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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71)화 (71/164)

71화. 

할아버지의 소매를 잡고 말하자 그때야 사색이 된 표정을 풀며 고용인을 향해 말했다.

“최소 이십팔색 이상의 크레파스로 가져오게나.”

할아버지의 한 마디에 28색 크레파스가 아니라 42색 크레파스로 변해 돌아왔다. 색색깔의 크레파스를 본 나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 게냐.”

“니에, 징짜 이뽀여.”

대한민국에서 학교 다닐 때 미술 시간이 되면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당시 나는 18색은 고사하고 12색 크레파스를 사용했다. 그것도 닳고 닳아서 손에 쥐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빠는 내게 흔한 크레파스 한 자루 사 준 적이 없었다. 그걸 사 줄 돈으로 담배를 피워 연기로 불사르거나, 술을 사 마시며 주사를 부려 끝내 나를 죽게 만든 원인이 되었지만.

42색 크레파스를 받은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나는 몇 장이나 되는 그림을 뚝딱 그렸다.

“오호, 이건 누구 그림이지?”

“요곤 아빠랑 오빠, 글고 라삐!”

“그럼 이 그림은?”

“혐부랑 언냐, 콜린!”

“그렇구나. 그럼 이 마지막 그림은?”

세 장의 그림 중에서 가장 힘들게 그린 것을 가리키며 싱글벙글 웃는 할아버지를 본 나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를 짚었다.

“하부지, 하무니 기타 등등 그리고 라삐!”

“뭐? 껄껄껄.”

이 집안의 식구는 너무 많았다.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은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제외하고 기타 등등 처리를 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대며 웃었다.

한동안 실컷 웃은 할아버지는 기력이 딸리는지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눈가에 눈물까지 찔끔할 정도로 웃은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귀한 말랑 콩떡이는 그림도 잘 그리는구나.”

솔직히 지금 티그리스 가문의 남자들은 죄다 은발에 금안이었다. 단지 얼굴이 부계와 모계 쪽으로 나뉘거나 키와 체중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손가락으로 가리켜 설명해야 옳았지만 과감하게 생략한 나는 할아버지의 칭찬에 히죽 웃었다.

“지베 가꼬 갈꼬에여.”

“으음, 할아버지한테는 한 장도 안 줄 것이더냐.”

누군가를 준다는 생각을 안 해 본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할아버지를 보고는 최고 난도의 그림을 드렸다.

“요고 주께여.”

“오오, 정말이더냐? 정말 고맙구나. 하하하, 우리 집안의 가보로 남겨야 할 것 같아.”

그냥 예의상 내 기분 좋으라고 하신 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그림은 빠른 속도로 액자에 끼워져 역대 가주의 초상화가 걸린 복도에 떡 걸렸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타 등등과 라피」

가주의 이름이 박혀야 할 동판에 적힌 그림의 제목에 나는 뒷목 잡고 넘어질 뻔했다. 어린 나이에 치솟은 혈압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나 외의 다른 이들은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야. 라피, 너무하는구나. 기타 등등이라니…… 최소한 오빠라도 불러 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기타 등등으로 불린 것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에이든과 제이든은 이런 그림조차 그려 준 적이 없잖아요.”

다니엘이 한숨을 푹 쉬며 아쉬워하는 표정을 짓자 헬레나가 어깨를 다독였다. 형제가 아이로서 매력은 없었다면서 역시나 딸을 낳아야 했는데 못 낳은 것을 천추의 한으로 여겼다.

그림으로 한바탕 웃고 떠든 나는 저녁밥을 야무지게 먹었다.

“우리 라피, 그림 그리는 게 힘들었나 보구나. 오늘따라 맘마를 더 많이 먹어서 이 할미 기분이 좋구나.”

할머니 기분 좋으라고 많이 먹은 거 맞았다. 살이 몇 킬로그램이나 쪘지만, 할머니 눈엔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로 보이는지 안타까워했다. 이래서 시골집에 아이를 맡기면 확대되어 돌아온다는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사 후 마리아가 내민 오렌지맛 물의 정령을 입에 넣어 양치질을 한 나는 통신구를 켰다.

[음? 오늘따라 우리 구운 찹쌀떡이 씻지도 않았는데 팅팅 부어터진 것 같구나.]

