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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84)화 (84/164)

84화. 

“아니 고모,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씨엘한테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데 그걸 떼면 걘 삶의 낙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지도 몰라.”

평소엔 신경 쓰지도 않더니 땅콩 뗀다는 말에 에이든이 두 다리를 다소곳이 모으며 씨엘을 대변했다.

“에이가 그러케 말하니 잠시 미루지 머.”

“아니 잠시 미루지 말고 영원히 생각하지도 마. 와, 우리 고모가 이렇게 잔인한 사람인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어.”

“머래. 니꺼 뗀다는 것도 아뉜데 왜 구래?”

“난 안 돼! 난 사비나 것이라 아무리 고모래도 나를 건드리면 안 돼!”

스무 살이란 나이를 똥꼬로 먹은 듯한 에이든을 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식사를 일찍 마친 나는 국왕의 동생이 왔으니 미카엘라도 그쪽으로 갔을 것이라고 여겨 정원으로 가진 않았다.

대신 에이든을 데리고 실베스터 왕궁을 돌아다녔다. 이제껏 왕궁을 탐사할 시간이 없어서 갔던 곳만 간 나는 넓은 왕궁을 둘러봤다.

“돌아다니다가 길 까먹을 거 가타.”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뒤에 계신 분들한테 물어보면 다 알려 주실 거야.”

근처에 오지 말라고 했더니 여전히 일정 거리를 두고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이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삐나 언냐 궁은 요기소 멀어?”

“그건 나도 모르겠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거든. 아! 나 화장실이 좀 급한데…….”

온몸을 배배 꼬는 것으로 봐서는 진짜 급해 보였다.

“요기 잇쓸게, 댕겨 와.”

“딴 데 가지 마. 절대적으로 여기 있어야 해! 알겠어?”

“웅. 알겟쓰니까 댕겨 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에이든은 바로 뛰어나갔다. 평소에 운동은 죽어라 하지 않던데 이럴 때만큼은 눈썹이 휘날릴 정도였다. 뒤따르는 이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는 가리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에이든이 화장실에 갔으니 이곳에서 기다려야겠지만 아이들은 원래 어른들 말을 잘 안 듣는 법이었다. 어딜 가든 알아서 찾아오리라 생각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멈췄다.

저 멀리서 처음 보는 남자가 몇몇 사람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띄면 괜히 시비 걸릴 것 같아 커다란 기둥에 몸을 숨긴 채 머리만 내밀었다.

“이제 곧 왕손이 태어나니 왕실은 탄탄할 것 같군요. 발컨 백작님.”

뒤따르는 남자의 말에 앞서 걷던 남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리 평화에 젖어서 어찌 북부 전사의 피라고 하겠는가. 라파엘을 봐도 비실비실해 보여서 원.”

말투로 봐서는 국왕의 동생이자 사비나의 숙부가 분명했다. 국왕과 형제라 닮은 것 같긴 했다. 한데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고 턱이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책에서는 저런 존재를 이간질 혹은 뒤통수치기의 대가로 묘사하곤 했다.

“사비나 공주가 사반나 제국의 티그리스 공작가의 후계자와 사귄다고 하던데 괜히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티그리스 공작가엔 후계자가 한 명이 더 있지 않은가. 그들도 큰 모험은 하지 않을걸세.”

뭐지? 묘한 말이 오갔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안 되는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의 입매가 삐뚜름하게 비틀려 올라갔다.

나를 따라온 이들은 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뒤에 있는 이들 역시 발컨 백작과 졸개로 보이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지 못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데 고대어를 해석하기 위해 판테르 공작가의 여식을 데려왔다고 하더군요.”

“괜찮아. 어차피 여자아이 아닌가. 가문을 잇지도 못하는 여자아이는 그저 정략결혼에 팔리는 소모품이니 그리 신경 쓰지 않을걸세.”

“듣기로는 금이야 옥이야 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금이야 옥이야 한다고 한들 진짜 금과 보석을 보상금으로 보내면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 게 분명해.”

