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생일 선물을 받은 할아버지는 매우 좋아하셨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선물인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 라피는 마법 성취력이 빠르군요. 일전에 하늘에서 떨어뜨렸을 땐 조금도 날지 못했는데.”
“우리 티그리스 공작가의 피를 진하게 타고 난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한들 또 예고 없이 라피를 냅다 던지면 그땐 여보가 제 손에 죽는 날이랍니다.”
할머니가 내 볼을 콕콕 누르며 하는 말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나보다 뒤늦게 온 가족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올해는 가족이 많이 늘어서 너무 좋군.”
“선물을 몇 배나 받을 수 있어 좋으신 겁니까?”
“자네는 가끔 꼬아서 말하는 게 흠이지만, 이런 말랑 콩떡이를 낳아 줬으니 오늘은 참겠네. 하하하.”
아빠가 무슨 말을 하든, 오늘은 뭐든 용서해 줄 정도로 할아버지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가족들의 축하 인사를 들은 후에야 북부 귀족들이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갖다 바쳤다.
“부인께서 건강을 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허허, 이 모든 게 우리 라피 덕분이지. 우리 라피가 오지 않았으면 아직도 몸져누워 있었을걸세. 안 그렇습니까. 부인?”
“당연하지요. 우리 라피가 커 가는 모습을 봐야 하는데 계속 누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서로 보는 시선이 달게 느껴졌다.
“처제, 티그리스 공작님께서 힘드실 테니 이제 이리 와. 내가 우리 처제 품으려고 요즘 가슴 운동을 많이 하는 중이야.”
제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며 부풀리듯 말하는 형부를 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밧짜 아빠 가슴이 더 빵빵해여. 혐부 가슴은 절뵥!”
“으윽, 너무해. 그래도 노력하는 중인데.”
이 세상에서 아빠 가슴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을 말해 주자 형부는 이내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픽 웃으며 할아버지 품으로 파고들었다.
“허허, 내 생애 오늘같이 기쁜 생일은 처음이로세. 정말 기분 좋아.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군.”
“하부지, 때끼! 구론 말 하눈고 아니에여! 말이 씨 대요.”
할아버지의 가슴을 팡팡 치며 말이 씨가 된다고 말했다. 이 가족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또 시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이런 따뜻한 가족을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의 가족을 빨리 놓치고 싶지 않은 난 눈물을 슬쩍 내비치면서 훌쩍거렸다.
“아, 아니다. 라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 오, 우리 새끼, 할아버지가 진짜 죽을까 봐 걱정을 한 것이더냐.”
“라피, 할아버지가 한 말은 그 정도로 기분이 너무 좋다는 말이었단다. 그러니까 울지 말렴. 콩가루가 다 젖을라.”
할머니가 얼른 나를 빼앗아 안으며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여보는 주책이세요. 우리 라피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아이가 아직도 많이 아프고 슬플 건데.”
“미안, 할아버지가 미안하구나.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구나.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내 손자들은 아무 반응도 안 하는데 말이다.”
내게 사과하면서 할아버지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손자들을 봤다. 다들 어깨를 으쓱이면서 픽, 웃는 모습에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우리 손녀가 최고야. 암! 이 할아비를 위해 눈물까지 흘려 주다니,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것이더냐. 좀만 더 일찍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은근슬쩍 할머니 품에서 나를 다시 빼앗아 안은 할아버지가 두 볼에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입 맞췄다.
“하부지, 다시눈 구론 말하지 마세여. 알앗쪄?”
“오냐, 다시는 안 하마.”
“약소케져여.”
“약속? 그래. 약속하마. 다시는 우리 말랑 콩떡이 두고 먼저 죽는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내가 내민 새끼손가락을 본 할아버지도 손가락을 내밀어 조심히 엮었다.
“우리 새끼, 고대어도 알더니 고대에 한 약속도 아나 보구나. 하하하. 내가 이런 녀석을 두고 어찌 일찍 눈을 감을꼬, 우리 새끼 쑥쑥 커서 결혼…… 크흠, 그건 더 나중에 하자꾸나.”
