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깨끗하게 씻고 나온 후 아빠는 대기 중인 엘리오에게 혼이 났다.
“공작님, 아무리 아가씨가 귀하고 귀해 놓아주고 싶지 않더라도 상처가 있는데 씻기다니요. 제정신입니까.”
아무리 의학 분야에서는 1인자지만 엘리오는 이 집안의 가주 눈치를 보지 않았다. 오로지 내 상처를 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가방에서 이것저것을 꺼냈다.
“상처가 있으니 깨끗하게 씻기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그건 맞습니다만 깨끗한 물을 부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물속에 있으면 상처에 나쁜 균이 생겨 나중에 화농이 생기고 염증이 심하면 다리를 절단해야…….”
엘리오의 너무 앞선 말에 아빠와 오빠는 사색이 되었다. 그러고는 얼른 나를 소파에 앉혀서 주치의에게 약을 받아 직접 소독하고 상처 연고를 발라 줬다.
“라피, 아프더냐?”
“우웅, 안 아파여.”
“우리 동생은 입으로는 언제나 안 아프고 괜찮기만 하지. 내가 보기엔 엄청 아파 보이는데.”
매일 검술 수련하면서 찔리고 베이는 존재가 고작 찰과상을 입은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약 바른 곳을 펼쳐 놔야 염증이 생기지 않고 금방 꾸덕꾸덕하게 변해 낫는다는 말에 붕대도 감지 않았다. 대신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아빠가 나를 식당으로 안고 갔다.
내 전용 의자에 앉힌 아빠가 자리에 앉자 오빠가 은근슬쩍 의자를 끌어당겨 옆으로 왔다.
“라피는 뭘 좋아해?”
“우웅, 다 조아.”
“우리 라피는 편식 안 하고 골고루 먹는구나. 어휴, 착해라.”
편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빠가 내 볼을 잡아 늘리며 비비적댔다. 그 모습을 본 아빠가 오빠의 손을 떼어놓았다.
“밥 먹을 땐 씨엘도 안 건드리는 법이다. 라피, 아! 하렴. 아빠가 먹여 주마.”
언제 잘랐는지 모를 과일 조각을 내 입에 쏙쏙 넣어 줬다. 이름 모를 산속 지하에서 헤맨 후 처음 먹은 과일 맛에 흠뻑 빠졌다.
“마시써여.”
온몸을 바르르 떨며 반응하자 아빠가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라피, 이것 좀 먹어 봐. 고기를 먹어야 키가 쑥쑥 큰단다.”
이번엔 제 몫의 고기를 최대한 잘게 자른 오빠가 포크로 찍어 내 입에 넣어 줬다. 소스와 버무려진 고기를 욤뇸뇸- 씹자 오빠의 얼굴에 미소가 그득하게 번졌다.
“맛있어?”
“웅, 마시써. 오빠가 머겨조서 더 마시써.”
“그렇지, 오빠가 줘서 더 맛있지? 그럼 좀 더 먹어 보자.”
항상 단둘뿐이던 식탁에 오빠가 늘었을 뿐인데 내 배는 두 배로 빵빵해졌다. 내가 식기를 사용할 틈도 없이 음식이 입 앞에 대령되어 있었다. 아빠 것만 먹으면 오빠가 섭섭해하고, 오빠 것만 먹으면 아빠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전부 먹은 나는 평소보다 일찍 봉긋하게 부른 배를 통통 두들겼다.
“배불러서 못 머거여.”
“그래도 조금만 더 먹어 보렴. 며칠간 고생해서 살이 쏙 빠진 것 같아.”
“그래. 좀만 더 먹어 봐.”
아빠와 오빠가 자꾸만 먹으라고 권하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먹었다가는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내 고갯짓에 아빠는 포기했지만, 오빠는 끈질기게 무언가를 콕 찍어 내 앞으로 올렸다.
새콤달콤한 향으로 유혹하는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자 농후한 과즙이 터져 나왔다.
“나 이거 조아.”
“그래. 이거 좋아할 줄 알았어. 어머니가 가장 좋아한 과일이거든. 누가 우리 동생 아니랄까 봐 입맛도 어머니를 닮았네.”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존재를 내게서 찾으며 오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가 엄마를 잃을 때가 고작 열 살이었으니 상당히 어렸을 터이다. 비록 곧 있으면 열네 살이 되겠지만 아직도 어미 품을 그리워하는 어린 존재였다.