다른 곳으로 가면 매일 통신구로 연락할 것이란 조건을 단 아빠 덕택에 나는 저녁 중 일부를 연락하는 데 썼다. 종일 뭘 했는지 아빠에게 보고한 후 사랑한다고 말하고서야 통신구를 껐다.

일과를 마친 후 그때야 나는 따끈한 물에 몸을 뉘였다. 뽀득뽀득 씻은 후 아이용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 우리 아가씨! 물에 부푼 어여쁜 물떡이 되었군요. 호호호, 어쩜 이리도 귀여우실까요.”

내가 다른 고용인의 손에 씻겨지는 동안 마리아는 주변을 정리하다가 씻고 나온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러곤 내가 손을 펼치자 곧장 안아 올려 의자에 앉혔다.

머리를 곱게 빗어 준 마리아는 이제껏 옷 속에 가려졌던 내 보석을 보며 물었다.

“아가씨 목에 걸린 목걸이가 뭔지 아시나요?”

“웅? 몰라여.”

“목걸이 메달 색이 희한해서 한 번 여쭤 본 거였어요.”

“아, 구로쿠나. 군데 요거 본래는 보라색이엇써여.”

“네, 보, 보라색이요?”

“웅, 보라색이여. 군데 왜 마리아 우러여? 마리아?”

고개를 숙여 보석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거울엔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마리아의 모습이 비쳤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나는 의자를 밟고 일어나 마리아의 눈가를 가운 소매로 꾹꾹 눌렀다.

“어, 죄, 죄송합니다. 갑자기 눈물이…… 흐읍, 하아…….”

억지로 눈물을 걸어 잠근 마리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지 마여.”

“네, 이젠 안 울게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라피 아가씨, 안아 봐도 될까요?”

나를 한 번도 안아 본 적 없는 것도 아닌데 생뚱맞은 말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매우 조심히 품은 마리아의 숨결이 머리카락에 닿았다.

“우리 말랑 콩떡 아가씨, 지금이라도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러니까 오래오래 우리 얼굴 보면서 웃어요.”

“니에.”

별것 아닌 마리아의 부탁에 나는 곧장 대답했다. 그 대답이 또 뭐라고 마리아는 눈물을 다시 흘렸다. 

“세라피나 아가씨…… 보는 것 같아서…… 흐읍!”

마리아는 엄마의 젖형제라고 했다. 그렇기에 나를 보고 엄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우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그저 그녀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조금 진정이 된 마리아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내 머리를 예쁘게 묶어 준 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때마침 살짝 열린 문으로 씨엘이 등장했다.

“후아암, 씨엘은 대체 오디 다녀온고야?”

예전엔 껌딱지처럼 따라붙더니, 요즘엔 외도하는지 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하니 현지처를 마련해 두고 나를 따라 이동한 후 만나러 다니는 건가.

미야옹.

내 물음에 뜻 모를 대답을 한 씨엘은 바닥에 털퍽 앉더니 제 털을 핥았다. 한동안 실컷 그루밍을 하는 씨엘을 본 나는 마리아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마리아, 우리 씨엘 씨껴주세여.”

오늘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리느라 힘들었던 나는 마리아에게 씨엘을 맡겼다. 잠시 후 물에 척척하게 젖은 씨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이 냥이든 저 냥이든 털 빨을 무시 못 하는 것 같았다.

마리아가 씨엘의 털을 말릴 때 늘어지게 하품한 나는 소파에 앉아 따끈한 물을 마셨다.

벌컥-

“모야!”

순간 문이 열려 놀란 나는 살짝 눈을 흘기며 앞에 있는 존재를 봤다. 요즘 풀어 줬더니 녀석들이 어른 무서운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비나가 기다려. 그러니까 가서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설명만 해 주세요. 고모!”

갑자기 존댓말을 하자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낵아 왜!”

“으음, 귀여운 나이 많은 조카의 부탁이랄까요?”

“모라는 고야? 기엽다니, 귀 업는 게 아니고?”

“우리 고모는 농담도 잘해. 그런 농담을 해도 사비나는 까르르 웃을 건데.”

