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유진의 동생을 본 엘런은 연방 탄성을 질렀다. 닮은 듯, 안 닮은 듯한 남매는 서로를 애틋하게 봤다. 그러더니 라피가 유진의 볼에 뽀뽀했다. 스킨십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뤄지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빠, 조기 잇눈 놈은 오디 사눈 누구기에 오빠랑 싸워? 싸우는 거 나쁘다고 햇눈데.”
“저번에 우리 라피를 강제로 데려가려고 한 드라코 공작님의 아들이랄까. 그러니 저쪽은 걱정하지 마.”
얼른 엘런을 등지고 선 유진은 라피의 볼에 제 볼을 비비적댔다. 쫀득하게 달라붙는 느낌에 미소 지었다.
“크흠흠, 저기 동생이 왔는데 소개를…….”
“라피, 얼른 집에 가자.”
엘런이 기웃기웃하며 소개해 달라는 말을 유진이 중간에 댕강 잘라 먹고 서둘러 움직였다. 본디 이곳에 외부인이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직계 가족에 한해서는 일 년에 한두 번은 방문 가능했다.
“지베서 오빠 기다렷눈데…… 오빠가 안 와소 아빠한테 허락 맡고 왓쪄.”
“그랬어? 미안해. 오빠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것만 끝내고 갈 생각이었는데. 우리 라피가 오빠 기다렸구나.”
“웅웅, 하부지 지베서 오빠 그림도 그렷써!”
“오! 정말? 우리 라피가 오빠 그림도 그렸다니 얼른 집에 가서 보고 싶어.”
기숙사로 가는 내내 항상 침묵과 친구로 지낸 유진의 입은 재잘대는 라피의 말에 대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따라가며 본 엘런은 내내 감탄했다.
저 무뚝뚝한 존재를 살살 녹여낼 여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동생한테 녹아내리다니.
“우리 라피, 잠깐만 여기 앉아서 기다려. 짐 마저 다 싸고 같이 가자.”
“웅.”
유진의 침대에 앉은 라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고갯짓에 엘런이 유진의 눈치를 보며 슬쩍 다가갔다.
“안녕, 난 유진의 룸메이트인 엘런이란다. 아, 혹시 룸메이트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
올해 막 네 살이 된 아이기에 모를 것 같아서 조심히 눈치 보며 물었다.
“안냐세여. 라삐에여. 요즘 구론거 모루는 사람도 잇써여?”
“어? 아, 미안. 동생이 없어서 내가 잘 몰랐네.”
머쓱한 표정을 지은 엘런은 통통한 라피의 볼살을 보고 왜 유진의 가족들이 떡으로 부르는 지 알 것 같았다.
“동생이 없긴 왜 없어! 너 외가 사촌 동생 있잖아.”
“아, 듣기로는 영지로 내려갔다던데, 내가 사촌들까지 신경 써야 할 정도로 정신이 남아돌진 않거든. 그것보다 라피, 나는 오빠의 친구니까 엘런 오빠라고 불러도 된단다.”
“우웅? 라삐 오빠눈 조기 잇눈데여? 글고 하부지네 지베 또 오빠 잇써여.”
“그, 그렇구나. 우리 라피는 오빠가 있어서 좋겠네. 나도 라피 같은 동생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구롬 아빠랑 엄마한테 아가 만드러 달라고 하세여.”
“나도 그러고 싶은데 어머니께서 더는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고 해서 그건 불가능해.”
히알루 후작부인은 후계자까지 낳은 마당에 굳이 아이를 가져서 몸매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때부터 피임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라피가 내 동생 하…….”
“닥쳐! 어디서 우리 라피한테 작업을 하는 거야. 라피, 오빠랑 같이 집에 가자. 안 그래도 누님이랑 매형도 그곳으로 오겠다고 연락 왔었단다.”
예전엔 편지만 날렸지만, 요즘엔 통신구로 직접 연락하는 오누이가 된 유진과 에리카였다. 이 모든 계기가 라피로 인한 좋은 변화임을 모르진 않았다.
“얼룬 가여. 오늘은 언냐랑 자야지.”
동침 선택권이 있는 라피의 말에 짐을 챙기던 유진의 움직임이 멈췄다.
“오늘 누님이랑 잘 거야? 오빠랑 안 자? 오빠는 주말에만 보는데?”
“우웅, 구치만 언냐가 오면 항상 언냐랑…….”
평소에 하던 습관처럼 말하던 라피는 유진이 내민 것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영롱하게 빛나는 파란색 돌멩이에 두 눈을 반짝였다.
“오빠가 이거 줄게. 그러니까 오빠랑 같이 씻고 자자.”
