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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80)화 (80/164)

80화.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사람 만나는 것조차 피하고 말도 극도로 아끼던 미카엘라가 웃는 모습에 멀리서 지켜본 이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떠졌다.

처음엔 왕궁 정원에 있는 아이를 쫓아내려 했지만, 미카엘라의 반응에 두고 봤는데 좋은 효과가 나타났다.

“저 아이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궁금함에 클레어가 미카엘라와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한 호위기사 대장 스카일라 경에게 물었다.

“은색 머리에 노란 눈동자의 어린아이라…… 오늘 왔다는 그 아가씨가 아닐까 합니다.”

“아! 그렇다면 혹시 그…….”

“아마 맞을 겁니다. 게다가 저기 멀찍이서 지켜보는 호위기사와 시녀들이 있군요.”

스카일라 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곳엔 숨어 있다시피 한 이들이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이번에 온 판테르 영애를 호위하고 시중들기 위해 뽑은 이들이 분명했다.

“일전에 공주님께 듣기로는 입에 넣고 와라라랄- 하고 싶으신 귀여운 시고모님이라고 하셨으니…… 두 분이 계시도록 두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해하지만 심장에만 유해한 존재인 라피에 관해 설명한 스카일라 경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드리워졌다.

먹을 것을 싫다고 거부한 미카엘라의 입에 라피가 뭔가를 넣어 주고 있었다. 기미도 보지 않은 채 입에 넣어진 것을 꼭꼭 씹는 모습에 클레어가 화들짝 놀라 뛰어가려다가 멈췄다.

“상대는 판테르 공작님의 따님이자, 티그리스 공작님의 외손녀입니다. 그런 분이 왕자비 마마를 해할 리가 없지요.”

“하지만…….”

“저것 보십시오. 본인도 먹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 저 모습을 사비나 공주님이 보신다면 부러워하실 겁니다.”

모두가 놀라워하고 흐뭇해하는 표정을 보지 못한 미카엘라와 라피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먹었다.

“오때여? 마싯써여?”

“응, 맛있어. 이건 누가 준 거니?”

“하부지가 막막 구겨 너어줫써여.”

얼마 전에 처음 오빠를 만났던 때를 이야기 해 준 라피를 본 미카엘라는 장하다는 듯이 등을 다독였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께서 혹시 몰라 챙겨 주셨구나.”

“니에, 요기 마니 잇써여. 미까 언냐, 마니 드세여.”

“응, 정말 맛있구나.”

산해진미가 앞에 펼쳐져 있어도 식욕이 돌지 않았다. 하지만 라피가 건넨 말랑 콩떡에 입맛이 돌았다. 콩떡을 먹다가 목이 막히자 이번엔 가방에서 또 뭔가를 꺼냈다.

“우유! 배에 아가 잇쓰니까 우유 드세여.”

“이런 것도 가지고 다니는 거야?”

“니에, 하부지가 챙겨줘써여. 얼룬 드세여.”

라피가 준 우유에 말랑 콩떡을 먹은 스카일라는 배가 서서히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 본 포만감에 스카일라의 창백한 안색이 서서히 옅어졌다.

“라피가 먹을 걸 내가 다 먹어 버린 것 같아. 미안해서 어쩌지?”

“갠차나여. 아가가 머근 거니까.”

산달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볼록 솟은 배를 본 라피는 두 눈을 반짝였다.

“군데 아가 언제 나와여?”

“한 달하고 조금 있으면 태어난다고 하더구나.”

“히야, 미까 언냐가 엄마 대는 거네여.”

“응.”

“군데 표정이 왜 구래여?”

비록 처음보다는 풀렸지만, 우울감이 느껴지는 미카엘라의 모습을 본 라피가 물었다. 그러자 미카엘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다시 입을 닫은 미카엘라를 본 라피의 눈동자에 그녀의 손이 닿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을 허락도 없이 잡은 라피는 탄성을 질렀다.

“미까 언냐, 기사니미에여?”

“으, 응? 그걸 어떻게…….”

“아빠도 요러케 손이 딱딱해여.”

“아, 으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사였지.”

“구롬 지금은 기사 아니에여?”

“응, 아기 가졌으니까.”