뭔가 아쉬움이 절절하게 묻어난 에이든은 나를 제 방으로 데려갔다. 눈 뜨고 납치를 당한 나는 의자에 앉혀졌다. 그러자 곧장 낯익은 모습이 비친 통신구가 앞에 놓였다. 사비나임을 확인한 나는 대뜸 먼저 말했다.

“삐나 언냐, 나 네짤 댓어요.”

[오, 라피 오랜만, 아니 고모님 오랜만이에요. 고모님 생신이란 것을 몰라서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

“웅? 구론 고 피료 업써여. 엄총 마니 바닷거든여.”

아빠가 내 물건을 보관할 자그마한 창고까지 지어 주셨다. 거기엔 할아버지가 모나코 후작에게 받아낸 보상금과 더불어 생일 선물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쩰리 가튼 거 마니마니 잇써여. 빤짝빤짝 빗나여.”

[반짝반짝 빛나는 젤리 같은 보석을 많이 받으셨군요. 우리 고모님 참 좋으시겠어요.]

방긋 웃은 사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섭섭해서 어쩌죠.]

“갠차나여. 울 에이랑 겨론해 주눈 것만으로도 고마버여.”

[어, 어머어머! 우리 고모님은 못하는 말씀이 없으셔요. 호호호.]

내 말을 잘 해석하는 것으로 봐서는 이 집안사람이 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공주님이니 우리 에이든과 집안 차이가 크지도 않고.

적당히 반반 결혼식을 하고도 남을 사비나는 내가 뭔 말만 해도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구래소 하부지가 하무니한테 옴총 혼낫써여.”

[역시 티그리스 공작가는 공작부인이 제일 세신 것 같아요. 호호호, 그리고 그보다 더 센 분이 우리 고모님이시죠.]

사비나의 말에 나는 어깨에 힘을 준 채 허리춤에 양손을 올렸다. 콧대를 치켜세운 날 본 사비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까 그림도 그렷써여. 담에 삐나 언냐도 그려주께여.”

[정말요? 고마워요.]

사비나가 결혼해서 이곳으로 오면 당연히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 제목은 할아버지가 알아서 지으시겠지만.

“군데 삐나 언냐는 온제 와여? 삐냐 언냐 보고시프다.”

아까부터 자꾸만 에이든이 내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눈치를 보아하니 사비나를 보고 싶어서 나를 동원한 게 분명했다. 에이든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다시 방긋방긋 웃으며 사비나에게 언제 올 거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사비나의 표정이 순간 시무룩해졌다. 이곳에 못 온 게 본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인 게 훤히 보였다.

[저도 가고 싶은데, 정말정말 가고 싶은데…….]

[사비나, 여기서 뭘 하는 게야. 오늘 파티가 있는 거 잊은 거니?]

[아, 오, 오라버니…… 저 지금 통신구로 연락 중이에요. 지금 에이든 님의 고모님이…….]

[됐고 얼른 통신 끊어. 바쁘다.]

사비나의 통신구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에이든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모님, 저 이만 가 봐야겠어요. 우리 나중에 통신하…… 오, 오라버니!]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통신구가 끊어졌다. 아마도 사비나의 오빠가 일부러 통신을 끊은 게 분명했다.

“원래 이래?”

“응, 나랑 사비나가 통신구로 연락 중일 때 자주 이래. 아니 어떻게 연락할 때마다 저러는지 원…… 사비나한테 사람을 붙인 게 아닌 건가 싶을 정도야.”

“쯧쯧, 삐나 언냐의 오빠가 너 시러한가바.”

“그런 것 같아. 후우,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긴요. 나도 답이 없는데. 사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데다 몸이 이역만리 떨어진 상황이었다. 그저 사비나의 오빠에게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갑자기 에이든을 좋아하진 않고서야 불가능했다.

“으휴, 하나 해결햇떠니 이젠 별게 다 문제네.”

“응,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그곳에 갈 수도 없고…… 고모는 똑똑하니까 알 수 있을 것 같아. 고모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 거야?”

“후웅? 맘마 차료 주묜 구만이지, 이젠 낵아 맘마도 머겨주리?”

“고모, 좀 도와줘. 응?”

“이것드리 날로 머그려고 하네, 이래소 낵아 안 늘고 배기겟니?”

으휴, 나이 많은 조카들이 있다고 절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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