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아침엔 고대어 읽기 및 해석으로 학자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고모, 이것 좀 먹으면서 쉬엄쉬엄해.”
“에이, 너 흑씸 보여.”
“고모도 참, 흑심이라니. 내가 얼마나 우리 고모를 위해 서포트 해 주는데.”
옆에서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것을 도와주긴 했다. 그 모든 게 사비나를 만나기 위해 그러한 것이라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의 의심 가득한 눈빛에 에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설향을 까서 내 입에 넣어 줬다.
“빤리빤리 해야 해. 아빠가 기달료.”
“이곳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너무 급하게 하려고 하지 마.”
나를 생각해 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내가 늦게 끝내면 끝낼수록 이곳에서 사비나를 만날 시간이 늘어났다. 그걸 노린 에이든의 흑심이 팍팍 담긴 걱정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설향을 우물우물 씹었다.
“티그리스 공자의 말도 옳습니다. 그런 김에 이곳에서 천천히 지내다가 가시지요. 여차하면 이곳의 거리를 구경하셔도 되고요.”
“맞습니다. 이곳 로터스의 거리가 참 잘 정비되어 있답니다. 그곳에 가시면 이 나라의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을 겁니다.”
밀레니어 후작에 이어 다른 학자들도 나서서 내게 이곳저곳을 소개해 줬다. 판테르 공작령도 돌아다녀 본 적 없는 내게 그곳에 가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자세히 알려 줬다.
“구곤 담에 하구 지금은 요고 해여. 얼룬!”
“네네, 얼른 하시지요.”
설향을 오물오물 씹으며 다음 페이지를 읽고 학자들과 함께 논의했다. 이렇게 하다가는 한 달 이상 걸릴 것만 같았다. 기다리다 못해 아빠가 쳐들어오면 안 되기에 얼른얼른 최대한 진도를 뺐다.
옆에 있는 에이든도 티끌만큼 거든다면서 아는 척하는 게 참 귀여워 보였다. 나이 많은 조카가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안타까운 나머지 내가 먼저 나서서 해석했다.
고대어 읽기 및 해석 시간이 지나자마자 음식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저도 같이 먹어요.”
정확히 3인분 차림에 사비나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 시간 내내 하하호호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한마디만 하면 바로 웃음이 터졌다.
“오라버니께서 아직까지 편식을 해서 탈이에요.”
“아니 그 나이에 편식을 하십니까?”
“네,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죽어도 싫어하는 스타일이라서요. 특히 당근과 우유를 싫어해요.”
“낵아 보기엔 당근이랑 우유보다 에이를 더 시러하눈 거 가튼데요?”
첫날엔 내가 고대어를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감시하듯 대놓고 방에서 지켜봤다. 그 이후로는 멀찍이서 봤다. 내가 아닌 에이든과 사비나를 말이다. 그 덕분에 둘의 데이트 공간은 나와 에이든이 머무는 궁으로 한정되고 말았다.
“삐냐 언냐의 오빠는 할 일이 그러케도 업써여?”
“할 일이 없긴요. 엄청 많죠. 한데 요즘 새언니, 으음 그러니까 왕자비께서 우울증에 걸려서 만남을 거부하니 제게 더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요.”
“구곤 좀 짠하긴 하지만…… 울 에이를 시러하는 건 시러. 애가 올마나 성실하고 성격이 조은데.”
“풉! 고, 고모님이 그리 말씀하시니까 마치 나이 지긋이 드신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랑 똑같은 것 같아요.”
내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한들 대한민국에서 열다섯 살, 베네딕트 제국에서 열여덟 살이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열다섯 살과 열여덟 살을 더해서 서른세 해를 살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내 배움과 경험은 18년이 최대치였다.
식사 중에 웃느라 정신이 없는 사비나를 본 시녀들의 얼굴엔 어색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왕족으로서 식사 예절 정도는 배웠을 터였다. 식사 중엔 조용히 음식을 먹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사비나는 마치 평민 집안의 식탁처럼 매우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티그리스 공작저의 식사 시간을 보는 듯했다. 한쪽에서는 에이든과 제이든이 다퉜다. 다니엘과 헬레나는 가끔 다투면서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말해 뭐 하겠는가. 내게 어떻게든 한 입이라도 더 먹이기 위해 억지로 위장에 음식물을 차곡차곡 쌓이게 했다.