아이를 가짐과 동시에 미카엘라는 손에서 검을 놓았다. 평생 검을 잡고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한 미카엘라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웅? 울 엄마도 기사엿대여.”

“응? 라피의 엄마도 기사였어? 지금 어디 계시는데?”

“쪼기!”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 모습을 본 미카엘라는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라피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다가 돌아가셨니?”

“우웅? 전쟁햇따고 그랫써여.”

“아…….”

전쟁 중에 기사가 전사하는 것은 어쩌면 영광일 것이다. 하지만 가족들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일 건데 라피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드리워 있었다.

“엄마 안 보고 싶어?”

“보구 시퍼여. 군데 울묜 앙대. 낵아 울묜 다들 슬포할거니까여.”

다른 이들을 위해 일부러 울음을 참고 대신 웃음을 짓는 라피를 본 미카엘라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네 살인데 아이가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듯했다. 그건 그것대로 슬픈 일인데 아이는 너무나 담담해 보였다.

“엄마는 정말 멋있는 기사였을 거야. 한데 엄마 이름이 어떻게 되시니?”

라피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본 미카엘라는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에 물었다.

“쎄라삐나!”

“음? 세라피나?”

“니에, 엄마 이름 쎄라삐나! 그래소 아빠가 내 이름도 또가치 지어졋써여.”

미카엘라는 사반나 아카데미에서 유학을 했다. 그곳에서 기사로서 수업을 받을 때 복도에 걸린 유명한 기사들의 초상화를 하루에도 몇 번씩 봤다.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시원시원한 미소가 매력적인 그림이 떠올랐다. 성전에 참전해 부하들을 살리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그 자리에서 산화한, 기사들에게는 전설적인 존재인 세라피나 판테르-

미카엘라의 우상인 세라피나 판테르를 그대로 빼다 놓은 듯한 라피는 그저 방긋방긋 웃었다. 그러고는 미카엘라의 손을 꼭 잡았다.

“아가 나으면 기사 모탈 것 가타서 우울해여?”

“어, 으응?”

“구론고라묜 갠차나여. 울 엄마도 오빠 나은 후에 기사햇써여.”

여성 기사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임신하면 기사를 그만두거나 행정직으로 전환되었다. 아이를 갖는 그 순간 몸의 모든 영양분은 아이를 향해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체형의 변화와 떨어진 체력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사직을 하곤 했다.

미카엘라 역시 기사 출신이었다. 사반나 아카데미에서 기사 수업을 받고 이곳에 와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왕궁에서 기사로서 근무하다가 라파엘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결혼할 때까진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아기를 갖는 그 순간 지금까지 기사가 되기 위해 온갖 고난과 고통을 겪어 왔는데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에 갑자기 우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한데 라피가 갑자기 등장했다. 그러곤 자신의 우상인 세라피나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그분은 아들을 낳고도 기사로서 똑같이 훈련하고 안살림까지 도맡아 한 대단한 분이었다. 그걸 떠올린 미카엘라는 갑자기 암울한 미래에 한 줄기 빛이 스미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를 낳고도 기사를 할 수 있을까?”

“웅, 할쑤 잇써여. 울 엄마두 햇눈걸여.”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왕자비로서 미카엘라는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변 눈치를 보게 되었다. 혹여나 아이를 낳고 기사를 한다고 뒤에서 험담을 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롤땐 니드른 이론것도 모타지? 흥! 하묜서 피식 웃어여.”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은 라피를 본 미카엘라는 그동안의 걱정이 한순간에 녹아 버렸다. 갑자기 우울함이 날아가 버렸다. 순간 상쾌해진 미카엘라는 속이 시원해졌다. 그래서인지 배 속에서 아기도 통통- 발길질을 해댔다.

“앗! 아기가 움직이나 봐.”

“징짜여? 히야, 나두 만져바도 대여?”

“당연하지.”

미카엘라가 라피의 손을 제 배에 올렸다. 그러자 아이의 발길질이 더 세졌다.

“이야, 싱기해. 아가가 기부니 조은가 바여.”

“응, 라피가 만져 줘서 그런가 봐.”

“헤헤, 아가야. 나중에 만나장. 알겟찌?”

