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화들짝 놀라 큰소리로 대답하는 에이든의 옆구리를 얼굴을 붉게 물들인 사비나가 쿡 찔렀다.
“고, 고모님…… 에이든 님이 엉뚱한 생각을 해서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 것 같아요. 놀라진 않았죠?”
“어떤 생각을 햇기에?”
“어, 어? 아…… 그러니까…… 몰라. 까먹었어. 하.하.하.”
그게 티그리스 가문의 차차기 후계자가 할 말이냐는 듯이 보자 에이든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에이, 혹시 모루니까 겨론 전까지 조신하게 잇써. 알겟쏘?”
“어, 응? 아…… 으응. 알겠어.”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다리가 꼬아지지 않아 가까스로 오른쪽 무릎에 왼발을 억지로 올렸다. 거만한 태도로 에이든을 위아래로 훑어본 나는 사비나에게 말했다.
“삐나 언냐는 이만 나가보는 게 낫겟써여. 아조씨가 쵸다보고 잇을지도 모루니까여.”
“아, 오라버니…… 흐흠, 그럼 고모님 전 이만 가 볼게요. 에이든 님, 내일 봐요.”
사비나가 급히 나가자 내 시선은 오로지 에이든에게 향했다.
“에이, 요기와서 안자바.”
단순히 앞으로 와서 앉으라는 말이었는데 에이든은 흠칫했다.
“후우, 난 어머니가 그 말 할 때가 가장 무섭던데, 이젠 고모까지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댓고, 얼룬 안자.”
손가락으로 맞은편을 가리키며 다시 말하자 에이든은 쭈뼛쭈뼛 움직였다. 마치 지은 죄가 있는 것처럼 다소곳하게 앉았다. 언제든지 소파에서 뛰어나갈 수 있게 엉덩이를 전부 붙이지 않았다.
“너 마리야.”
“응? 왜?”
“뽀옵뽀를 얼마나 한 거야.”
“어, 으응?”
“너 입수리 빨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그때야 에이든이 손수건으로 제 입술을 훔쳤다. 하얀 천에 묻어나온 색깔을 본 에이든은 입술 색만큼이나 빨갛게 변했다.
“어룬으로서 말하눈데, 조심해. 요기 우리 집 아냐. 남의 집이야.”
“…….”
“그 아조씨한테 걸리묜 너 궁물도 업써! 징짜 조심해. 알겟쏘?”
“으, 응…….”
내가 성인이라면 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 일쯤은 내가 커버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린애 몸으로 제 동생을 건드렸다고 눈 돌아가서 에이든을 공격하는 라파엘을 막을 수는 없었다.
“먼 일 하려묜 커튼 좀 치든가. 다 보여 줄래?”
“응? 아…… 미안.”
내가 가리킨 곳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나와 에이든의 침실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높이의 나무 위엔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식빵을 굽고 있었다. 어딜 갔나 했더니 씨엘이 저쪽으로 들어오려고 내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고양이도 올라오는데 라파엘이라고 못 올라오리란 법은 없었다. 진짜 이번에 격한 운동하는 것을 들켰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에이든에게 단단히 충고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낵아 이 나이에 나이 마는 조카들 뒤치닥꺼리 해야겟니?”
“미안…….”
“조심해. 알겟쏘? 그리구 아가는 절때 안대! 알겟찌?”
“으, 응. 고모 말대로 조심할게.”
나이 많은 조카에게 약간의 충고를 해 줬더니 조금 피곤해졌다. 연방 한숨을 내쉰 나는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인 에이든의 모습을 보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손을 내밀어 에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연인이 오랜만에 만났으니 끓어오르는 연심을 어쩔 수는 없었으리라. 말로만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마음을 몸으로 진득하게 녹여냈을 에이든이 한편으로는 불쌍해 보였다.
“에이, 미안. 낵아 나이 마니 머것쓰묜 아조씨도 막아줄 수 잇쓸건데.”
“아, 아냐. 아니야. 우리가 부족한 것이지 고모가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 에이든은 나를 안아 올리더니 침대로 데려갔다. 조심히 눕히더니 옆에 제 몸도 뉘었다.
“고모, 잠깐만 쉴게. 고모 말대로 운동 좀 해야겠어. 진짜 피곤하네.”
