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꼬르르륵-
배꼽시계가 울리자 나도 모르게 번쩍 눈을 떴다. 분명 오빠와 씨엘과 함께 캐츠아이 빛을 보며 걸었다. 그러다가 꿈을 꿨다. 돌무더기 틈으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틈이 서서히 커졌고 내가 내민 손을 아빠가 잡아당겼다.
며칠 만에 아빠의 품에 안긴 나는 행복한 꿈을 꿨다. 그러다가 깨어나 보니 깨끗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눈에 익은 곳인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내 뇌가 정확한 정보를 끌고 오지 못했다.
“우웅, 요긴 오디?”
“아가씨!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레냐?”
“오! 저를 알아보시겠나요? 우리 아가씨, 정말 장하십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눈물범벅인 이레나는 두 눈이 붉게 물들 정도로 울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몸을 일으켜 이레나의 눈가를 소매로 꾹꾹 눌렀다.
“이레냐가 울묜 라삐 술포.”
“저런, 죄, 죄송합니다. 울지 않을게요.”
어린아이는 타인의 감정에 쉽게 동화된다고 했던가. 그럴 나이는 지나긴 했지만, 이레냐가 우니 괜히 울적해진 나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우리 아가씨, 이제 깨끗하게 씻고 꼬까옷 입으실까요?”
“우웅. 담에 씨슬래여. 군데 요기눈…….”
“공작님의 침실이랍니다. 우리 아가씨, 집 나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이곳이 어딘지 잊으신 건가요. 앞으로는 다른 곳에 가지 마시고 계속 이곳에 계셔야 할 것 같아요.”
이레나의 말에 그때야 이곳이 아빠 방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가 주변을 돌아봤다.
“아빠랑 오빠, 오디써여?”
“공작님과 도련님께서는 연무장에 계시답니다. 우리 아가씨, 혹시 그곳에 가고 싶으신 건가요?”
끄덕끄덕-
이왕 이곳에 눌러살기로 한 거 이 집안 후계자한테 잘 보여야 할 것 아닌가. 비록 며칠간 지하에서 헤매며 정을 쌓았다고 한들 빼도 박도 못하게 못을 박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오빠가 공작이 되어도 나를 쫓아내진 않을 테니까.
“오빠 보고 시퍼여. 오빠한테 물 가따줄래여.”
“오! 우리 아가씨, 속도 깊으셔라. 근데 배는 안 고프세요? 일어나실 때 꼬르륵 소리가 들렸는데.”
“갠차나여. 이 정도론 안 주거여.”
“아, 아가씨! 그런 말씀 하시는 거 아니에요. 어휴, 산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를 상당히 짠하게 본 이레나는 곧장 다른 고용인을 시켜 나를 꾸미게 했다. 대충 세수만 한 나는 새 옷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겼다.
“이제 가실까요? 밖에 제니가 물을 들고 있을 거랍니다.”
“니에.”
이레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물컵과 주전자가 올려진 쟁반을 든 제니가 서 있었다. 코와 눈동자가 빨갛게 부푼 제니를 본 나는 방긋 웃었다.
“제니, 나 보고 시펏써여?”
“아가씨, 그걸 지금 말씀이라고 하세요? 제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데요.”
지금이라도 와락 껴안고 싶어 하는 듯한 제니의 열망이 느껴진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본 나는 미소 지었다.
“나두 제니 보고 시펏써여. 이레냐두, 그리고 오쓰랑 벤도 전부 다 보고 시펏눈데 못 봐소 술포해써여.”
“어휴, 우리 아가씨……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으면 벤스 님까지 보고 싶었을까요.”
다들 봐서 기쁘다는 투로 말했건만 제니는 거기에 유머를 더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아가씨, 빈속인데 움직이셔도 되실까요?”
“웅, 오빠랑 가치 잇쓸 때 안 굴멋써여. 제니가 준 찹쌀똑 머것써요.”
“세상에나, 다행이에요. 아가씨께서 안 갖고 가신다고 하셨어도 그냥 넣어 드렸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다니. 정말정말 다행이에요.”
안 그랬으면 찹쌀떡 볼이 홀쭉해져서 속상했을 것 같다며 뒷말을 흐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이번에 나와 오빠가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제니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아빠가 큰 상을 내릴 것 같았다.
“나 얼룬 오빠 보고 시퍼여.”
“그래요. 우리 얼른 가서 도련님이랑 공작님을 놀라게 해 드려요.”
언제 짠하게 나를 봤냐는 듯이 제니의 얼굴엔 장난기가 슬쩍 어렸다.
이레나의 손을 잡고 뽀짝뽀짝 걸어가는 중에 나를 본 이들은 죄다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소매로 찍어냈다. 내 걱정을 상당히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런 그들을 위해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조은 아침이에여.”
“네, 아가씨! 너무너무 좋은 아침이에요. 우리 아가씨 어디 가시는지요?”
“오빠 만나로 가여.”
