라 입장에서 내가 밖에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게 강하게 말하는 게 정답이었을 것이다.
마법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에이든을 구하러 가겠다니 그것도 참 웃긴 일이었다. 남들은 주인공 버프를 받아서 어렸을 때부터 어마어마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던데. 난 그런 게 없었다. 생긴 것만 엄마를 닮았을 뿐, 처음부터 차근차근 모든 것을 밟고 가야만 했다.
이제까지 마법 성취력이 낮아도 다음에 잘하면 될 거라고 여겼다. 한데 오늘만큼은 그 생각을 한 과거의 내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고 싶었다.
“라피,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라피, 삐쳤니? 미안해. 내가 너무 세게 말하고 말았어.”
“아녀, 낵아 못나소 그래여.”
내가 그간 가족이란 울타리에 안주해서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렇다며 자책했다. 그러자 미카엘라가 다가와 조심히 품어 줬다.
“아니야, 라피는 너무나 훌륭해. 멋져. 세라피나 님께서 남긴 아기답게 모두의 마음을 풀어 주었잖니.”
“구치만 구게 이런 거엔 피료업짜나여.”
“필요가 왜 없니. 만약 우리 라피가 없었다면 에이든 님이 이곳에 계실 리도 없지. 그리고…… 가족들의 웃음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토닥이며 애써 내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미카엘라의 뒤에 있던 이들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그러고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다시 나와 미카엘라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저,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혹시 왕자비 마마께서 말씀하신 세라피나 님이란 분이 사반나 아카데미의 세라피나 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음? 아, 스카일라 경이 말하지 않았나 보군. 경들도 사반나 아카데미 출신이라면 알 거네. 우리 라피의 어머니가 세라피나 경이시네.”
음? 경? 그렇다면 여기 있는 시녀들도 전부 기사 출신이란 말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하자 다들 나와 미카엘라를 둥글게 감쌌다.
“세라피나 선배님께서 돌아가셔서 라피 님이 그분의 딸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오! 세상에.”
“판테르 공작님께서 세라피나 선배님과 닮은 여인과 밤을 보내 라피 님이 생긴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제껏 그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런 상황에서 알게 되다니…….”
시녀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미카엘라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해 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사반나 아카데미 출신의 기사로 현재는 시녀로 변장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미카엘라를 지키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엄마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들 성실하고 멋진, 타의 모범이 되어 국적에 상관없이 후배들을 잘 챙겨 준 고마운 선배님으로 여겼다.
다행이다. 처음에 둥글게 말아 서서 쏘아봐서 엄마가 이들에게 빚이라도 진 줄 알았는데.
“저희가 처음 입학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와중에 남자 선배들에게 큰일을 당할 뻔했었어요. 그때 세라피나 선배님께서 짠하고 나타나서 도와주셨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여자라도 능력이 있으면 유학을 보내 주고 배움의 길을 터 줬다. 돈은 많은데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 몇몇 영지는 무한 휴식 상태의 땅이 있곤 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유학을 보내 줬는데 이들도 그들 중 일부였다.
아이 낳는 것을 장려했지만 그런다고 인구가 늘어나진 않았다. 다들 아이를 한 명이나 둘만 낳아서 키우고 나머지 시간을 전부 부부의 생활에 집중했다.
뭔가 신세대적인 생각에 라피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본인들이 그리 살겠다는데 억지로 애 낳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무슨 일이 있어도 왕자비마마와 라피 아가씨는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상태에서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미카엘라를 위해 이불을 펴서 편히 앉혔다. 불은 사용할 수 없었다. 불을 붙이는 순간 연기가 나서 발컨 백작에게 들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이 안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바깥 상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초조해서 두 발을 동동 구를 때 미카엘라가 내게 익숙한 짐을 건네줬다.
“이걸 에이든 님이 네게 주라고 하시더구나.”
할아버지와 아빠가 직접 챙겨 준 가방이었다. 빵빵한 가방을 끌어안은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이곳에 온 거 후회하니?”
걱정이 잔뜩 스민 미카엘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녀. 단지 에이가 걱정대여.”
“우리 라피는 나이 많은 조카를 사랑하나 보구나. 그래서 사비나 공주님과 엮어 줬고 말이야.”
“니에, 구론거 가타여. 저 에이 사랑해여. 우리 가족 다 사랑해여.”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해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나는 가방을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이런 곳에서 내가 죽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고.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절대 떼쓰지 않았다. 일전에 오빠랑 구덩이에 빠졌을 때를 생각하며 버텨냈다. 그땐 단둘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이 더 많았다. 단지 내 가족이 아니라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서로를 위하며 만삭의 미카엘라를 도와줬다. 이대로 얼마나 있어야 할지 기약이 없었다.
“씨엘이 업써…….”
한동안 옆에 잘 붙어 다녔는데 씨엘이 다시 외도를 시작했다. 그래서 씨엘은 이곳에 들어오지 못했다. 냄새로 나를 찾아온다고 하더라도 굳게 닫힌 철문이 쉽게 열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꽉 막힌 곳에서 있었는지 알 수 없을 때 두꺼운 철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린 틈으로 보이는 얼굴에 나와 안에 있는 이들은 절대 기뻐하지 않았다.
“여기에 왕자비가 있…….”
퍽-
문 옆에 서 있던 시녀로 변장한 기사가 검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의 뒷목을 후려쳐서 쓰러뜨렸다. 그러곤 다시 문을 닫기도 전에 기사들이 들어오자 연방 뒷목을 후려쳤다.
그러자 이번엔 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왕자비는 사로잡고 나머지는 다 죽여도 된다.”
날 선 목소리에 우리는 비장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곧장 전투 자세를 취했다. 나 또한 끌어안은 가방에서 스크롤을 꺼내 멋지게 찢으며 외쳤다.
“아이스!”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기사의 발밑이 순간 빙판이 되었고 이내 미끌려 넘어졌다. 철갑은 엄청난 방어력을 상승시켜 주지만 넘어졌을 땐 답이 없었다.
넘어진 기사의 투구와 갑옷 사이 틈을 기사들이 검으로 찔러 넣자 그대로 바르르 떨다가 죽었다. 그 모습을 난 두 눈에 힘을 준 채로 외쳤다.
“다 쥬것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