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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79)화 (79/164)

79화. 

커다란 소파에 몸을 폭 묻은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품으로 뭔가가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후아아암, 씨엘?”

까만 털을 가진 고양이가 내 살갗에 제 몸을 비비적대며 노란 눈동자로 나를 봤다. 

냐옹.

씨엘은 처음 와 본 곳이라면 탐험하러 다니곤 했다. 그렇기에 돌아볼 구역이 넓으면 상당히 늦게 내 곁으로 왔다. 오늘도 그럴 것으로 여겼다. 왕궁이 좀 넓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직 다 못 도라다녓찌?”

뀨잉.

씨엘을 품은 채 잠시 졸던 나는 몸을 바로 하고 일어났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몸이 나태해질 것 같았다. 비록 낮잠 시간이 지났다고 하나 그걸 꼭 시간 맞춰 자야 할 필요는 없었다. 

“씨엘, 우리 나갈래?”

뀨우.

계속 안에만 있기 답답했다. 그렇기에 나가지 말라는 에이든의 충고를 무시하고, 어느 정도 무게를 덜어낸 가방을 멘 후 씨엘과 함께 문을 열었다. 낑낑대며 밀자 가까스로 문이 열렸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신지요? 말씀만 하시면 당장 대령하겠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옆에 대기 중인 시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바, 바깟 공기가 피료해여. 요기 넘 답답페.”

“아! 산책하시겠어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녀. 갠차나여. 구럼 나중에 봐여.”

방긋 웃으며 시녀의 호의를 거절하고 나왔다. 하지만 내 뒤엔 그 시녀를 제외한 이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이곳에 올 때 다른 사람을 데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뜻이 뭔지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열댓 명쯤 되는 기사와 시녀, 시종들이 내 뒤를 따라오는데 이건 뭐, 조선시대 왕도 아니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자신들의 사명을 위해 두 눈을 부릅뜬 채 따라오는데 내 등짝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쫄랑쫄랑 몇 걸음 걷던 나는 우뚝 서서 뒤돌아봤다.

“나눈 혼자 사색하는 거 조아해여. 울 지베서도 이러케까진 안 햇써여.”

내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건 제니뿐이었다. 간혹 지나가는 벤스나 그 외 몇몇 아빠 보좌관들을 보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나마도 가끔 제니에게 볼일 보라고 한 후 혼자 정원으로 가서 마법 실습을 하곤 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많은 이의 사람이 따라붙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다.

“저흰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판테르 양께서는…….”

“구롬 여기 위험해여?”

“그건 아닙니다.”

“구지 이러케까지 마니 잇쓸 피료 업써여. 눈에 띠짜나여.”

내 말에 뒤따르던 이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내 시야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여기저기에 몸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을 테지만 그것까진 막지 않았다.

“씨엘, 가자!”

냐옹.

이 건물로 들어오기 전에 사비나가 알려 준 방향으로 발을 꺾었다. 물론 내가 제대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씨엘이 내 다리에 제 앞발을 얹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쪽이 아니었나 보다.

씨엘도 이곳이 처음일 건데 녀석은 내 앞에 서더니 당당하게 발을 옮겼다. 씨엘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늦가을임에도 마법으로 꽃이 피도록 유지된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공작저와는 다른 식생의 꽃도 존재했다. 아무래도 기후나 환경이 다르니 피는 꽃도 다르리라.

“히야, 꼬치야. 꼿! 이뿌다.”

정원에 들어선 나는 두다다닥- 달리며 내 집인 양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 * *

방 안 곳곳의 화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상당히 값비싸 보이는 꽃망울을 본 여인은 부른 배를 쓰다듬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비 마마, 왕자님께서 오셨는데…….”

“다음에 뵙자고 하렴.”

“하오나 왕자비 마마. 벌써 한 달째 만남을 거부하고 계시옵니다. 한 번쯤은 왕자님을 뵙는 게…….”

“클레어, 부탁할게.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힘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은 목소리에 클레어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왕자비 미카엘라 실베스터의 말을 부군인 라파엘에게 송구스러운 목소리로 전했다.

