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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64)화 (64/164)

64화. 

나의 평범한 일상에 부자가 끼어들었다. 마법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라피는 마법 안 배워도 돼. 내가 기사가 되어서 지켜 줄 거야.”

“난 이미 기사 작위도 가지고 있단다. 그리고 돈도 많지. 라피의 주변을 아무도 얼씬 못하게 기사들로 쫙 도배를 해 주마.”

나의 사생활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빠도 평소엔 이러지 않았는데 오빠가 온 이후로 나를 찾는 횟수가 늘어났다. 종일 일하느라 바빠서 어떤 날엔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젠 그런 날이 없었다. 회의를 하더라도 꼭 나를 옆에 두고 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오스카가 보다 못해 내가 쉬어야 한다며 회의 중이나 아빠가 일할 때 제니의 손에 맡겼겠는가. 하지만 그러면 뭐 하겠는가. 오빠가 뒤에서 대기 중인걸.

아침에 기사들과 대련을 마치고 나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옆에 찰싹 붙었다.

“요 말랑한 귀요미! 오늘은 뭐 할 거니?”

“산책 햇쓰니까 이제 곰부할꼬야. 오빠도 곰부해!”

한 가문의 후계자로 공부할 게 상당히 많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란슬롯 오빠도 황태자로서 공부하느라 하루 중 절반 이상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었다. 한데 이 세계의 오빠는 유독 한가해 보였다.

“오빠는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뽀개질 것 같은데 여기에서도…… 우리 라피가 하라면 해야지. 할게. 우리 같이 공부하자꾸나.”

요즘 공부하지 않고 뺀질뺀질 뒤로 뺀다고, 맥스가 한 소리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잣말을 했지만,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은 나는 오빠를 도서관의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곧장 밖으로 나가 제니에게 맥스를 찾아오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당사자가 두꺼운 책을 들고 나타났다.

“워렌 후작님, 여긴…….”

“공작님의 명을 받아 도련님의 임시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정식으로 공부하도록 하지요.”

일반 가정교사는 오빠가 가문의 힘을 이용해 온갖 핑계를 대서 죄다 쫓아 버렸다고 했다. 그렇기에 이번엔 아빠가 특별히 맥스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이 집안의 후계자라도 맥스를 함부로 쫓아낼 수는 없을 터였다.

울상이 된 오빠는 나를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라피, 이젠 종일 못 놀아 줄 것 같아.”

“갠차나. 나도 곰부할꼬야.”

손을 저으며 책을 편 나는 학자처럼 외알 안경을 쓴 맥스와 눈이 마주쳤다. 

찡긋-

윙크하며 무언의 시선을 주고받은 나는 씩 웃으며 얼마 전에 나이 많은 조카들이 주고 간 마법책을 펼쳤다. 오빠가 공부만 시키려고 하면 도망간다는 맥스의 푸념을 듣고 내가 도와주기로 한 것이다.

“여기 아가씨도 계시는데 더 열심히 공부해서 모범을 보이셔야지요.”

“윽…… 알겠어요. 공부하면 되잖아요. 후우.”

한숨을 푹 내쉰 오빠가 맥스의 강의를 들으며 공부할 때 나도 마법 공부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책을 펼쳤는데, 공부할 때 항상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대며 안아 달라고 하는 씨엘이 없어 뭔가 허전했다.

듣기로는 요즘 씨엘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연무장으로 가서 기사들을 지켜본다고 한다. 아무래도 움직임이 많고 반짝여서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는 것 같았다.

맥스에게 열심히 혼나면서 배우는 오빠를 본 나는 다시 독학을 했다. 판테르 공작가에 고용된 마법사를 불러 가르쳐 달라고 해도 되겠지만 어차피 나도 알 것은 다 아는 수준이었다.

단지 마나가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그렇다고 마나가 계속 바닥 상태는 아니었다. 날마다 조금씩 새로 쌓이긴 했다. 개미 똥구멍만큼.