내가 소리 내어 먹어도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는 듯이 보며 이대로 크지 말아 달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식탁엔 음식과 함께 웃음꽃이 함께 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사비나는 푸근해서 좋다고 말하더니 이곳에서 실천에 옮길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렇게 웃으면서 먹으면 시간도 잘 가고, 소화도 더 잘되는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우리 고모랑 있으면 있던 우울증도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아니건만 사비나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르 웃으며 숨이 넘어갔다. 그런 사비나를 매우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보는 에이든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흘러내렸다. 저렇게 좋으면서 어쩌자고 처음엔 어긋났는지 원.
“얼룬 먹고 빤니 데이트나 하러 가.”
“오늘은 고모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댓거든? 두리 만나묜서 나눈 끼어넣지 마.”
나도 눈치란 게 있었다. 둘이 데이트하는데 끼어들어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얼른 밥을 먹고 먼저 자리에서 탈탈 털고 일어났다.
“먼저 갈래, 두리 잘 노라.”
나는야 센스 있는 어른, 나이 많은 조카에게 판을 깔아 줬으니 방이든 어디든 가서 데이트할 것이다. 침대나 소파에서 땀나도록 운동해도 나는 모른 척할 것이다.
“고모 어디 가?”
“몰라두 대.”
뽈뽈뽈 걸음을 옮긴 나는 곧장 바깥으로 향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기온에 바르르 떨었다.
“이걸 걸치시지요. 따뜻한 보온 마법이 걸려 있답니다.”
시녀 중 한 명이 내게 보온 마법이 걸린 망토를 걸쳐 줬다. 순식간에 따뜻해져서 시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버여. 요곤 선물!”
“어머나, 저 주시는 건가요? 감사해요.”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주자 시녀는 환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코를 쓱 훔친 나는 곧장 짧은 다리를 움직였다. 정원으로 들어서자 양지바른 곳에 돗자리를 편 채 기다리고 있는 미카엘라의 모습이 보였다.
“미까 언냐!”
“안녕, 라피 좋은 점심이야.”
미카엘라의 옆에 풀썩 앉았다. 돗자리에도 마법이 걸려 있는지 엉덩이에 온기가 느껴졌다.
“미까 언냐, 밥 머것써여?”
“응? 아니, 입맛이 없어서 아직 안 먹었어.”
“구롬 아가도 맘마 안 머것겟네여.”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대신 이걸 가져왔어.”
그녀가 꺼낸 바구니엔 온갖 간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걸 본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하니 이걸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미카엘라를 봤다.
“같이 먹자.”
“나 밥 머것써여.”
“음, 그럼 조금만 더 먹어. 이거 엄청 맛있어. 찰떡 아이스란다.”
“찰똑 아이스? 히야, 맛나 보여.”
이게 사비나가 입이 닳도록 말한 찰떡 아이스인가 싶었다. 봉긋한 조그만 동산 모양의 찰떡을 든 나는 야무지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말랑말랑한 얇은 찰떡 속에 부드럽고 고소한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찰떡과 아이스크림의 조합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히야, 맛싯써여.”
“그렇지? 맛있지? 많이 먹어. 많이 가져왔거든.”
연방 맛있다며 우물우물 씹자 미카엘라가 찰떡 아이스를 몇 개나 꺼내 놓았다. 그걸 본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까 언냐도 머거여. 얼룬! 아가 배고파.”
“응, 그래. 아기를 위해서라도 먹어야지.”
먹기 전의 찰떡 아이스처럼 미카엘라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욤뇸뇸 찰떡 아이스를 먹을 때마다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
“요고 마싯써여. 요고 딸기맛, 요고는 쪼꼬…….”
찰떡 아이스는 색깔별로 다른 맛이 났다. 찰떡에 딸기맛과 초콜릿 맛을 섞어 만들었고, 같은 맛의 아이스크림을 품은 찰떡 아이스였다.
“아가, 머 먹고 시퍼? 웅? 딸기? 쪼꼬? 아항! 쪼꼬가 먹고 시프다고?”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미카엘라의 배에 대고 말하자 초콜릿 맛에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미까 언냐, 아가가 요고 먹고 시프대여. 얼룬 드세여, 얼룬여!”