그들의 말을 들은 나는 기분이 상당히 나빠졌다. 뭔지 몰라도 상당히 나쁜 일을 꾸미는 게 분명했다. 사반나 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가문의 핏줄이 이곳에 있음에도 신경 쓰지 않은 투였다.

주변을 쓱 본 이들은 헛기침하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에이든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고, 고모…… 내가 절대…… 후우, 하아…….”

“너 징짜 즈질 체력이구나. 쯧쯧.”

땀을 비 오듯이 흘린 에이든을 본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윽,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흐읍…….”

“어, 구래. 아랏쓰니까 숨 셔.”

운동하지 않은 마법사가 안쓰럽기만 했다. 에이든이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근처에 있는 바위 위에 앉은 채 팔짱을 꼈다.

“후우…… 고모, 내가 그곳에 있으라고 했는데 왜 여기 있는 건데. 고모가 안 보여서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원래 나눈 한 입으로 두말 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어휴, 진짜 내 동생이었으면 궁디 팡팡했을 건데.”

“안타깝겟네. 낵아 고모라소 못 때리니까.”

처음엔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낸 에이든은 마음이 풀렸는지 나를 꼭 안고 내 얼굴에 제 얼굴을 비비적댔다.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지 마.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고모가 안 보여서 심장이 내려앉아 버렸어.”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에이든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는 게 손에 느껴졌다. 뛰어오느라 열이 오른 에이든의 따끈한 몸을 꼭 끌어안은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나 이상한 말 드럿써.”

“음? 무슨 말을 들었어?”

주변을 쓱 살핀 나는 에이든의 귀에 아까 들은 말을 속삭였다. 내 말을 들은 에이든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나도 정확히 뭐라고 정의하지 못하겠어. 사비나를 만나서 의논해 볼게.”

“웅.”

고개를 끄덕인 나는 에이든과 몇 군데만 더 돌아다니고 처소로 들어갔다. 그곳엔 언제 왔는지 모를 사비나가 소파에 앉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사비나, 여긴 언제 오셨습니까. 사람을 시켜서 말씀해 주셨으면 빨리 돌아왔을 건데.”

“에이든 님이 고모님과 데이트 한다는 것을 아는데 제가 어찌 방해하겠어요.”

“그런 건 방해해도 됩니다. 고모도 다 이해해 줄 겁니다.”

뭘 믿고 그리 말하는 줄 모르겠지만 나이 많은 조카의 결혼을 위해 내가 뭔들 못 해 줄까.

쫄랑쫄랑 걸음을 옮긴 나는 사비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에이든에게 눈짓을 했다.

“오늘 숙부님은 잘 만나 보셨습니까.”

“으음, 글쎄요. 숙부님을 볼 때마다 그리 좋은 기억이 없어서요.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데 아바마마의 동생이라 막을 수도 없고…… 아,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숙부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지 사비나는 이야기하는 것을 피했다. 마침 안으로 들어온 다과가 들어왔다.

“다들 나가 잇써여. 삐나 언냐랑 비밀 이야기 할꼬에여.”

다과를 내려놓은 이들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안에 셋만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에이든에게 눈짓했다. 내 말이 짧고 발음이 안 되니 에이든의 입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 고모가 사비나의 숙부님으로 보이는 자와 부하로 보이는 이들이 나눈 대화를 몰래 들었다고 합니다.”

“네? 무슨 말을 들으셨기에 다들 물리셨나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은 사비나는 에이든이 입을 열자 차가 한 김 식을 때까지 마시지 못했다. 검은 눈동자에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에이든의 말이 끝났음에도 사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말을 들은 게 진짜냐고도 묻지 않고. 고뇌에 빠져들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앞에 놓인 설향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내 손에 들린 설향을 가져가더니 껍질을 깠다.

껍질을 까는 순간 진한 향이 훅 풍겼고 동시에 사비나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슬쩍 걷혔다.

“죄송해요. 고모님과 에이든 님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네요.”

“저흰 상관없습니다만…… 사비나, 괜찮습니까?”

“으음, 사실대로 말하면 안 괜찮아요. 숙부님이, 아니 그 인간이 감히 우리 고모님과 에이든 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매우 나빠요.”

