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어린애도 아니고 말이야. 이젠 떠먹여 주기까지 해야 하는 내 신세가 참 안타까웠다. 아니 이건 다니엘이 아이들을 잘못 키운 게 분명했다.
“에이, 조그페하디마. 갠찬을거야. 삐나 언냐의 맘은 십게 변하지 안을거 가트니.”
“조급해하지 않고 싶은데 사비나가 나를 보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마음이 급해지는걸.”
마음이 쉽게 변할 것 같았으면 에이든이 다른 여자랑 사귈 때 벌써 떠났을 것이다. 저리도 못 만나는 것을 섭섭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니 여전히 에이든을 좋아하는 듯했다.
위로가 되지 못하는 위로를 해 준 나는 에이든의 어깨를 다독다독해 줬다.
만나기라도 해야 뭘 해결하든지 말든지 하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는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갠찬을거니까 나를 미더.”
“나야 언제든지 고모를 믿지. 후우, 고모 미안해. 내가 우리 고모 앞에서 생떼를 썼네.”
내가 너무 믿음직스러워서 그런 거라고 말한 에이든은 고개를 푹 숙였다. 뒤늦게 서로 마음이 통했는데 못 만나는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실베스터 왕국으로 가서 사비나를 만날 수는 없었다. 아빠가 허락해 주지 않을 테고 그 나라에서도 일개 귀족 영애가 들어오는 것을 마뜩잖게 생각할 테니까.
“쫌만 더 시간을 가지자. 알겟찌?”
“응, 알겠어. 고모 말대로 할게.”
“차카다, 차케.”
에이든을 달래 준 나는 의자에서 폴짝 내려서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땐 혼자 있게 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에이든의 방에서 나오니 앞엔 낯익은 존재가 서 있었다.
“대체 우리 아들이 뭐가 그리 못나서 실베스터 왕자님이 자꾸 방해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방문을 살짝 열어 두고 몰래 지켜본 헬레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구곤…… 울 오빠를 보묜 답이 나오지 안을까여.”
“유진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으음, 그렇군요.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는 우리 아가씨께서 떡처럼 생겨서 그런 거잖아요.”
그래, 나 떡같이 생긴데 뭐 보태 준 거 있수? 후우, 떡같이 생겨서 개떡같이 사는 내가 참아야지 원.
아직 오빠의 방학 중일 때, 에이든과 제이든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오빠가 에이든과 제이든에게조차 나를 보이지 않게 막아선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헬레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우리 고모한테 접근하는 놈 다 막았던 전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막지 말걸, 이랬다가 우리 라피를 보면 막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엄마가 너무 인기가 좋아서 따르는 남자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 아빠한테 온전히 마음을 뺏겨서 제게 접근하는 남자애들의 눈물을 한 바가지씩 흘리게 했다나.
뭐 엄마 그림을 보면 다니엘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오빠는 우리 라피가 딴 남자 사귀는 거 용납 못 할 것 같긴 하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아가씨가 결혼할 남자를 데리고 오는 그 순간, 그놈이 다음 해에 공짜 밥을 먹을 수 있겠지만요. 호호호.”
살벌한 소리를 웃으면서 말한 헬레나는 나를 꽉 잡아 안아 올렸다. 평소처럼 볼을 비비적댄 헬레나는 나를 할머니 방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웅? 하무니랑 자야 하는데.”
“오늘은 저랑 코오코오 해요. 저 이제껏 우리 아가씨랑 같이 잔 적 없단 말이에요. 참고로 할머님껜 이미 허락받았답니다.”
어이쿠-
에이든을 달래고 왔더니 이젠 헬레나가 생떼를 썼다. 에이든이 헬레나를 닮은 것인가.
“그, 그럼 나도 같이 자고 싶습니다만.”
보통 귀족 부부의 침실은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관계를 갖는 게 아니면 각자 방에서 따로 자곤 했다. 아주 특별하게 금슬이 좋은 부부는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매일 같이 잔다고 듣긴 했지만.
“여보, 오늘은 저랑 라피 아가씨랑 같이 잘 거랍니다.”
“헬레나,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세요. 저도 우리 동생이랑 자고 싶단 말입니다.”
“흐음, 그렇다면…… 옷 갈아입고 오세요.”
헬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니엘은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잠옷을 입은 다니엘과 헬레나는 나를 가운데에 두고 침대에 누웠다.
