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항상 라피는 판테르 공작과 함께 잠을 자곤 했다. 그리고 유진이 오면 자연스레 유진과 한 침대를 사용했다. 하지만 오늘은 판테르 공작이 매우 바쁜 일로 같이 자지 못했다.
혼자 침대에 누운 라피는 역사 수업과 마법 연습으로 인해 쉽게 곯아떨어졌다. 새근새근 잠든 라피를 본 씨엘이 바닥에 놓인 방석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보쌈을 해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든 라피의 얼굴에 제 머리를 대고 비비적댔다.
“우웅, 씨엘 조아.”
자는 중에도 씨엘의 털을 느낀 라피는 방싯방싯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씨엘이 분홍색 젤리 발바닥을 라피의 조그만 손 위에 올렸다.
자연스럽게 손이 오므려진 라피를 보는 씨엘의 몸에 순간 이상한 기운이 서렸다. 조그만 새끼 고양이의 실루엣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남자아이로 변했다.
까만 털이 사라지고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쫑긋 솟은 귀와 엉덩이 사이에 기다란 꼬리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라피…….”
올망졸망한 황금색 눈동자엔 오로지 라피만이 그득했다. 달이 위치를 달리하며 그림자를 만들어냈지만, 씨엘의 눈동자는 라피에게만 향했다.
황금색 벌꿀이 뚝뚝 흘러넘칠 정도로 다정하면서도 끈적한 시선으로 보던 씨엘의 붉은 기가 스민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라피의 통통한 볼에 제 얼굴을 비비적댔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감촉에 귀가 파르르 떨렸다.
“라피, 좋아해…….”
공기에 공명하듯 주변으로 살며시 퍼진 저음은 이내 사라졌다. 대신 인간형으로 변한 씨엘이 라피를 품에 안고 곤히 잠들 뿐이었다.
* * *
우리 씨엘이 달라졌어요.
항상 바깥 외출을 하던 아이가 에드워드와 수업할 때가 되면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책상에 떡하니 앉아서 나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 식빵을 굽는 자세로 말이다.
보통 고양이라면 듣다가 지겨워서 그대로 잠이 들 건데, 씨엘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이 났다.
“자! 오늘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럼 우리 다음에 보도록 하지요.”
“니에니에, 선쌔님.”
에드워드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곧장 짐을 싸들었다. 이젠 마법 공부하러 티그리스 공작저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가방에 아가페의 회심작인 알록달록한 젤리와 사탕을 그득하게 담았다.
“이제 티그리스 공작저에 가는 것이더냐.”
“니에.”
마침 안으로 들어온 아빠는 나직하게 한숨 쉬더니 나를 안아 올렸다.
“난 우리 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시러여. 꼭 하부지가튼 마봅사 댈 꼬에여.”
“엄마랑 아빠 같은 기사가 되는 건 어떠니? 마법사가 되려면 시간이 엄청엄청 오래 걸리는데.”
기사가 되는 것은 아카데미에서 10년만 뒹굴어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법사의 길은 험난해서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내 귓가에 속살댔다.
“시러여. 라삐는 마봅사 댈 꼬에여.”
기사는 꿈도 꿔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체력도 약해 빠졌고 말이다. 그런 내가 기사 수업을 듣고 연무장에서 몸을 굴리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에 비해 일찍이 마법사는 해 봤기에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배우는 수업은 매우 쉬웠다. 이른바 복습 차원이었다. 마나만 펑펑 넘쳐났으면 금방 마법사의 반열에 올랐을 건데.
그게 아니라서 티끌만 한 마나가 아쉬운 실정이었다. 남들은 다른 세계로 똑 떨어지거나 빙의하게 되었을 땐 뭔가 재능이 넘쳐났다. 그게 아니면 미래의 일을 알기에 사업이나 기타 다른 수단으로 이용했다.
나는 처음으로 차근차근 밟고 올라가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겐 그 무엇보다도 힘이 되어 주는 가족이 많다는 것이다.
“라피, 혹여나 마법사 되는 게 힘들다면 언제든지 말하려무나. 아빠는 우리 라피가 힘들어하면서 뭔가를 배우는 건 싫어한단다.”
“니에.”
“그나저나 에드워드의 수업은 어떻더냐.”
“조아여. 재밋써여.”
“안 그래도 에드워드가 항상 우리 라피가 너무 똑똑해서 탈이라고 하더구나. 하하하, 이 기회에 다른 수업도 들어 볼 테냐. 예를 들어 정치, 경제…….”
