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이건 훈민정음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세종대왕이 이곳으로 환생하거나 빙의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대한민국 사람 중 누군가가 이 세계로 넘어와서 고대어랍시고 한글을 가르쳐 준 것인가.
잠시 훈민정음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주변이 조용하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통신구 안쪽에 있는 국왕과 이쪽 사람들이 나를 뚫어지게 보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송해여. 어룬들 이야기 하눈데 껴드러서…… 라삐는 넘 피곰해소 이만.”
이럴 땐 도망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얼른 할아버지의 다리 위에서 바동바동대며 내려왔다. 그러곤 한쪽에 서 있는 오빠에게 달려갔다.
“오빠, 라삐 피곰해. 가치 자자.”
“그, 그럴까? 오빠랑 같이 가서 얼른 자자.”
아직 자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간택당한 오빠는 얼른 나를 안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라피, 오늘은 오빠랑 꼬까 잠옷 입고 같이 자자꾸나.”
쉼 없이 워프 게이트를 이용한 오빠의 안색은 매우 평온했다. 처음엔 마법 멀미에 치를 떨었지만 이젠 내성이 생긴 듯 오빠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빠, 멀미 안 해?”
“응, 매주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더니 이젠 마법 멀미 안 해. 이게 다 우리 호박떡 덕분이지.”
요즘 엘렌이 자꾸만 동생 보여 달라고 말해서 떼어놓고 오는 게 곤혹스럽다고 말한 오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나도 방긋 웃었다. 방으로 들어온 오빠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라피, 만세!”
“만쉐에!”
손을 위로 올리자 오빠는 내 옷을 순식간에 벗겨냈다. 그 모습을 오빠 뒤에서 잠옷을 들고 대기 중인 시녀들이 소리 없는 탄성을 지었다.
주말마다 와서 나와 잔 내공이 쌓인 오빠는 잠옷까지 쉽게 갈아입혔다. 노란 병아리가 수놓인 잠옷을 보고 히죽 웃은 나는 마침 안으로 들어온 씨엘을 안았다.
“라피, 이리 와. 얼른 같이 자자.”
아빠와는 달리 오빠는 씨엘과 같이 자는 것에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 대신 한 침대에서 자되 절대 곁에서 자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오빠랑 같이 잘 땐 씨엘은 내 발밑에서 식빵을 구웠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오빠가 내 이마에 입 맞췄다. 굿나잇 키스를 받은 나는 이 따스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오빠를 꼭 잡은 채 깊이 잠들었다.
* * *
라피가 사라지자 그때야 정신을 차린 실베스터 국왕은 저를 보는 무수한 학자의 시선에 영문을 모를 표정을 지었다.
[방금 어린아이가 한 말이…….]
[저희가 해석한 게 맞다면 나랏말이 차이나와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고대의 차이나 제국과 이곳의 문자가 서로 다르지만, 처음엔 그곳의 문자를 빌려 썼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한데 이번에 발굴한 책은 그들에게 세기의 발견이었지만 제대로 읽지 못해 해석이 불가능했다.
고대어도 시간이 흘러 변하듯 지금의 그들이 아는 문자도 보였지만, 낯선 문자가 존재했다.
그런데 조그만 아이가 매우 여유로운 표정으로 읽으니 다들 놀라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학자들의 해석을 들은 실베스터 국왕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 티그리스 공작을 보며 물었다.
[방금 그 여자아이는 누구입니까.]
“사비나 공주님이라면 잘 알고 있을 듯하군요.”
광대뼈가 승천할 것 같은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실베스터 국왕은 즉시 사비나를 호출했다. 티그리스 공작저에 가고 싶었으나 제 오라비가 금족령을 내려 가지 못해 잔뜩 화가 난 사비나였다.
[왜 부르셨습니…… 아, 티그리스 공작님, 에이든 님 안녕하세요.]
심통 난 표정을 짓던 사비나는 티그리스 공작과 에이든의 모습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제 딸의 표정 변화를 본 실베스터 국왕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사비나.”
[아니, 저놈이 감히 우리 공주의 이름을 함부로…….]
[에이든 님과 고모님을 뵙고 싶어서 잘 지내지 못했답니다.]