눕는다고 바로 잠이 들진 않았다. 그렇기에 헬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려 가슴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어머, 우리 아가씨! 넘 귀여워요.”
“여, 여보 나도…….”
“어린 아가씨 앞에서 못 하시는 말씀이 없으세요.”
얼굴을 뭉근하게 붉힌 헬레나가 다니엘을 살짝 째려봤다. 그러자 헛기침을 한 다니엘은 제 가슴을 팡팡 두들겼다.
“라피, 오빠 가슴에 안겨서 자는 건 어떠니?”
오빠의 권유에 손을 뻗어서 그의 가슴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다시 헬레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오빠, 절뵥이에요. 혐부는 오빠에 비하묜 빵빵해.”
“컥!”
“그러기에 운동 좀 하라고 했잖아요. 역시 남자의 매력은 가슴이긴 하죠.”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다니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최대한 밀착했다. 그러곤 헬레나에게 팔베개를 했다.
“가슴은 절벽이어도 이건 할 수 있습니다만.”
“나중에 팔 저리다고 하기만 해 봐요. 그땐 확 마!”
부부의 달콤살벌한 말을 들은 나는 픽, 웃었다. 그러곤 조금 일찍 하루를 마감했다.
* * *
처음보다 마법 멀미가 매우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의 반나절가량은 꼼짝없이 누워서 약을 먹어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유진은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열네 살 생일이 지난 유진은 달력을 봤다. 아카데미는 주 5일 수업에 이틀을 쉬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애인이라도 생겼어? 너 요즘에 기숙사 오자마자 달력 보느라 정신없는 것 같아. 게다가 마법 멀미 때문에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지 않더니…….”
룸메이트인 히알루 후작가의 엘런은 집에 갈 준비를 서두르는 유진을 신기하다는 듯 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진은 이곳에서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방학이 될 때만 영지로 내려가곤 했다.
한데 어느 날부터 유진은 주말마다 자리를 비웠다. 마법 멀미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참고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어여쁜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 게 분명했다.
머릿속으로 가설을 세운 엘런은 유진을 찬찬히 살폈다. 사랑하게 된다면 아름다워진다는데 유진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표정을 굳히며 저를 노려봤다.
저 황금색 시선에 처음엔 놀라 심장이 숨 쉬는 것을 포기했지만 지금은 가느다란 숨통을 틀 수 있었다.
“왜, 왜 또? 내가 못 물어볼 말 한 거 아니잖아.”
“닥치고 공부나 해. 너 그러다가 유급당하면 후작님께서 참 좋아하실 것 같으니까.”
“별걱정을 다하시네, 내 걱정은 하지 마. 우리 외가가 좀 빵빵하잖아.”
엘런의 외가 역시 마법사 집안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티그리스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마법탑주인 모르간 후작가였다. 외가끼리 반목한다지만 마법사의 길을 걷지 않은 둘은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근데 방학 때 동생은 만났어? 어때? 예뻐?”
“어, 예뻐.”
“헐. 진짜?”
그 어떤 여자를 봐도 얼굴 평을 한 적이 없는 유진이었다. 그런 유진이 예쁘다고 말하니 동생을 보고 싶은 마음에 엘런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난 시간 되는데, 주말에 가서 네 동생 소개해 주면 안 돼?”
“하아? 죽고 싶으면 무슨 말을 못 할까.”
“아, 왜? 예쁘다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예쁘다는 말로 우리 라피를 수식하는 건 어려워. 사랑스럽고 귀엽고 말 한 마디만 하면 화도 사르르 녹아내릴 정도야.”
단답형이 아닌 긴 서술형으로 대답하자 엘런은 피식 웃었다. 동부를 호령하는 잘난 판테르 공작의 후계자도 동생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정도야? 오오, 대단하다. 그러니까 예쁜 동생 소개…….”
“엘런 히알루, 닥치라고 했을 텐데. 동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마. 우리 동생 닳아.”
이젠 하다하다 못해 동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말라는 말에 엘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동생은 멀쩡해? 내가 알기로는 동부에 파멸의 아이가 떨어졌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본디 유진에겐 동생이 없었다. 그렇다고 판테르 공작이 아무 아이나 붙잡고 딸로 삼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황실과 신전을 가장 미워한 판테르 공작이 파멸의 아이를 입양한 게 분명했다.
“네가 우리 동생을 못 봐서 그렇지, 봤다면 홀딱 반할걸. 쪼그만 호박떡 같은 게 우다다다- 뛰어와서 안겨 뽀뽀하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데.”