“우웅, 조아. 낵아 절대 쩰리 가튼 거 바다서 조타고 말하는고 아냐.”
“그럼그럼, 당연하지. 자! 그럼 가자.”
짐을 다 싼 유진은 라피를 소중하게 폭 안아 올렸다.
“라피, 이 세상에서 오빠랑 아빠를 제외한 남자는 늑대니까 함부로 말하거나 만나면 안 돼. 알겠지?”
“우웅, 구롬 에이랑 제이 그리구 콜린은?”
“조카들은 제외하도록 하자. 그럼 우리 얼른 가자.”
라피를 안은 유진은 엘런과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바삐 기숙사를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엘런은 픽, 웃었다.
“사랑스럽고 귀엽고, 아주 살살 녹네, 녹아. 나도 저런 동생 가지고 싶은데…….”
엘런에겐 현실적으로 라피 같은 동생이 아니라 딸을 갖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오빠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아빠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아빠는 워프 게이트를 오빠가 다니는 아카데미까지 연결해 줬다.
그곳에 도착한 나는 아빠가 부탁해서 마중 나온 학교 선생님의 안내로 오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를 오빠에게 데려다준 선생님 덕분에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사라진 선생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집으로 온 나는 오빠와 함께 깨끗하게 씻었다. 물론 아빠도 같이.
분명 아빠는 아침에 씻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기어코 오후에도 씻어야겠다면서 나와 오빠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뽀득뽀득하게 씻은 후에 옷을 갈아입었다. 곧 언니와 형부 그리고 콜린이 올 텐데 온몸이 나른해졌다.
“졸료.”
“그럼 자. 나중에 깨워 줄게.”
나를 안은 채 소파에 앉은 오빠의 목소리에 두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오빠, 자장가 불러조.”
“어, 응? 자, 자장가?”
“흐우웅, 자장가 불러조.”
오빠의 무릎을 벤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졸려서 뭔가를 더는 생각하는 게 불가능했다.
“자장가라, 어머니가 어떤 자장가를 불러 줬었더라.”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하더니 오빠는 체념한 듯 내 배를 적당히 여문 손으로 다독다독해 줬다.
“자장, 자장, 우리 호박떡! 잘도 잔다. 우리 호박떡!”
그게 아닐 건데?
엄마가 오빠에게 호박떡이라고 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들기엔 너무나 졸렸다. 오빠의 엉뚱한 자장가를 들으며 눈이 감겼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뜰과 뒤뜰에서…….”
어느 순간부터 귓가에 희미하게 들리는 제대로 된 자장가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 *
꾸우웅, 미양.
“미안, 씨엘! 낵아 좀 바빠.”
한동안 밖을 싸돌아다니다가 밤에 들어온 씨엘이 오늘따라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놀아 달라는 표시인 것 같았지만 씨엘과 놀아 줄 시간이 없었다.
“오늘 선쌔니미 오기로 햇써.”
그동안 판테르 공작저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와 읽으며 혼자 공부했다. 하지만 독학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가씨, 긴장하지 마세요. 제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게요.”
그 말을 한 제니가 오히려 긴장했는지 두 눈을 부릅떴다. 원래라면 방에 나와 선생님만 있어야겠지만 이번에 특별히 제니가 지켜볼 수 있게 했다.
“군데 선쌔니미 누군지 아라요?”
“아,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오늘 오시는 분은 요즘 맞선에 열을 올리고 계시는 벤스 님의…….”
똑똑똑-
제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중함마저 느껴지는 소리에 내 허락을 받은 제니가 문을 열어줬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드워드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아가씨께 역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지은 이가 두꺼운 책을 안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벤, 뵨장햇써여? 군데 나이 든 모습이 더 잘생겨 보여여.”
평소 봐 온 잘생긴 벤스였다. 거기에 하나 더한다면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나이든 변장을 한 게 분명했다. 잘생긴 남자들은 나이 먹어도 역변을 하지 않는 것인가.
자연스럽게 변장한 벤스가 미소 지었다. 젊은 벤스가 미소 지으면 약간 느끼했다. 하지만 지금의 벤스 미소는 농후하다고 해야 하나. 깊이가 깃든 미소였다.
“세라피나 아가씨, 제 소개를 전부 하지 못했군요. 제 본래 이름은 에드워드 크리스토퍼입니다. 벤스의 아비 되는 사람이지요.”
“벤의 아빠? 헤에, 말도 앙대! 오또게 아빠가 아들보다 잘생겨여?”
“풉, 크흠흠! 죄송합니다. 막판에 힘을 좀 쓴다고 했는데 저보다 못난 놈을 만들어서.”