사비나를 이름으로 부르는 에이든을 보고 실베스터 국왕이 불호령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제 딸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한데 고모님은 대체 누굴 말하는 것이더냐. 티그리스 공자에게 고모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티그리스 가문의 먼 방계라면 고모뻘 항렬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비나가 그런 혈족에게 고모님이라고 깍듯이 부를 리가 없었다.
[아바마마, 당연히 우리 에이든 님의 고모님이시죠. 얼마나 귀여운데요. 콩가루 묻은 말랑 콩떡 같아서 볼에 대고 비비면 쫀득하게 달라붙는답니다.]
사비나의 말에 실베스터 국왕은 좀 전에 본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혹시 은발에 금안을 한 구운 치즈떡 같은 아이를 말하는 것이더냐.]
[맞아요! 한데 고모님은 어디 계시죠? 보고 싶은데. 그동안 오라버니 때문에 못 봤단 말이에요.]
두 눈을 크게 뜨고 통신구를 바라보는 사비나를 본 실베스터 국왕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면서 갔다. 한데 그 아이가 이번에 발굴한 고대어를 읽더구나.]
[우리 고모님이 정말 똑똑하세요. 그래서 에이든 님의 동생인 제이든 님에게 고대어도 가르쳐 주신답니다. 이제 막 네 살이 되었는데 말이죠.]
처음엔 아이가 읽은 것이 긴가민가했다. 새로 발굴한 고대어를 읽을 줄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서 아이가 임기응변으로 지어낸 말을 학자들이 해석한 것을 듣고 그럴싸하게 들렸다. 한데 사비나가 말한 것을 들어 보니 아이가 진짜 고대어를 읽을 줄 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비나가 아이를 찬양하자 실베스터 국왕은 즉시 티그리스 공작에게 말했다.
[그 아이를 잠시 빌려주실 순 없겠습니까.]
“아이가 물건도 아니고 빌리다니요. 일국의 군왕으로서 단어 선택을 잘못하신 것 같군요.”
이번엔 티그리스 공작이 아니라 다른 남자가 끼어들었다. 청안에 흑발을 지닌 다부진 체형의 미남자는 실베스터 국왕을 보고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는 누구기에 티그리스 공작과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이요.]
“방금 고대어를 읽은 아이가 내 딸 세라피나 판테르입니다만.”
소문으로만 들은 판테르 공작의 등장에 실베스터 왕은 탄성을 질렀다. 자신의 아내를 함정을 파서 죽인 왕국을 단숨에 멸망시킨 남자는 기사와 로맨티스트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판테르 공작님의 딸이었군요. 판테르 공작가는 기사 계열이라 고대어나 마법 쪽으로는 문외한일 텐데.]
“우리 라피의 외가가 티그리스 공작가이니 그런 것은 배 속에서부터 아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맞지! 누가 사위 아니랄까 봐 맞는 말만 하는군.”
판테르 공작의 말에 뒤에서 티그리스 공작이 흥겨운 추임새를 넣었다.
“외모만 봐도 티그리스 공작가의 피를 좀 더 타고난 걸 모를 수는 없을 겁니다.”
“옳커니, 그렇지. 라피는 우릴 닮았지. 어쩜 제 어미를 쏙 빼닮아서 그리도 예쁘고 귀여운지 원.”
판테르 공작이 한마디 할 때마다 티그리스 공작의 추임새는 길어졌다. 심지어는 판테르 공작의 대답보다 더 길게 말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처제를 데리고 가고 싶다, 이 말입니까?”
이번엔 판테르 공작에 비하면 왜소하지만 다른 이에 비하면 체격이 큰 이가 등장했다. 가슴에 독수리 문장을 본 실베스터 국왕은 그가 아퀼라 공작임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판테르 양의 형부가 아퀼라 공작님이었나 보군요.]
“네, 맞습니다. 제가 우리 말랑말랑 인절미 처제의 하나뿐인 형부입니다. 그러니 처제를 원하시면 저희에게 전부 허락을 받으시면 됩니다. 확률이 낮겠지만.”
아빠는 동부의 판테르 공작, 외할아버지는 북부의 티그리스 공작, 형부는 남부의 아퀼라 공작-
라피의 친인척 관계를 머릿속으로 떠올린 실베스터 국왕은 혀를 내둘렀다. 조그만 아이의 손짓 하나에 사람 목숨쯤은 간단히 쳐낼 것만 같았다. 태어나자마자 엄청난 인맥과 권력을 가진 아이를 떠올린 실베스터 국왕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고대어 발견과 해석은 우리나라에 한 획을 그을 큰일입니다. 해서 말인데 정식으로 판테르 양을 초빙하고 싶습니다.]