“후우, 그렇군. 알겠네.”

한 달째 부인이자 왕자비를 만나지 못한 라파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그대로 나갔다. 아마도 이제 미카엘라가 부르기 전까진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라파엘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클레어는 곧장 미카엘라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카엘라의 유모이자 시녀로서 따라온 클레어는 제 젖을 먹여 키운 존재의 우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임산부 중에 몇몇은 앞날을 걱정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걱정에 우울증을 앓곤 했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미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기를 낳기만 해도 키워 줄 사람이 줄을 섰다.

한데 뭐가 문제인지 미카엘라는 서서히 달수가 차오를수록 말수가 줄어들다가 이젠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친정 가족이 와도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극도의 우울감으로 인해 미카엘라의 한숨은 진해졌다. 하루에 한 번 들르는 왕궁의는 그녀의 한숨에 전염되기라도 한 듯 방을 나올 때마다 눈이 퀭했다.

“왕자비 마마께서 식사를 제대로 못하셔서 문제입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 극도로 불안해하시고…….”

“대체 왜 저러실까요.”

“저도 그걸 알고 싶습니다. 몸이 아프면 어떻게든 낫게 해 드리겠는데, 마음이 아픈 분이라 약도 함부로 쓸 수 없어 난감합니다.”

클레어만큼이나 왕궁의도 애가 타들어 갔다. 혹여나 왕자비의 상태가 나빠지면 온전히 제 잘못이 되기에 왕궁의는 급히 국왕과 왕자에게 왕자비의 상태를 고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왕자비 마마…… 아니 미카엘라 님, 대체 뭐가 문제인지요. 말씀만 해 주세요.”

지켜보다 못해 클레어가 미카엘라 곁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손을 쓸어 만지며 물었다. 예전이라면 절대 무릎 꿇지 말라고 일으켜 줬을 텐데 지금의 미카엘라의 눈동자는 건조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만나기도 싫어. 먹기도 싫고.”

“그러니까 왜요?”

윽박지르면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참다 못한 클레어가 물었다. 이렇게 모든 이를 물리고 만남을 가지려 들지 않다가 왕자에게 밉보여서 쫓겨나면 어쩌나 싶었다.

“몰라, 나도 모르겠어. 내 마음이 왜 이리 우울하고, 앞날은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어.”

건조한 푸른 눈동자에 이내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유도 모른 채 미카엘라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울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걸 곁에서 지켜본 클레어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라파엘이나 다른 이들이 미카엘라에게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며 사이좋게 지냈는데, 이젠 왕족 모두에게 등을 돌려 버렸다.

“아, 미카엘라 님! 공주님의 약혼 예정자인 에이든 티그리스 님께서 오셨다고 해요.”

언제나 답답한 왕궁에서 같은 주제의 이야기만 듣거나 봐야 하는 미카엘라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티그리스? 사반나 제국의 티그리스 공작가를 말하는 거야?”

“네, 두 분이 연애 중이라는데, 그 사이를 어떤 꼬마가 이어 줬다고 하더군요.”

“꼬마?”

“네, 듣기로는 에이든 티그리스 님의 고모님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 귀족의 가계도도 전부 외우지 못했는데 타국의 귀족의 가계도를 알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카엘라는 모든 게 귀찮다는 듯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야기만 듣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숨만 내쉬는 미카엘라를 보다 못한 클레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설 수 있으시다면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귀찮아.”

“귀찮아도 좀 움직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배 속 아기님을 위해서라도요.”

클레어의 말에 그때야 부른 배를 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태동이 느껴져 자다가도 깰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은 매우 얌전했다. 어미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고 조용히 있는 것인가.

“그래, 알겠어.”

미카엘라가 몸을 일으키자 클레어가 그녀를 부축했다. 동그랗게 부푼 배를 받친 미카엘라는 한 달 만에 방에서 나왔다.

“바람이 좀 쌀쌀한 편입니다. 이걸 걸치시지요.”