“그러시군요. 도련님께서 좋아하실 겁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니에!”
손을 흔들며 말한 나는 다시 이레나의 손을 잡고 연무장 쪽으로 향했다. 서서히 연무장과 가까워지는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기합 소리가 커졌다.
“아가씨,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수련하는 거라 무서울 수도 있답니다. 혹시 그렇다면 제 뒤에 숨으셔도 돼요.”
“갠차나여. 혐부네 연무장에 갓따 왓써여. 기사님드리 멋쪗어여.”
불끈한 근육의 움직임이 참 환상적이었던 기억이 났다.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아퀼라 공작저에 갔을 때 일을 떠올린 나는 제니를 돌아봤다.
“물 따라 주세여. 오빠 줄래여.”
“그러실래요? 잠시만요.”
빈 컵에 물을 반쯤 따라 내게 줬다. 두 손으로 물컵을 받아든 나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가득 채워진 컵은 아닌데 움직일 때마다 물이 참방참방 움직여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최대한 조심히 들고 가다가 기사와 대련 중인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오빠, 물 갓고 왓써.”
오빠와 거리가 좀 있었기에 얼른 간격을 좁히기 위해 물컵을 든 채 뛰어갔다.
“라, 라피! 위험하니까 천천히 걸어오…… 라피!”
철퍼덕-
이래서 어린아이는 너무나 불편했다. 분명 안 넘어질 자신 있었는데 뛰다가 내 발에 내가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힘들게 들고 온 물컵 안의 물은 죄다 쏟아졌고, 컵은 바닥을 뒹굴었다.
아, 또 쪽팔림을 느껴야 하는 건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있자 오빠가 급히 달려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 라피, 어디 안 다쳤니? 세상에나. 무릎에 상처 난 것 좀 봐. 우리 호박떡에 지지가 잔뜩 묻었어.”
다친 곳을 입김을 불어 털어내며 내 눈치를 살핀 오빠는 오스카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급히 얼굴과 손등을 닦았다.
“여기 안 아파? 그럼 여긴?”
처음에 몰랐는데 오빠가 가리킨 곳을 보고 있자니 통증이 밀려 들어왔다. 하지만 꿋꿋하게 울지 않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갠차나. 이 정돈 암것두 아냐.”
“다른 애들은 넘어지면 펑펑 울던데 우리 라피는 용감하네.”
내가 울지 않은 게 이상해서 그러나. 오빠의 표정이 묘하게 시무룩하게 보였다.
“근데 여긴 뭐 하러 온 거야. 볼 것도 없는데.”
“오빠, 목 마를까바…… 오빠한테 물 가따주려구…… 군데 다 쏘다버려써.”
그때야 내가 이곳에 물컵을 들고 온 이유를 알게 된 오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나를 꼭 안아 줬다.
“그런 거 안 해 줘도 되는데.”
“오빠눈 낵아 지쿄!”
이왕 쪽팔리는 거 더 팔려도 될 것 같아 호언장담하듯 커다랗게 말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어깨가 들썩였다.
“그럼 아빠는?”
뒤에서 들린 아빠의 목소리에 그때야 이곳에 아빠도 같이 수련 중이라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났다.
“우웅, 아빠눈 젤 쎈대…….”
“아빠도 우리 딸이 지켜 줬으면 하는데.”
뭔가 서운함이 가득한 아빠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눈 낵아 마봅사 대서 지쿄주께여.”
“정말이더냐? 고맙구나. 역시 우리 딸이 최고야. 근데 여긴 왜 왔다고?”
“어, 우우움…….”
오빠한테만 물 갖다 주려고 왔다고 하면 질투할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난 방싯방싯 웃으며 입술에 침을 바르며 말했다.
“아빠랑 오빠, 물 가따주러 와써여.”
역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치는 필수 코스였다.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하는 말에 아빠는 잔웃음을 지으며 나를 꼭 안아 줬다.
“역시 귀여운 딸은 있고 봐야 해.”
“맞아요. 호박떡 같은 동생은 있고 봐야 할 일이죠.”
내 눈치를 본 제니는 얼른 여분으로 가져온 컵에 물을 따라 아빠 품에서 빠져나온 내게 줬다. 두 손으로 잔을 든 나는 아빠와 오빠에게 한 잔씩 건네줬다.
“우리 라피가 줘서 그런지 꿀맛이구나.”
“역시 우리 동생이 최고야. 이런 동생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오려다가 오빠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와 마주치기 싫어서라도 다시 들어갈 것만 같았다. 넘어졌을 때보다 더 쪽팔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빠와 오빠의 쓰다듬을 받아들였다.
“우리 라피, 씻고 온 거니?”
“아녀. 아빠랑 오빠 빨리 보려고 안 씻고 와써여.”
돌아가서 씻을 예정이라는 말에 아빠가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럼 아빠랑 같이 가서 씻자꾸나.”
순간 오빠가 그런 아빠를 흐린 눈으로 봤다.