오빠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오빠가 나를 안아 올려 제 무릎 위에 올려 꼭 품었다.
“우리 라피가 오빠를 참 좋아하나 보구나.”
“웅, 오빠 조아여. 아빠 조아여. 언냐도 조아여. 다 조아여.”
나름 공평하게 좋아한다고 말한 나는 오렌지를 우물우물 씹었다. 과육이 터지며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안에서 휘몰아쳤다. 풍부한 과즙이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자 오빠가 냅킨으로 꼼꼼하게 닦아 줬다.
“나도 우리 라피가 참 좋아.”
“웅, 다행이다. 오빠가 첨에 나 안 조아해서 걱정햇써.”
“그건 오빠가 바보라서 그랬어. 미안해. 우리 동생, 앞으로는 우리 동생만 좋아하고 사랑할 거야.”
오빠의 사과에 난 방긋 웃었다. 같이 험한 일을 당했다가 와서 그런지 그래도 정이 쌓인 모양이었다. 오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싶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냐옹, 냐아앙.
마침 어딘가로 혼자 자급자족하러 갔다 온 씨엘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씨엘은 자연스럽게 팔짝 뛰어 식탁에 착지했다.
“헤헤, 씨엘 이리 와.”
내가 손을 벌리자 씨엘이 품으로 파고들며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라피, 꼭 이 고양이를 키워야겠니? 그것도 안에서?”
“웅?”
“왠지 이 녀석이 행동하는 게 꼭 정체를 숨긴 사람 같아서 말이야. 마치 고양이 거죽을 뒤집어쓴…….”
“드래곤 아냐, 기분 나뽀.”
순간 나도 모르게 격하게 말하며 씨엘을 꼭 감싸자 오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에도 절대 아니라고 말했는데 또 같은 말을 하자 나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유진, 라피 앞에서 드래곤이든 뭐든 그놈의 비만 도마뱀 새끼는 입 밖으로 꺼내지 말도록.”
“네? 왜 그러는지요.”
영문을 알지 못한 오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용 새끼가 신전과 작당한 황실의 명을 받고 우리 라피를 강제로 데려가려고 이곳에 왔었다.”
“네? 용 새끼라 함은 혹시 드라코 공작을 말하는 건가요? 허참,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그래서 가죽은 벗겼습니까?”
“벗기고 싶었지만, 우리 라피 있는 곳에서 어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느냐.”
“아쉽군요. 용의 가죽으로 우리 라피 가방을 새로 만들어 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새끼 용은 제가 밑에서 잘 굴리겠습니다.”
듣자 하니 아카데미에서 드라코 공작의 아들이 오빠의 동기인데 유급당하기 직전이라나. 유급당하는 걸 막기 위해 드라코 공작이 아카데미에 엄청난 양의 기부금을 쏟아붓는 중이라는 설명을 한 오빠는 피식 웃었다.
아마 방학이 끝나고 돌아가면 오빠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새끼 용이 성룡이 되기 전에 자근자근 밟아서 용을 포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전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묻지 못했다만…… 그때 상황 중 네가 빠뜨리고 말한 게 있느냐.”
“갑자기 땅속으로 떨어진 후 커다란 뱀이 공격해 오려고 했는데 씨엘이 나서니 꽁지가 빠지게 도망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래곤…… 크흠, 어쨌든 그게 아닌지 의심을 했고요.”
오빠의 말을 들은 아빠는 씨엘을 노려봤다. 그러자 씨엘은 얼른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아빠의 시선을 흘려보냈다.
“씨엘 때무네 우리 살앗써여.”
“그래, 그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로구나. 앞으로 녀석을 쫓아내진 않겠다만 그래도 침대로 끌어들이는 것은 반대야.”
여전히 동물과 사람이 자는 곳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는 아빠의 말에 씨엘의 귀가 축 처진 듯했다.
“씨엘이 암컷이면 모를까, 저놈 수컷이야. 수컷 주제에 감히 우리 딸과 한 침대를 사용하려고 하다니…….”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새고 말았다. 열심히 아빠에게 공격당한 씨엘의 기가 팍 죽자 나는 장한 일을 하고 혼나는 것 같아 궁둥이를 팡팡 두들겨 줬다.
“구래두 씨엘이 길 안내 해조써여.”
“제가 안 죽으려면 널 살려야 하니 그럴 테지. 만약 우리 라피가 잘못되었다면 저놈도 순장 시켰…….”