잠도 같이 자고 간혹 목욕도 같이 한다는 말에 히알루는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귀족가에서형제여도 같이 씻진 않는다. 한데 나이 차이가 좀 있더라도 남매인데 같이 씻는다는 말에 엘런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네 누나랑 북부 쪽에서는 아무 말도 없으셨어?”
“아, 왜 아무 말도 없겠어. 서로 우리 호박떡 안아서 비비고 입맞춤하려고 안달인데. 참고로 아버지는, 구운 찹쌀떡, 누님과 매형은 인절미, 할아버지네 가족은 말랑 콩떡으로 불러.”
친근하게 공통되지만 이름은 다른 떡이란 애칭을 부른다는 말에 엘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가문에서 한 번에 정신을 놓기 전에 아이를 친근하게 부를 리 없었다.
“어쨌든 그 아이는 파멸의 아이가 아니야. 뭐 아버지는 우리 동생이 파멸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약간 실망하셨었다고 했지만.”
신전과 황실이 일으킨 전쟁에서 판테르 공작부인이 전사한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로 인해 신전은 동부에서 완전히 퇴출당했고, 황실은 판테르 공작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하여튼 너희 가족도 대단하…… 음? 저기 드라코 영식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승급과 유급 사이에서 간신히 턱걸이로 살아남은 유안 드라코가 지친 표정을 지으며 흐느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엘런의 말에 유진은 급히 창밖으로 확인했다. 기숙사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모습에 유진은 얼른 밖으로 나갔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드라코 공작님의 장남인 유안 드라코가 아닌가.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나? 혹시 보충 수업이라도 들은 건가?”
드라코 공작이 검술 수업 선생들에게 뇌물을 몰래 갖다 바친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급과 승급 사이에서 갈팡질팡 중인 유안에게 개인 수업을 해 주기도 했다.
유안의 방 근처의 벽에 기댄 채 본 유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건 네 알 바 아니야.”
“하긴, 네가 밥을 처먹든 똥을 싸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근데 네놈 아비가 우리 집 마당까지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고 하던데?”
“그건 판테르 공작님이 파멸의 아이를 거둬서 데려가려고 그런 것뿐이야. 우리 아버지는 매우 정당한 일을 하신 것뿐인데 지금 그걸 따지려고 온 거야?”
유안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유진은 대뜸 장갑을 벗더니 그의 얼굴에 패대기쳤다.
“정당한 일? 그래, 그럼 나도 정당한 일을 한 번 해야겠네. 내 동생의 명예를 위해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거절은 거절하니 닥치고 따라와.”
잠시 후-
아카데미에 있는 연무장 중 가장 안쪽에 있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공간에 유진과 유안이 마주 보며 섰다. 진검이 아닌 목검을 든 채 선 유진은 한쪽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럼 시작.”
어쩌다 보니 엘런이 증인이 되어 참석했다. 씻는 중에 유진에게 질질 끌려온 엘런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닦으며 돌 하나를 던졌다. 그 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둘은 맞붙었다.
그 모습을 쓱 본 엘런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쯧,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경도 쓰지 않더니…… 대체 새로 생긴 동생이 얼마나 예쁘기에 결투까지 하는지 원.”
유진의 머릿속을 해부해도 이해가 될 것 같지 않은 엘런은 하품하며 격돌한 둘을 봤다. 몇 합 붙지 않았는데 벌써 실력 차이가 드러났다.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시시했다.
시시한 검술 대결을 보며 늘어지게 하품하던 엘런은 이쪽으로 뽀짝뽀짝 뛰어오는 존재를 보고 입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은발을 휘날리며 노란색 원피스에 구두를 신은 조그만 아이가 소리쳤다.
“오빠아아아!”
이곳에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에 유진은 화들짝 놀라 유안을 가지고 노는 것을 포기했다. 얼른 그를 밀어붙여 제압한 유진은 급히 아이에게 달려가 폭 안아 올렸다.
“우리 호박떡…….”
“아냐!”
“응, 그래. 우리 라피,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우웅, 오빠 보고 시퍼서 낵아 왓쪄. 구로묜 앙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라피를 본 엘런은 왜 유진이 동생에게 푹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쓰러진 유안 쪽은 시선도 주지 않은 엘런은 급히 남매에게 달려갔다.
“저, 저기…….”
“닥쳐, 보지 마. 우리 라피, 닳아져!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