“으휴, 이팔청춘이묜서 모타는 말이 업써!”
마법사라 몸을 단련하기보다는 머리를 단련한 에이든을 꼭 끌어안은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하루 일정이 꽉 찬 네 살 인생이 참 고달팠다.
요즘 정원에서 쉬고 있을 때면 미카엘라가 부른 배를 안고 왔다. 혹은 내가 좀 늦게 나오면 미카엘라가 먼저 자리를 펴고 기다리고 있었다.
초반엔 씨엘이 같이 있어 줬는데, 미카엘라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다시 방랑벽이 도져서 곁에 있지 않았다.
“정말 마법을 배우고 있는 거야? 우와, 신기하다. 난 라피의 부모님이 기사 출신이라서 당연히 기사가 될 줄 알았는데.”
“기사는 오빠가 해여. 나눈 하부지네 가서 마봅 배워여.”
부모님의 직업에 따라 자식들도 보고 배운 게 그런 쪽이니 같은 계열로 장래희망을 정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전직이 마법사인지라 기사의 길은 오래전에 접었다. 해 본 적 없는 몸을 단련하며 검을 쥘 필요가 없었다.
내 곁에 원한다면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지켜 주니까 말이다.
“마법을 배운다면 혹시 보여 줄 수 있을까? 보고 싶은데.”
뭔가 잔뜩 기대하는 듯한 미카엘라의 말에 나는 검지로 볼을 콕 찍은 채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일전에 성공한 마법을 하기로 했다.
“잘 바여.”
“응, 잘 볼게.”
방긋 웃는 미카엘라의 앞에 선 나는 두 눈을 감았다. 온몸의 마나를 쥐어짜며 정신 집중을 해서 외쳤다.
“플라이.”
순간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둥실둥실 떠올랐다.
“우, 우와! 멋져! 진짜 멋져.”
파닥파닥-
팔로 공중에서 헤엄치듯 움직이자 미카엘라는 연방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쳤다. 내 나이대의 아이가 마법을 하는 것을 처음 본다나 어쩐다나.
나 역시 실제로 이 나이대의 아이가 마법을 시전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한동안 플라이 마법으로 공중에 떠다니다가 미카엘라가 붙잡자 그때야 플라이를 해제했다.
“할아버지가 정말 좋아하시겠다.”
“울 하부지는 낵아 웃기만 해도 조아하세여.”
“풉! 뭐야 그게.”
사실 그대로를 말했건만 미카엘라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연방 웃음을 터트렸다가 멈췄다. 요즘 자꾸 아기가 배를 차서 깜짝깜짝 놀란 표정을 짓곤 했다.
“우리 아가도 라피가 말하는 것만으로도 좋은가 봐. 라피를 만날 때마다 발길질이 심해.”
“헤헤, 이노므 인끼는 어쩔 수 업나바여.”
“푸풉!”
한동안 웃느라 정신이 없는 미카엘라는 눈물마저 찔끔찔끔 흘리더니 나를 폭 안았다.
“후우,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일찍 가 봐야 해. 아쉬워서 어쩌지.”
“우웅, 구롬 담에 봐여.”
약속이 있다는 미카엘라와 헤어져서 온 나는 곧장 시녀들의 손에 의해 깨끗하게 씻겨지고 새 옷이 입혀졌다. 오늘은 실베스터 국왕의 만찬에 초대되었기에 때 빼고 광을 낸 것이다.
“고모님의 머리는 제가 손봐 줄게요.”
대기하고 있던 사비나가 내 머리를 만져 단정하게 만들었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국왕이 초대했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되자 에이든과 사비나의 손을 잡고 쫄랑쫄랑 걸음을 옮겼다. 만찬장엔 먼저 와서 기다리는 국왕이 있었다.
“안냐세여. 초대해 주셔서 감쟈해여.”
“허허허, 어쩜 이리도 말을 예쁘게 할까. 자! 아이용 의자에 앉게나. 판테르 양.”
“니에.”
국왕이 직접 손으로 가리킨 의자에 에이든이 앉혀 줬다. 그곳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눈에 익은 사람이 보였다.
“어? 미까 언냐다. 미까 언냐!”
미카엘라가 보이자 의자에서 내려서 후다닥 달려 그녀에게 가다가 멈췄다. 옆에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잘생긴 라파엘이 붙어 있었다.