티 나지 않게 마나가 쌓여서 애달픈 나는 길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론은 다 알지만 마나가 쥐꼬리만 해서 실전을 할 수 없는 나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실시간으로 포실포실하게 쌓여 가는 서류를 전부 해치운 아빠가 등장했다.

“내일은 해가 어디에서 뜰지 생각 좀 해 봐야겠군.”

오빠가 공부하는 모습을 본 아빠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내일은 해가 안 뜰 예정입니다.”

오빠가 약간 퉁명스럽게 답하기가 무섭게 맥스가 틀린 곳을 꾹꾹 눌러 가리키며 말했다.

“도련님, 공부할 땐 집중하셔야 합니다. 구운 찹쌀떡이 눈앞에서 데굴데굴 굴러도 모르는 수준으로 공부하시지요.”

“아니 워렌 후작님은 구운 찹쌀떡이 굴러다니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까.”

“집중하면 호박떡이 굴러들어 와도 모를 겁니다.”

“호박떡이 얼마나 달고 쫄깃한데 그걸 모를 정도로 공부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저 본능에 충실하고 싶습니다만.”

“대답하실 시간에 틀린 문제 열 번씩 쓰면서 외우시지요. 시험 봐도 틀리면 앞으로 호박떡은 볼 생각 따윈 하지 않으시는 게 나을 겁니다.”

“윽! 치사해.”

억눌린 소리를 낸 오빠는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지못해 틀린 곳을 꾹꾹 눌러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자연스럽게 나를 안아 올렸다.

“요즘은 유진이랑 놀았으니 이젠 아빠랑 놀자꾸나.”

오빠 공부에 방해된다며 인사조차 하지 못하게 한 아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아까 산책하며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정돈해 줬다.

“흐트러진 아가씨 머리카락을 다시 묶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따르는 제니가 고개 숙인 채 아빠에게 조심히 권했다. 그 정도로 내 머리가 엉망인가 싶어서 손으로 쓱쓱 빗는 동안 내 방에 도착했다.

“아가씨, 이리 오세요. 제가 예쁘게 묶어 드릴게요.”

“아니네. 됐네. 내가 할 테니 도구만 준비하고 나가 보게나.”

“네? 아……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서랍장에 있는 리본과 빗을 가지고 온 제니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아빠, 머리 무끌줄 알아여?”

“응? 한 번도 안 해 봤다만, 이런 것쯤이야 식은 수프 먹기 아니겠니.”

호언장담한 아빠는 빗으로 내 머리카락을 쓱쓱 빗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머리카락에 신경도 없건만 왠지 모르게 구겨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흐음, 이상하군. 왜 자꾸 리본이 풀리는 거지.”

이상한 게 아니라 아빠가 제대로 묶지 못해서 풀린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빠가 모테서 구런거 가타여.”

그래서 말했다. 사실대로 말했건만 아빠는 괜찮다며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제대로 묶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아빠, 아푼고 가타여.”

아픈 것 같은 게 아니라 아팠다. 옆으로 빠진 머리가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길어서 그런지 수북해 보였다.

“이제 감이 잡히기 시작했어. 그러니까…….”

집념의 판테르 공작님은 내 머리카락을 묶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완성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만큼 내 한숨은 켜켜이 쌓였다. 아픈 것도 아픈데 계속 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고 안 되면 도망치려고 크로스백에서 워프 스크롤을 만지작거릴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라피! 언니 왔단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언니가 오늘따라 너무나 어여뻐 보였다.

“언냐!”

“언니 안 보고 싶었니? 언니는 우리 라피 보고 싶…… 었는데 아버지, 지금 뭐 하고 계시는지요?”

내 머리카락과 씨름하는 아빠를 본 언니의 눈이 흐릿하게 변했다.

“보면 모르느냐. 라피 머리 묶어 주고 있다. 네가 어렸을 때 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긴 하지만.”

“아니요. 아버지, 제 머리를 만져 주지 않아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가까이 다가온 언니는 산발이 된 내 머리카락을 보더니, 혀를 차며 곧장 밖에 대기 중인 제니를 불러들였다.