본인은 오로지 국왕의 동생이라는 거 하나 외엔 내세울 것도 없는 주제에 잘난척한다고 혼잣말하는 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나 멍청하면 그런 말을 왕궁에서 할 수 있는지 대가리를 깨서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구게 문제가 아니자나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반란의 징조였다. 하지만 우리 집안일이 아니기에 나와 에이든이 직접적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우리를 모욕했다고 해도 말이다.

“아바마마와 오라버니랑 대화 좀 해 봐야겠어요. 으음, 죄송해요. 먼저 일어나 볼게요.”

“에이! 머하니, 얼룬 삐나 언냐 에스코뜨 해조야지.”

사비나가 급히 나가려고 하자 내 입에 설향을 넣어 주려는 에이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난 에이든은 약간 충격받은 듯한 사비나의 손을 이끌고 방 밖으로 천천히 나갔다.

그 틈에 안으로 들어온 씨엘이 내게 안겨들었다.

“씨엘, 너 바람펴?”

꾸우웅.

“너 딴 냥이 잇써?”

미혼 냥이 만드는 것은 허락하지 못하니 정식으로 데려와서 허락받으라는 말에 씨엘은 갑자기 팔짝 뛰었다. 얼마나 격렬하게 뛰는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건드려서 쏟아질 정도였다.

“강한 부정은 긍정인데?”

냥, 냐옹, 냥냥냥!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랩을 하듯 소리 지르는 씨엘을 본 나는 팔짱을 꼈다. 지금은 씨엘이 미혼 냥이를 만드는 것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책상 위에 있는 통신구에 약간의 마나를 주입했다. 잠시 후 통신구가 반짝 빛이 났고 가운을 입은 채 가슴을 훤히 드러낸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라피! 몸은 괜찮더냐? 감기는 안 걸리고? 자면서 이불 차면 안 되는데 걱정이로구나.]

미카엘라가 말한 것처럼 자면서 이불을 자주 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삐눈 건강해여. 아빠눈 갠차나여?”

[괜찮긴, 우리 라피가 없어서 아빠 가슴이 매우 아프구나.]

굳은살이 박인 커다란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는 아빠의 모습을 본 나는 픽, 웃었다. 마치 이 가슴에 안기려면 얼른 돌아오라는 뜻으로 보였다.

“아까 무슨 일이 잇엇냐묜요.”

매일 그날 있었던 일을 아빠에게 말하곤 했다. 그렇기에 오늘도 사실 그대로 설명했다. 처음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듣던 아빠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개새…….]

[크흠, 아가씨께서 듣고 계십니다.]

아빠의 순화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아빠의 말을 중간에 끊은 오스카의 눈동자가 너른 등짝에 꽂히는 게 안 보여도 보이는 것 같았다.

[크흐으음, 그 강아지 베이비가 우리 라피랑 처조카 아들놈을 그따위로 말했다고?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아빠를 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 구게 문제가 아니자나여.”

다른 의미로 열 받은 아빠를 본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피, 그곳에서 싸움이 일어나든 뭐든 우린 간섭할 수 없단다. 실베스터 국왕이 손 내밀기 전엔 말이다. 물론 내 딸이 그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면 문제가 다르겠지만.]

“우웅, 역시 그러겟져? 아빠, 이제 뺘뺘해여. 하부지, 만나야 해여.”

[아니 라피? 우리 딸? 연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통신을 끊는다고 하는 거니?]

“아빠, 뺘뺘!”

[라피!]

툭-

통신구를 끊은 나는 이어 할아버지와 언니에게 연락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똑같이 설명했고 그 결과 다들 강아지 베이비를 불러댔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큰소리 한 번 쳐본 건가 싶었다.

“미까 언냐, 배가 더 커졋써여.”

“응, 아가가 더 커졌나 봐. 요즘엔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야.”

배를 쓰다듬으며 평소처럼 이야기하고 있을 때 몇몇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비 마마, 피하셔야 합니다. 발컨 백작이 역모를 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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