급히 다가온 시녀가 클레어에게 도톰한 망토를 건넸다. 망토를 받은 클레어는 곧장 미카엘라를 감쌌다.

“정원으로 모실까요?”

“어디를 가든 똑같겠지.”

천천히 걸음을 옮긴 미카엘라의 곁으로 다수의 사람이 따랐다. 실베스터 왕국의 왕손을 품은 미카엘라를 집중적으로 보호했다.

“따라오지 말게나.”

“하오나…….”

“후우, 따라오지 말라고 했네. 왕궁이 위험하기라도 한 건가? 그게 아니면 잠시 혼자 있고 싶네.”

방문자를 안 만난다고 해도 혼자 방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항상 클레어가 곁에서 살뜰하게 보살폈기에 이곳에서만큼은 혼자 있고 싶었다.

“그렇다면 멀리서 따라가겠습니다.”

“…….”

걱정 가득한 클레어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미카엘라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왕궁에서 유일하게 마법을 사용해서 한겨울에도 싱싱한 꽃을 볼 수 있는 정원으로 들어섰다.

넓은 정원을 거닐며 구역별로 달리 심은 꽃을 구경하며 배를 문질렀다. 여전히 아기는 매우 조용했다.

아직 이름조차 지어 주지 못한 아기를 품은 배를 감싼 채 느긋하게 걷던 미카엘라는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꺄하하하하.”

가까이에서 들리는 아이 웃음에 미카엘라의 발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왕궁 정원이라 연회나 파티가 없는 날엔 귀족가의 핏줄이어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얼른 이곳에서 나가라고 한마디 해 줘야 하나, 상당히 귀찮아진 미카엘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음? 이쪽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미카엘라의 눈동자에 뭔가가 박혀 들었다. 꽃 덤불에 엉덩이가 씰룩씰룩 움직였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귀엽다고 생각한 미카엘라는 기척을 지운 채 조심히 다가갔다.

“여기에서 뭐 하니?”

“끄아앙!”

미카엘라의 물음에 아이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많이 놀랐니? 미안해서 어쩌지.”

꽃 덤불 속에서 몸을 버둥거리며 빠져나온 모습에 미카엘라의 입술이 살며시 곡선을 그렸다.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꽃잎을 잔뜩 묻힌 아이는 곧장 미카엘라를 보더니 배꼽 위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안냐세여. 첨 바여. 라삐라고 해여.”

“라피?”

“네, 라삐에여. 네짤이구여.”

자신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제 소개를 하는 아이가 너무나 귀여워 보였다. 네 살이라 그런지 아직도 혀 짧은 소리를 하는 게 어울려 보였다.

“라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흔한 이름은 아니었다. 한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군데 이뿐 언냐눈 이름이 머에요?”

“나보고 지금 예쁜 언니라고 했니?”

“니에, 이뿐 언냐, 징짜 이뿌다.”

라피의 뜬금없는 말에 미카엘라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초롱초롱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본 미카엘라는 급히 웃음을 멈추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흠, 내 이름은 미카엘라란다.”

“미까!”

“그거 설마 내 애칭이니?”

단 한 번도 애칭으로 불려 본 적 없는 미카엘라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저 살랑살랑 바람을 닮은 미소를 짓는 라피의 미소에 전염이라도 된 듯 옅은 웃음을 지었다.

“한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니?”

“우움, 씨엘이랑 숨바꼭찔해여.”

“숨바꼭질?”

“니에, 군데 씨엘이 안 보여여.”

“저런, 친구가 어디로 가 버렸나 보구나. 그럼 언니가 술래해 줄까?”

왜 자신이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미카엘라는 저도 모르게 같이 놀아 주겠노라고 말했다.

“조아여. 눈 감구 십까지 세 주세여.”

라피의 주문대로 열까지 센 미카엘라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 숨었니?”

“니에, 다 숨엇써여.”

“풉!”

어린아이답게 곧장 대답한 탓에 미카엘라는 라피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꽃 덤불에 얼굴만 숨긴 채 엉덩이를 내민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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