아깐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더니, 내가 티그리스 공작저에 자주 가는 게 싫은지 아예 공부로 발을 묶어 놓으려는 것 같았다. 아빠의 꼼수를 파악한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정치 쪽으로 발을 디딜 것도 아닌데 후계자 수업에 속하는 공부를 할 리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마법 공부하는 게 제일 편하고 좋았다.
“구론곤 오빠가 배워여. 라삐눈 마봅 곰부해여. 하부지랑 조아해여.”
“우리 라피가 가는데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더냐. 그래도 에리카랑 연락하는 것은 잊지 말거라. 요즘 네가 바쁘다고 에리카가 시무룩한 것 같더구나.”
“언냐는 혐부랑 콜린 잇써여.”
요즘 오전엔 에드워드의 수업, 점심 이후부터는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마법 공부를 했다. 아마 내 이동 거리를 따지면 이 대륙을 몇 수십 번이나 횡단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도 언니랑 연락하는 것은 잊지 말고. 그럼 우리 저녁에 보자꾸나.”
“니에, 아빠 뺘뺘!”
워프 게이트에 도착하자 나는 곧장 아빠에게 잠깐의 작별 입맞춤을 했다. 바동바동 움직여 아빠와 떨어져 워프 게이트 안에 섰다. 그러자 씨엘이 내 품으로 폭 파고들었다. 순간 아빠의 눈동자가 살짝 찌푸려지는 것 같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판테르 공작저를 벗어났다.
“어서 오세요. 우리 아가씨!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오늘은 헬레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이 집안은 식구가 많아서 내가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새언냐, 나 왓쏘여.”
“오구오구,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우리 아가씨가 왜 이리 늦나 싶었답니다.”
미소 가득한 헬레나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을 잡은 나는 뽀짝뽀짝 걸음을 옮겼다. 내 보폭에 맞춰 걸음을 걸은 헬레나의 얼굴엔 미소가 드리워졌다.
“오늘은 마법 공부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참고로 며칠 후면 할아버님의 생신이랍니다.”
“하부지 생신?”
“네, 그래서 말인데 꼬까옷 맞추러 가요. 우리, 호호호! 전 우리 아가씨랑 드레스 맞추고 싶은 게 하나의 소원이랍니다.”
일전에 헬레나의 방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우연히 버킷리스트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안에 딸과 같은 디자인의 커플 드레스를 맞추는 게 적혀 있던 게 떠올랐다.
“조아여. 구롬 곰부 다 하고 바여.”
“네, 우리 아가씨! 좀 이따가 봐요.”
“니에, 하부지! 라삐 왓써여.”
“오! 우리 라피, 오늘은 1분 50초가 늦었구나.”
건물 입구에서 서성이던 할아버지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그런 나를 번쩍 안아 든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할머니에게 데려갔다. 이곳에 온 이상 할머니에게 문안을 드렸다.
“하무니!”
“우리 말랑 콩떡이 왔구나.”
요즘 부쩍 건강해진 할머니는 나를 안더니 볼에 살며시 입맞춤을 했다. 그러고는 연방 예쁘다는 듯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헤, 하무니 조아여.”
“나도 우리 라피가 제일 좋단다.”
간단한 문안 인사가 끝이 나자 나는 다시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채 마법을 공부했다. 평소엔 다니엘이나 에이든이 가르쳐 줬는데 오늘은 할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우리 라피, 마법 공부하는 게 제일 좋지?”
“니에, 마봅 곰부 잼밋써여.”
“그래그래, 이건 우리 딸을 안 닮아서 천만다행이구나. 자! 그럼 본격적으로 공부해 볼까?”
고난도의 마법을 밥 먹듯이 시전하는 할아버지의 위용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베네딕트 제국에서도 할아버지 같은 마법사는 본 적이 없었다.
“우, 우와아아아! 하부지 체고! 멋쪄!”
“그렇지? 할아버지가 최고로 멋지지? 후훗!”
어깨에 뽕이 몇 개나 차오른 할아버지는 이윽고 내게 마법 중급 단계를 알려줬다. 초급이야 벌써 뗐지만, 문제가 있다면 내게 마나가 없어서 시전할 수 없었다.
“우리 라피는 누굴 닮아서 벌써 이 단계까지 왔을꼬.”
“하부지 달마써여.”
“그렇지? 할아버지 닮았지? 이것 보려무나. 눈동자도 머리카락 색도 똑 닮았지 않느냐. 하하하.”
내 궁둥이를 토닥이며 잠시 샛길로 빠진 할아버지는 연방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할아버지의 최측근이자 보좌관인 셀레스 백작의 얼굴에 소리 없이 미소가 드리워졌다.