“크흠흠, 공작님, 아가씨가 듣고 계십니다. 참고로 고대어도 읽으실 줄 아는 분이니 공작님께서 말씀하신 단어쯤은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만.”
뒤에 서 있는 오스카가 헛기침하며 조심히 끼어들었다. 그러자 아빠는 목을 축이며 더는 그 문제를 논하지 않았다.
“산에서 배 꼬르륵 햇눈데 제니가 준 찹쌀똑 때무네 살앗써여.”
“아! 네 시녀가 가방에 찹쌀떡을 넣어 준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그게 없었으면 둘이 굶었을 텐데.”
오빠가 말한 찹쌀떡을 내 가방에 누가 넣어 줬는지 몰랐는데, 궁금한 점이 풀렸다고 말한 아빠는 식사를 끝마치고 차를 마시며 제니를 불렀다. 한쪽에 서서 대기 중인 제니는 조심히 와서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올해 몇 살이지? 이곳에서 얼마나 일을 했나.”
“올해 스물두 살로 이곳에서 5년을 일했습니다.”
“흐음, 아직 경력이 그리 많지는 않군. 이레나! 자네 후임으로 잘 키우게나.”
아빠의 말에 제니의 고개가 팍 올라갔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제니는 오스카의 시선에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염려 마세요. 제가 제대로 교육하겠습니다.”
판테르 공작가의 시녀가 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하인이 아닌 시녀나 시종은 전부 한미하나마 귀족 출신이었는데 귀족이 신원 보증을 서 줘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기에 취업 입구가 매우 협소했다.
한데 그 개미 똥구멍만 한 취업길을 뚫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곳 시녀장의 후임이 되는 건 엄청난 대사건이었다.
미래에 시녀장이 될 수 있는 길이 쫙 펼쳐진 제니는 감동해서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서, 성심성의껏…….”
“우리 라피를 보살피게나. 시녀장이 되어서도 그 임무만큼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될걸세.”
“네, 네! 알겠습니다. 뼈가 부러지고 몸이 조각난다고 하더라도 아가씨를 무슨 일이 있어도 보살피겠습니다.”
또박또박 말했지만 목소리엔 은은한 떨림과 감동이 느껴졌다. 다시 뒤로 물러선 제니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역시 상벌이 확실한 아빠는 본인 할 일이 끝난 듯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슴 빵빵한 아빠의 품으로 옮겨 가려 했지만, 오빠가 놓아주지 않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동생과 우애 좀 쌓아 보겠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제가 곁에 두고 보살피고 싶습니다.”
“뭣?”
“그러길 원해서 라피를 마중 보낸 거 아닌지요. 그럼 전 이만, 라피! 오늘은 뭐 할…… 졸리니?”
오빠의 품에 안겨 있노라니 고개가 제멋대로 꾸벅꾸벅 움직였다.
“우웅, 졸료.”
“그러니까 앞으로는 물 갖다주러 연무장에 오지 마. 알겠지? 그럼 오빠랑 낮잠 잘까?”
“웅, 오빠 품 조아.”
오빠에게 찰싹 달라붙어 말하자 아빠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아니 라피, 아빠 버리는 거니?”
“아빠랑은 밤에 자묜 앙대여?”
“무, 몰론 되지. 크흠.”
그날 이후 내 곁엔 언제나 오빠가 있었다. 밥 먹을 때도 아빠의 눈치 따윈 살피지 않고 먼저 챙겨 줬다. 심지어는 잘 때도 오빠가 옆으로 와서 배를 다독였다.
잠깐 정원에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내 곁엔 오빠가 호위기사처럼 떡하니 존재했다.
“어머나, 우리 아가씨! 찹쌀떡 볼이 그대로라서 다행이에요. 아! 도련님, 좋은 하루 보내시지요.”
나를 보자마자 뽀르르 달려온 고용인들이 먼저 한 마디씩 하다가 뒤늦게 오빠를 발견하고는 얼른 놀라 인사한 후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오빠는 픽, 웃었다.
“예전엔 나한테 먼저 인사했는데…… 이젠 우리 라피가 먼저 보이나 보네.”
오빠의 말에 눈치가 보인 나는 우물쭈물하며 씨엘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이런 게 바로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떡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하는 건가.”
그건 절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오빠의 눈동자와 마주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긋 웃었다. 오빠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