한참을 웃던 에드워드는 나를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간단하게 말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크리스토퍼 후작이었는데 귀찮아서 벤스에게 물려줬다고 말이다.
노후는 매우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집에서 책을 벗 삼아 놀고 있다가 아빠한테 걸려들었다나 어쨌다나. 노후라고 말하기엔 뭐한 사십대 중후반으로 보이는데.
“그런 이유로 제가 한동안 아가씨의 역사 선생님이 될 거니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니에, 선쌔님.”
“우리 세라피나 아가씨는 대답도 잘하시는군요. 허허허.”
“세라삐나는 엄마 이름이에여. 저눈 라삐라고 불러 주세여.”
“오! 제게 애칭을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젊은 벤스의 느끼함이 빠진 미소를 본 나도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나는 에드워드의 역사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황녀 시절엔 가정교사가 붙어서 온갖 것들을 아울러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와 마찬가지일 줄 알았지만, 에드워드의 수업은 귀에 쏙쏙 박혀들었다.
“구니까 쓰펜타 대륙에 고대 국가가 잇썻다고여?”
“그렇지요. 지금 밝혀진 것은 고대어가 두 가지였다고 합니다. 차이나 고대어와 우리가 말하는 고대어랍니다. 그리고 그땐 과학과 마법이 공존하였다고 합니다.”
“흐우움, 마봅이랑 과학이 지금까지 이어졋쓰묜 더더 발존햇쓸건데 오째서 망햇써여?”
“고대어로 발견된 문헌에 따르면 세계대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일을 계기로 고대인이 대부분 죽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몇몇은 지하로 피했다지만.”
지상은 완벽하게 피폐해졌고 공기와 물이 극도로 오염되어 마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몇몇 지하로 피한 이들은 그간 자신들이 저질러 온 만행을 글로 남겼다.
수 천 년 전에 있었다는 고대어로 적힌 글이 발견되면서 스펜타 대륙에는 지금의 나라 이전에 고대 국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롬 망하고 나서 다시 나라가 생긴 거에여?”
“그렇지요. 지하로 숨어들어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이 수 백 년 만에 정화된 지상으로 나와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군데 왜 과학이 안 발존햇써여?”
고대인이 나라를 세웠다면 분명 과학이 발전했을 텐데, 여긴 아직도 전등도 없는 세상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과학자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폐허가 된 후라 사용할 자원도 없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전쟁이 일어나 모든 게 소실되었지요.”
고대 국가의 이름을 따서 다시 나라를 세웠지만, 그들은 분쟁을 일으켰고 나라가 쪼개지며 흥망성쇠가 이어졌다. 한마디로 과학이 발전할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다. 뭔가 이룩하려고 하면 망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 이들은 과학자들이라고 한다.
“지금의 사반나 제국이 있기 전까지 수십 번이나 나라가 바뀌었지요. 그리고 다른 나라도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많은 이름으로 불렸답니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에드워드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로쿠나. 군데 고대인이 세운 나란데 왜 고대어가 이어지진 안앗써여?”
“오,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자고로 나라의 언어와 문화는 강한 나라를 따르게 되어 있지요. 아주 오래전에 스펜타 대륙을 지금의 차이나 제국이 꿀꺽한 적이 있지요.”
한 마디로 고대어를 사용한 나라를 꿀꺽한 후 차이나 제국의 독자적인 언어를 쓰게 한 것인가. 이른바 일제강점기 시대와 비슷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헤에, 꿀꺽 한 나라를 지배하려고 문하랑 언어를 지것으로 강요한 건가여?”
“오오, 우리 라피 아가씨! 최고입니다. 자고로 복속한 나라를 다스리려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언어와 문화를 없애거나 바꾸는 게 효율적이지요.”
차이나 제국은 고대나 지금이나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나 제국이 평온하게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내란과 전쟁 등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차이나 제국도 타국에 복속되기도 했다.
자연스레 문화와 언어가 섞이게 되었고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지켜내지 못해 지금은 스펜타 대륙 공용어를 쓰는 중이다.
“자! 오늘 수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허허허, 대체 누굴 닮으셨기에 이리도 똑똑하실까요.”
만족한 에드워드가 나를 보며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연방 칭찬하던 중 벤스가 등장했다.
“아버지, 수업하는 중에 이상한 말씀 하시거나 그런 거 없으셨죠?”
“이상한 말 할 틈도 없었다. 우리 라피 아가씨가 얼마나 내 수업을 잘 따라왔는데. 그렇죠? 라피 아가씨?”
에드워드의 인자한 눈빛에 나는 방긋 웃었다. 그의 수업은 매우 훌륭했기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긍정했음을 대답으로 표현했다.
“니에니에, 선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