“우리 라피랑 일전에 같이 씻었으니까. 그때 아빠가 뽀독뽀독 깨끗하게 씻겨 줬잖니.”
“니에.”
“씻고 다친 곳은 얼른 치료하자꾸나. 흉터 생기면 아빠도 볼 때마다 마음 아플 것 같으니.”
다친 것은 다친 건데 소독약이 닿을 때의 쓰라림이 떠올라 나는 움찔했다.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아빠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앞으로는 물 가져다주려고 여기 오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 구운 찹쌀떡에 이렇게 잔뜩 지지 묻었잖니. 지지는 닦으면 되지만 다치면 흉터가 생기니 조심해야지.”
“아가드른 막 구르고 쌈하묜서…….”
“아이들은 구르고 싸움하면서 커도 우리 라피는 안 돼. 어디 누가 감히 내 딸에게 싸움을 걸겠느냐. 그 전에 그놈의 집안을 팍 밟아 버려…….”
“공작님, 아가씨 앞입니다. 언행을 조심하시지요.”
아빠의 말투가 과격해지려 하자 뒤따라오는 오스카가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아빠는 헛기침을 하며 방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라고 했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빠의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홀라당 옷이 벗겨졌다.
오리가 둥둥 떠다니는 널따란 욕조에 먼저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아빠가 뒤이어 들어왔다.
아빠가 욕조 안으로 들어오자 순간 수위가 높아져 가슴까지 닿았다.
“물에 닿은 곳이 아프지는 않더냐.”
“갠차나여.”
“우리 딸은 뭐든 괜찮아서 탈이로군.”
다친 곳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나를 안아 다리 위에 앉혔다. 상처 부위가 닿지 않게 매우 조심히 나를 씻겼다.
나를 전부 씻긴 아빠가 옆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본인도 씻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린아이답게 오리를 가지고 노는 척을 했다.
아빠가 씻는 모습을 보던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적으로 나의 아빠라는 게 안타깝게도 아까웠다. 내가 3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기 전에 먼저 대시했을 텐데 말이다.
핏, 웃음을 터뜨린 나는 요즘에도 아빠에게 오는 청혼서를 떠올렸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 나를 입양했음에도 아빠의 인기는 식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편단심 죽은 부인만 사랑한 아빠는 청혼서를 내 앞에서 불태워 버렸다. 어린아이들은 보면 안 된다고 하면서.
전부 씻은 아빠가 나를 다시 다리에 앉힌 후 잠시 느긋하게 물속에서 여유를 가질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뭐 하는 짓이지?”
“저도 라피랑 같이 씻으려고요. 이 기회에 아버지 등도 밀어 드리겠습니다.”
뭔가 다급한 듯한 오빠의 목소리에 아빠가 뒤돌아봤다. 한 템포 늦게 돌아본 내 눈에 뭔가가 그대로 보이려 했다. 두 눈이 서서히 커지려는 순간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시야를 가렸다.
“저런 건 보는 게 아니야. 지지야. 지지.”
“제 뭐가 지지라는 겁니까. 저 이래 보여도 아카데미 안에서는 알아주는 몸매인데.”
“유진, 네 동생을 너무 어리게 보는 것 같다만. 얼른 수건으로 가릴 것은 가리거라.”
그랬다. 오빠가 안으로 들어올 때 얼마나 급하게 들어왔는지 약간의 실수를 저질렀다. 아빠에게 지적을 받은 오빠는 재빨리 몸을 가린 채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내 옆에 앉은 오빠는 따뜻한 물에 불어 가는 볼때기를 콕콕 찌르며 웃음을 지었다.
“물 속에 좀 앉아 있었다고 벌써 호박떡 볼이 부푼 것 같구나. 매우 바람직해.”
따뜻한 수분을 머금은 내 볼을 잡아 늘리더니 이젠 자신의 볼을 갖다 대고 비비적댔다. 그 모습을 본 아빠가 오빠를 슬쩍 밀어냈다.
“젖어서 부푼 찹쌀떡이 터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욕실에서는 자중하도록.”
“이 정도로 터진다니요. 누가 보면 있는 힘껏 비빈 줄 알겠습니다.”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오빠를 본 아빠는 즉시 나를 안아 올려 품에 안았다. 오빠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 듯했다.
아빠의 가슴에 찰떡처럼 찰싹 들러붙은 상태로 오빠를 봤다.
“오빠도 크면 아빠 달마서 막막 가슴 커져여?”
비록 검술을 배운다지만 아직 아빠의 가슴에 비하면 오빠는 새 발의 피였다.
“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단호한 아빠의 말에 안타까움이 앞섰다. 오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하려는 찰나 아빠는 나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이어 말했다.
“참고로 세라피나의 가슴은 작았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감히 네 몸매를 논할 놈은 없을 테니까.”
아빠의 위로 아닌 위로에 나는 실망감에 젖어 물떡처럼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