“아조씨가 왜 거기서 나와여?”
요즘 눈에 보이지 않아 그나마 마음 편히 지내고 있었는데 딱 마주치자 나는 눈을 흘기며 그를 봤다.
“미카엘라가 내 부인이니까 같이 온 것이지.”
“엑? 미까 언냐의 남표니 아조씨라고? 말도 앙대!”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거지?”
“미까 언냐의 남푠은 참한 남자라고 했는데…….”
일전에 미카엘라에게 남편 자랑을 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남편이 참 참하다고 말했다. 한데 이건 뭐 어딜 봐서 참하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카엘라의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게 분명했다.
“풉! 라피, 우리 왕자님은 밤에 참해진단다.”
“아! 낮이밤져?”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책에게 밧써여. 낮엔 이기고 밤엔 진대여.”
“컥.”
“쿨럭!”
“고모, 제발…….”
아주 오래전에 어디선가 본 문구를 말했건만 죄다 얼굴이 새빨간 토마토 같았다. 너무 잘 익어서 조금만 톡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린아이가 못하는 말이 없군. 난 말이다. 낮에도 져 준다.”
“아! 그 유명한 낮져밤져? 아조씨 징짜 참하구나.”
라파엘의 말에 나는 그가 미카엘라 앞에서만 매우 참하다는 결론을 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얼굴은 활활 타오르는 고구마 수준이 되었다.
“라파엘, 너 어린 판테르 양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이더냐. 크흠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듣고 있기 민망했는지 국왕이 헛기침하며 말을 끊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따박따박 말대답을 했다.
“와, 왕자님…… 이제 네 살짜리 아이도 있는데 그런 말은 좀……,”
“미카엘라, 저 아이를 유심히 관찰했는데 나이만 네 살이지 이미 성인을 넘어선 지능을 가진 것 같습니다. 마치 어린아이 몸에 성인의 혼백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이 말이지요.”
라파엘의 말에 나는 흠칫 놀라 괜히 미카엘라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생긴 것처럼 날카롭게 후벼 파는 무언가가 있었다.
“크흠흠, 고모가 우리 집안 핏줄을 진하게 타고 나서 지나치게 똑똑해서 그럽니다. 매일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지내서 성인보다 지식이 많지요.”
에이든이 대충 정리해 주자 라파엘이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봤다. 하지만 미카엘라가 걸음을 옮기니 얼른 그녀를 부축해 빈자리에 앉았다.
“자! 이제 식사하지.”
국왕의 말이 떨어지자 나는 사비나와 에이든의 도움을 받아 식사를 했다. 입맛에 맞는 음식이기에 배가 불러 왔음에도 거절하지 않고 먹다가 앞을 봤다.
“아조씨, 당근이랑 우유 남겨?”
“그냥 내 취향이 아닐 뿐이다.”
내 말에 라파엘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어깨를 으쓱하며 픽, 웃었다.
“아조씨는 아직 아가인가 보다.”
“이렇게 큰 아기 봤느냐.”
“우웅, 앞에 잇눈데.”
“풉!”
순간 사비나와 미카엘라의 입술 사이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들렸다.
“우유랑 당근 머거야 건강해여.”
“그런 거 안 먹어도 난 지금 건강해.”
“아뉜데, 늘거서 개고생할찌도 몰라.”
“컥! 고, 고모 이제 그만…….”
배를 움켜잡은 에이든이 말렸지만 나는 라파엘을 보며 씩 웃었다.
“우유랑 당근 머그라고 아가들 노래도 잇눈데.”
“그런 거 못 들어봤다.”
“노래 잇눈데…….”
라파엘이 단호하게 쳐냈지만, 국왕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나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데 혹시 불러 줄 수 있겠나? 판테르 양.”
“니에, 전하의 부탁이라묜 드러드릴게여.”
이런 곳에서 나는 절대 빼지 않았다. 적절하게 네 살짜리 아이라고 어필하듯이 말이다. 에이든의 도움을 받아 의자 위에 올라선 나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무릎을 굽히며 우유 송을 불렀다.
“우유 조아, 우유 조아, 우유 주떼여, 더 주떼여.”
이 세계와 저 세계의 낙농업계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바치는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