“라피 아가씨께서는 마나량을 늘리는 데 주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법사란 존재에게 마나량은 절대적이었다. 제아무리 고난도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고 한들 마나가 적으면 한 번 시전하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연스럽게 쌓이길 바랐건만…… 그건 내 욕심이겠지.”
보통 마나는 자연적으로 쌓였다. 매우 극소량씩 말이다. 아마 할아버지의 경지가 되고자 한다면 지금의 할아버지 나이만큼 먹어야 가능했다.
“우리 라피, 마냐량이 늘었으면 좋겠느냐.”
“니에, 얼룬 마봅사 대서 하무니랑 하부지 지쿄주꼬에여.”
“어이쿠, 누구 손녀이기에 이리도 예쁜 말만 골라 하누.”
“헤헤.”
적절한 아부와 눈치는 오늘도 할아버지의 기분을 방방 뛰게 했다. 그 결과 알록달록한 사탕과 젤리가 가득한 가방 안엔 그와 똑같은 색깔의 돌멩이가 그득하게 담겼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는 가방을 품에 안은 채 씨엘을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고 곧바로 다시 마법 공부를 시작했다.
“마법사에겐 특별한 라이벌이란 게 존재한단다.”
“라이벌?”
“그래. 내 라이벌은 그놈이었지. 지금은 죽었지만…… 어쨌든 우리 라피도 라이벌을 만나게 된다면 선의의 경쟁자가 되든지 아니면 피 터지게 싸우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야.”
이 세계에서는 마법사에게 대등한 힘을 지닌 라이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럼 내 라이벌은 누구에여?”
“그건 아마 네가 알 것이다. 라이벌을 만나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이상한 느낌을 받거든.”
할아버지의 두루뭉술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나는 공부 시간이 끝나자마자 헬레나의 손에 이끌려 재단사 앞에 앉혀졌다.
“어머나, 티그리스 부인께서 늦둥이를 보신 건가요? 어쩜 티그리스 공작가 핏줄 아니랄까 봐 부군을 똑 닮으셨어요.”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나를 볼 때마다 죄다 헬레나와 다니엘의 늦둥이로 여겼다.
“크흠, 내 딸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시는 분일세. 우리 사촌 시누이거든.”
“네, 네? 사, 사촌 시누이라면…… 파, 판테르 공작님과 결혼하신 세라피나 님의 따님이신가요?”
“맞네. 우리 고모님의 딸이 맞지. 그러니 얼른 우리 아가씨 치수를 재게나. 디자인은 나와 같은 것으로 할걸세.”
“호호호, 요즘 부모 자식 간에 같은 디자인으로 입는 게 유행이랍니다. 제가 정성껏 만들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어깨에 힘이 팍팍 들어간 재단사의 손에 들린 줄자가 팽팽하게 펼쳐졌다. 잠시 치수를 잰 후 재단사가 가져온 디자인 북을 씨엘과 보다가 헬레나를 봤다.
“새언냐, 하나만 부타케도 대여?”
“어머 그게 뭔가요?”
방긋 웃는 헬레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웃음이 진해진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 * *
몇 주가 지나 할아버지의 생신이 되자 가족이 전부 나섰다. 아빠의 품에 안긴 채 생신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북부 귀족들이 옆으로 물러서며 한마디씩 했다.
“어머, 뭐야. 옷이…….”
“한 가족인 거 너무 대놓고 티 내신 거 아닌가요.”
그랬다. 내 부탁으로 우리 가족 모두 같은 디자인의 제복과 드레스를 입었다. 심지어 씨엘도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혔다. 어디 가서도 한 가족임을 모를 리 없게 말이다.
나와 헬레나의 작품에 다들 놀란 듯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인 나는 바구니를 든 채 심호흡을 하자 아빠가 볼에 입 맞췄다.
“준비는 되었니?”
“니에.”
“그럼 조심히 가자꾸나.”
아빠의 입맞춤에 힘을 얻은 나는 두 손으로 꽃바구니를 든 채 몸에 있는 마나를 쥐어짜며 외쳤다.
“플라이!”
순간 내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비록 정상적인 비행은 하지 못했지만, 비틀비틀하며 간신히 상석에서 나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앞으로 날아갔다.
“오, 우리 라피!”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젖 먹던 기운까지 끌어 올려 말했다.
“하부지, 선물 왓써여. 오느른 라삐가 선물이에여.”
이른바 날로 먹기를 시전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얼굴엔 함박웃음이 그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