“그건 할아버지 말씀이 맞단다. 우리 라피는 결혼은 최대한 늦게…… 아니 안 해도 좋을 것 같구나. 결혼 빨리해서 좋은 건 없…… 이크!”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한 다니엘은 헬레나가 웃으며 옆구리를 꼬집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여, 여보……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우리 라피가 결혼하는 거 보고 돌아가시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내 맘 알지요?”
“흥, 세라피나 고모님 아니었으면 여보랑 결혼 안 했답니다. 어렸을 때부터 본 귀여운 고모님한테 한눈에 반해 가족이 되고 싶은 마음에 결혼했다고요.”
얼떨결에 둘의 러브 스토리를 살짝 듣게 된 나는 할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하부지, 엄마눈 쫌만 늦게 만나여. 알겟쪄?”
“오냐, 당연하지 않느냐. 우리 새끼 두고 내가 어딜 가겠다고…… 내 새끼, 어쩜 이리도 예쁘더냐. 역시 손녀가 최고야. 암! 그렇고말고!”
할아버지의 옷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게 더 좋은지 할아버지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얌전하게 할아버지의 다리 위에 앉아 북부 귀족들이 서로 인사하려고 줄 서는 것을 봤다.
“티그리스 공작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티그리스 공작가를 오래오래 이끌어 주십시오.”
“니에, 감쟈함다.”
“풉! 아,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 너무 귀여우셔서…… 어쩜 이리고 귀여우시답니까.”
할아버지 대신 앉아서 감사의 인사를 표하자 앞에 있는 귀족의 입술 사이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칭찬에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커험험, 우리 집안 핏줄을 진하게 타고나서 그런 것이지 않겠는가. 자! 이 모습을 보게나. 은발에 금안을 말일세.”
“맞습니다. 아가씨께서 티그리스 공작가의 핏줄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하하, 한데 저는 왜 딸이 안 생길까요.”
“딸 낳는 것도 다 능력일세. 정 배우고 싶으면 우리 사위한테 물어보게나.”
딸이 둘인 아빠는 갑자기 본인 쪽으로 쏠리는 시선에 팔짱을 낀 채 느른한 시선으로 봤다. 어깨에 뽕이 몇 개 들었는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올라갔다.
귀족들의 축하 인사와 선물을 받은 후에야 다들 연회를 즐겼다. 몇몇 이들은 앞으로 나와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아당겨 할아버지의 손을 잡을 수 있게 했다.
“음, 왜 그러니?”
“하부지, 하무니랑 춤 쳐요.”
“춤? 안 춰 본 지 오래라서…….”
오랫동안 앓아누웠던 할머니는 춤에 자신이 없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부니 춤 추묜 라삐는 조을거 가튼데.”
내 말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할머니의 손등에 살며시 입맞춤했다.
“소피아, 우리 라피가 원하는 거 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리드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니 아무도 춤 신청을 해 주지 않아서 몇 년간 저도 춤을 춰 보지 못했답니다. 소피아, 부디 제 청을, 그리고 라피의 청을 거절하지 마세요.”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승낙이 떨어지자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덕분에 혼자 할아버지의 의자에 앉은 채 노년의 부부가 추는 춤을 감상할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씨엘, 춤 추고 시퍼? 군데 어쩌지. 씨엘이랑 춤 못 쳐.”
도톰한 분홍 젤리 발바닥을 내 손 위에 올린 씨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씨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정작 잡힌 건 굳은살이 박인 아빠의 손이었다.
“라피, 우리도 춤추자꾸나.”
“니에? 하지만 나눈…….”
이 세계에서 춤을 춰 본 적이 없었다. 배운 적도 없고 말이다. 어느 누가 서너 살짜리 아이한테 춤을 가르치겠는가.
“괜찮아. 아빠가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된단다.”