평소 실베스터 국왕의 성격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엔 나서지 않고서는 못 배겼다. 그도 그럴 것이 실베스터 왕국에서 쓰던 고대어는 고대 차이나 제국에서 파생되었다는 말이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라피가 읽은 첫 줄의 뜻을 알자마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데려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 네 살인 아이를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타국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판테르 공작이 먼저 거절 의사를 보냈다. 어린아이를 집 밖으로 보내는 것도 무서운데 자국도 아닌 타국으로 보낼 리가 없었다.
[판테르 공작님, 티그리스 공작님 그리고 아퀼라 공작님! 고모님이 여기 오시면 제가 편히 모실 수 있는데 보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이든 님, 제발…….]
라피 금단 증상을 겪는 듯한 사비나의 간절한 음성에 에이든은 지금이라도 라피를 안고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세 공작의 눈빛에 먼저 타 죽을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사비나, 제 마음으로는 고모랑 같이 가고 싶습니다. 한데 워프 게이트마저 막혔는데 어찌 가겠습니까.”
[아…….]
사비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제 오라비가 바로 그 워프 게이트를 끊어 버린 장본인이었다.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오라버니라니깐.]
살짝 고개 숙여 혼잣말을 한 사비나는 얼른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본 실베스터 국왕은 제 딸이지만 오늘 처음 보는 모습에 고개를 흔들었다.
[크흠, 그건 염려하지 마시오. 판테르 양이 초빙에 응해 주기만 한다면 바로 연결해 드리오리다. 지금 당장이라도.]
매우 단호한 실베스터 국왕의 말에 에이든의 마음은 이미 사비나의 곁에 가 버렸다.
“에이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더냐. 우린 아직 결정도 안 내렸는데 마치 지금이라도 워프 게이트가 연결되면 라피를 데리고 갈 것처럼 말하다니.”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에이든은 얼른 뒤돌아서서 통신구에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저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대로라면 프러포즈만 하고 결혼은 꿈도 못 꿀 것 같아요. 사비나같은 손자며느리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비나와 같은 성품의 공주님이라면 다다음대의 티그리스 공작부인이 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기에 에이든의 간절한 시선에 티그리스 공작의 시선이 판테르 공작에게 향했다.
“어떻게 안 되겠는가.”
“어떻게 안 되겠습니다. 저번엔 공중에서 던지더니 이젠 우리 라피를 타국으로 냅다 던지려 하십니까.”
강경한 판테르 공작의 목소리에 통신구 속 사비나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이대로 겨우 사랑을 확인한 연인과 사랑스러운 말랑 콩떡을 눈앞에 두고 만나지 못하나 싶어 실망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기운을 차린 듯 말했다.
[모든 것은 고모님이 결정하실 문제가 아닐까요. 비록 고모님이 어리시지만, 고대어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분이니까요.]
사비나의 말에 라피에게 결정권이 생겼다. 그렇기에 통신은 다음 날로 미뤄졌다.
일찍 잠에서 깬 라피는 마법 연습을 한 후에 쫄랑쫄랑 걸어 판테르 공작의 품에 폭 안겼다. 그러곤 티그리스 공작 내외와 언니 부부의 볼에 자연스럽게 입맞춤을 했다.
“라피, 실베스터 국왕이 정식으로 초빙하고 싶다고 하는데 거절하고 싶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해도 된단다.”
실베스터 왕국의 통신이 시작되자마자 사비나를 보고 라피의 입술이 서서히 곡선을 그렸다.
[고모님, 이것 보세요. 이게 뭐냐면, 실베스터 왕국의 특산물인 스노우 젬이랍니다. 알록달록한 젤리 같은 돌멩이보다 훠어어얼씨이인 비싸요.]
물욕이 있는 아이 맞춤 유혹에 라피가 책상을 탁- 치더니 판테르 공작의 무릎 위에서 발딱 일어나서 외쳤다.
“라삐, 갈랭! 에이, 머하니, 빤리 짐 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