“뭐 하나, 이러다가 아버지가 우리 라피의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 놓을 것 같네. 얼른 제대로 묶게나.”

아빠의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안아 올린 언니가 제니에게 맡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통 아이들이었으면 진작 울음을 터트리고도 남았을 겁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 많은 머리카락이 뽑힌 것을!”

그때야 내 머리카락에 리본을 묶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아빠의 눈동자가 밑을 향했다. 사방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본 아빠는 헛기침을 했다.

“처음이라 그래. 다음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만 잘하면 우리 라피, 대머리가 될 것 같습니다만. 쯧쯧, 우리 인절미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 놔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이건 완전히 고문 수준이라고 언니가 한 말을 들은 아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너는 머리를 묶을 줄 알더냐.”

“저야 당연히…… 모르죠. 제가 그걸 왜 해야 합니까. 돈 주고 고용한 고용인들이 있는데. 머리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죠.”

아빠와 언니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쥐어뜯긴 머리카락은 다시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넌 여기 웬일이냐. 아퀼라 공작가에서 할 일이 그리도 없더냐.”

“저 휴가 받아서 온 거예요. 우리 라피를 만나러.”

“사위놈에게 네 할 일을 다 미룬 것은 아니고?”

“딱히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빙긋 웃은 언니는 나를 안고는 제 볼에 내 얼굴을 비비적댔다.

“역시 이 말랑말랑 인절미 볼살 감촉을 잊을 수 없단 말이야. 라피, 언니랑 같이 맘마 먹을까?”

이제 보니 점심이었다. 자체 휴가를 내고 당당하게 친정에 온 언니는 식당에서 오빠를 보고는 말했다.

“많이 컸구나.”

“네.”

“많이 먹어라.”

“네.”

두 사람의 간단명료한 말을 들은 나는 이곳에서도 통용되는 현실 남매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라피, 오늘은 종일 언니랑 같이 놀자꾸나. 뭐 하고 놀까?”

“우웅, 모르게써여. 군데 혐부랑 콜린은 잘 잇써여?”

“물론이지. 둘 다 우리 라피를 보고 싶어 하지만, 내가 먼저 와서 상태를 살펴보기로 한 거란다.”

내 입에 능숙하게 음식을 먹여 준 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저녁을 지나 밤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언니 방에서 막 자려고 할 때 아빠가 쳐들어왔다.

“오늘은 나와 같이 자기로 했다.”

“아버지, 그간 라피를 독점했으니 오늘은 제게 넘기시지요.”

부녀가 나를 사이에 두고 정신없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살짝 문이 열리더니 오빠가 모습을 드러냈다. 환하게 웃는 오빠의 손에 반짝반짝 빛나는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아빠가 오빠한테 저런 걸 줄 리가 없으니 할아버지가 준 게 분명했다. 붉은 루비를 든 오빠를 본 나는 뽀르르 달려가서 침을 흘리며 말했다.

“딸기맛 쩰리 가타.”

“응. 딸기맛 젤리는 아니고 딸기맛 젤리를 살 수 있는 보석이란다. 이거 줄게. 오빠랑 같이 잘래?”

“웅!”

보석의 유혹에 넘어가 준 나는 말씨름하는 두 사람을 두고 오빠 손을 잡고 나갔다.

* * *

밤에 라피와 같이 잘 사람을 정하고자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자 판테르 공작은 에리카에게 제 생각을 말했다.

“우리끼리 말하다가 날이 샐 것 같구나. 이러지 말고 라피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자꾸나.”

“찬성입니다. 라피는 누구랑 같이 자고 싶…… 라피?”

분명 좀 전까지 앞에 있었는데 라피가 보이지 않자 두 사람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 모습을 문틈으로 본 오스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스카! 라피는 어디로 갔지?”

“도련님이 보석으로 꼬셔서 같이 나갔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판테르 공작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들놈이 감히 나를 상대로 몰래 반란을 일으키다니, 자식들 키워 봤자 소용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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