“응? 응. 그래 먹을게.”
내가 건넨 초콜릿맛 찰떡 아이스를 받은 미카엘라는 조금씩 씹어 삼켰다. 처음엔 먹는 게 조금 힘들어 보였지만 따뜻한 우유를 꺼내 주자 꿀꺽 마시며 마저 하나를 다 먹었다.
“아가야, 머라구? 아직도 배고프다고? 언냐! 아가가 더 먹고 시프대여.”
이번엔 딸기맛 찰떡 아이스를 건넸다. 어떻게든 미카엘라의 입에 뭐라도 하나 더 넣기 위해 나는 아기 핑계를 대고 바구니에서 이것저것 꺼냈다. 배가 부른 나는 최대한 조금씩 천천히 먹으며 미카엘라에게 먹였다.
“라피랑 먹으니까 입맛이 도는 것 같아.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먹을까?”
“니에, 구니까 얼룬 드세여.”
미카엘라와 찰떡 아이스를 비롯한 간식을 나눠 먹은 나는 부른 배를 통통 두들겼다. 그 모습을 본 미카엘라가 픽, 웃었다.
“나도 라피처럼 귀여운 아이를 낳고 싶어.”
“언래 아가는 다 기여어여.”
미카엘라만 닮아도 어여쁜 아기가 태어날 게 분명했다. 아빠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방긋방긋 웃으며 간식 타임을 마무리하니 서서히 졸리기 시작했다. 배가 부르니 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삐 졸료여.”
“졸려? 그럼 나랑 같이 잘까? 여기 꽤 따뜻하단다.”
온기를 품은 돗자리에 눕자 미카엘라가 담요를 펼쳤다. 비록 약간 찬바람이 불었지만, 마법 담요는 따뜻하기만 했다. 미카엘라와 함께 누워 잠시 자다가 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갈래여. 조카가 차즐지도 몰라여.”
지금쯤이면 정신 차리고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으음? 라피, 벌써 가려고? 조금만 더 나랑 있다가 가. 응? 내가 데려다줄게.”
“구곤 앙대여. 구롬 낼 바여.”
미카엘라에게 안녕을 고한 나는 도도도- 달려가다가 멈췄다.
“끗낫겟찌? 끗낫을고야.”
이쯤 했으면 둘이 운동을 다 했을 시간으로 여겼다. 나이 많은 조카의 눈치를 살펴야 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찍이서 몰래 지켜보던 이들이 서서히 내 근처로 몰려들었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기에 일부러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문 앞에 선 나는 노크를 하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드러가도 되려나.”
내가 아직 어린 탓에 에이든과 같은 방을 사용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에이든이 바로 대응하기 위해서라고는 하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낵아 왓따! 조옷카야…….”
문을 활짝 열며 이 몸 등장을 외치려던 나는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슬쩍 혀를 찼다. 얼마나 운동을 심하게 했는지 온몸이 땀투성이인 에이든을 보고 있노라니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고, 고모 왔어?”
“고모님, 오셨어요? 호호호.”
당황한 듯한 두 사람을 본 나는 팔짱을 낀 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에이, 힘드러? 땀 흘려.”
“응? 아, 응. 이 안에서 좀 움직였더니…….”
“즈질.”
“어?”
“즈질 체력이네. 운동 좀 해, 제이 보고 배워.”
내 말에 화들짝 놀라 움찔한 에이든은 뒤이은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배울 게 없어서 제이든을 배우겠어. 고대어도 못하는데.”
“이 세상에서 고대어 모테도 잘만 사라. 군데 즈질 체력이묜 오래 살기 힘드러.”
“아, 알겠어. 앞으로는 운동할게. 나 오늘도 운동하느라 이렇게 땀 흘린 거야.”
나를 아직도 네 살짜리 어린 고모로 보는 에이든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운동햇기에 옷이 구겨졋써?”
옷을 다려 입어야 할 정도로 두 사람 옷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 그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장난삼아 헤죽 웃으며 물었다.
“나도 가치해도 대?”
“그건 절대 안 돼! 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