내 손등에 살며시 입맞춤한 아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홀려 나도 모르게 아빠 손을 잡고 일어나 앞으로 나왔다.
“그럼 레이디 라피, 잘 부탁드립니다.”
“니에, 판떼르 경!”
원피스 자락을 잡고 양옆으로 벌려 인사하자 아빠는 쿡쿡- 웃으며 나를 살짝 들어 올렸다. 본인의 발등에 내 발을 살포시 올린 아빠는 몸을 잔뜩 숙여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아빠의 움직임에 나도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헙! 나, 나도 딸이랑 춤추고 싶은데…….”
나와 아빠의 모습을 본 형부가 슬쩍 언니를 보고 말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한 곡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내 앞에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졌다.
“라피, 할아버지랑도 춤춰야지.”
“처제, 나도 있어!”
“오빠랑도 춤추자. 응?”
줄줄이 줄을 선 가족을 본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랑도 춤췄는데 못하겠다고 하면 삐칠 것 같아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느라 잔뜩 피곤해졌다.
축 늘어져 있을 때 에이든이 옆으로 뽀짝뽀짝 다가왔다.
“나눈 이제 춤 앙대.”
“그냥…… 오늘은 사비나가 올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실베스터 왕국과 티그리스 가문은 사이가 좋았다. 그렇기에 사비나나 하다 못해 실베스터 왕국에서 손님을 보낼 줄 알았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후움, 구곤 나중에 생각하자.”
피곤할 때 머리 굴려 봤자 잘될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한껏 시무룩한 에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금 달래 주다가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티그리스 공작저에 준비된 내 방이었다.
“후아아암.”
늘어지게 하품하며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아빠의 가슴에 막혔다.
“잘 잤니? 어젠 갑자기 잠들어서 아빠가 얼마나 놀란 줄 아느냐.”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앞으로 몸이 고꾸라져서 에이든이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나 어쨌다나. 티그리스 공작저의 주치의까지 출동해서야 내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고 다들 안도했다는 말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두 모루게 잠드럿써여.”
“그래, 마법까지 했으니 많이 피곤할 만도 하지. 그러니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거라.”
보통 연회는 3일 정도 여는데 오늘 내가 참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여긴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 방에서 구르면서 먹고 쉰 나는 다음 날 새로 맞춘 옷을 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연회가 끝난 후 가족끼리 차를 마시며 이야기할 때 통신구를 든 이가 쏜살같이 뛰어왔다.
“무슨 일인가.”
“실베스터 왕국 쪽에서 통신이 왔습니다.”
그 말에 화색이 돈 에이든이 총총 뛰어와 나를 품은 할아버지 옆에 찰싹 붙었다. 통신구가 반짝 빛이 나더니 처음 본 얼굴이 모습을 드러났다.
[티그리스 공작님, 직접 가서 생신을 축하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일국의 국왕과 제국 공작의 지위가 엇비슷해서인지 실베스터 국왕은 할아버지에게 존대를 사용했다.
“실베스터 국왕께 일이 많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의례적인 말이 오갔고 본론이 나왔다.
[이번에 고대어로 된 고서를 발굴해서 해석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리고 있습니다. 한데 사비나의 말에 의하면 고대어는 티그리스 공작가가 잘한다고 해서 염치 불고하고, 부탁하려 합니다.]
“호오, 새로운 고대어라니 구미가 당기는군요. 한 번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지의 말에 장갑을 낀 실베스터 국왕이 조심히 오래된 책자를 펼쳐 두 번째 통신구로 각도를 맞춰 보여 줬다.
[이걸 읽으실 수 있으십니까.]
심각한 표정의 실베스터 국왕의 얼굴과 책을 번갈아 본 할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건 저희도 연구를…….”
“후우움, 하부지, 나 일글수 잇써여.”
“음? 그게 무슨…….”
“나랏말싸미 짜이나에 달라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아니할세…….”
세로로 된 글을 읽었을 뿐인데 다들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