미카엘라의 배를 쓰다듬은 라피는 방긋방긋 웃더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제대로 낮잠을 자지 않은 후유증이었다.

“라피, 졸리니?”

“우웅, 니에. 졸료”

갑자기 고개가 꾸벅 숙여지더니 그대로 미카엘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반쯤 잠이 들었다. 매우 평온해 보인 표정의 라피를 볼 때 꽃덤불이 움직이더니 까만 동물이 튀어나왔다.

냐오옹.

까만 고양이의 등장에 미카엘라는 순간 긴장했다. 실베스터 왕국의 미신에 까만 고양이는 불길하다고 했다. 그렇기에 라피를 꼭 끌어안으며 고양이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저리 가, 네가 여긴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우웅, 씨엘? 후아아암! 일루 와.”

잠결에 라피가 말하자 고양이가 걸어와 곁에 앉더니 비비적댔다. 그 모습을 본 미카엘라는 그때야 숨박꼭질을 하고 있다는 씨엘이 친구가 아니라 고양이임을 알 수 있었다.

라피의 반려 고양이를 차마 미신 때문에 치울 수 없었다.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미카엘라는 제게 붙어 오는 라피를 다독이며 안아 올렸다.

“왕자비 마마, 아이를 그리 안아 올리면 무리가 갑니다. 제가 대신 안겠습니다.”

“아니네, 내가 그래도 기사인데 임신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이 조그만 아이 하나를 안지 못하겠는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이들이 라피를 안은 채 선 미카엘라를 보고는 우르르 몰려들었다. 스카일라 경이 손을 내밀었지만, 미카엘라는 라피를 그에게 주지 않았다.

“스카일라 경은 세라피나 판테르 경을 아나?”

“네, 왜 모르겠습니까. 전설이 되신 분이…… 어, 아아…….”

미카엘라의 물음에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스카일라는 그때야 세라피나를 떠올리며 라피를 봤다. 단순히 판테르 공작가의 영애로만 여겼는데 이제 보니 이제는 볼 수 없는 세라피나의 딸임을 깨달은 것이다.

“존경하는 분의 귀한 아이일세, 그러니 앞으로 얼굴을 외워 실수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네.”

“네,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내리는 미카엘라의 명령에 스카일라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클레어, 나 이 아이를 안고 가고 싶어. 안으니까 너무 따뜻해. 기분이 좋아.”

“하오나…….”

“괜찮아. 앞으로도 라피를 만나고 싶은데 만나 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라피를 안은 미카엘라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보니 라피에게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바마마께 부탁해 볼래. 라피를 잠시라도 만날 시간을 줄 수 있느냐고.”

오랜만에 보는 미카일라의 미소에 클레어는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을 지나쳐 라피를 안고 가니 아이를 호위하기 위해 온 이들도 조용히 뒤따랐다. 

“이곳이 라피의 거처로구나. 사비나 공주님이 세심하게 신경 쓰셨네.”

“네, 미래의 시고모님이시라고…… 짝사랑하는 분과 이어 주신 분이라고 하시면서 얼마나 기쁘게 준비하셨는지 모르옵니다.”

“사비나 공주님은 좋으시겠군. 나도 이런 고모님이 계시면 정말 좋을 텐데.”

이 궁의 담당자인 카밀라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궁이었다. 한데 라피가 둥지를 틀자마자 바로 귀한 분들의 발길이 닿자 신기하기만 했다.

라피를 방에 조심히 눕힌 미카엘라는 한참을 보며 태교를 하다가 돌아갔다.

* * *

“후아아암!”

늦게 잠이 든 탓에 그만큼 늦게 깨어난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분명 정원이었는데 어느새 방으로 옮겨진 듯 따뜻한 이불 속에 몸이 폭 묻혀 있었다.

“미까 언니가 데려왓나보네. 후아아암.”

연거푸 하품을 한 나는 찔끔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쓱 훔친 후 침대를 짚었다.

바스락-

뭔가 이질적인 소리에 고개를 숙여 봤다. 조그만 쪽지를 펼친 나는 씩 웃었다.

「우리 내일도 그 시간에 만날 수 있을까? 미카 씀-」 

에프터 신청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 이노므 인끼는 어쩔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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