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봄 잠에 잠기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에 매료되듯 전부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얼른 나뭇잎을 옆으로 치웠다. 커다란 돌 사이로 들리는 미약한 소리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움직였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본 티그리스 공작은 두 발을 굴렀다. 마법으로 치워 버리면 되지만 제 손주가 관련되자 마법을 컨트롤할 수 없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진, 라피! 거기 있느냐.”
“네, 아버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유진의 목소리에 판테르 공작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줄도 모르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돌을 움직였다.
서서히 틈이 커졌고 그곳에서 캐츠아이를 달고 있는 씨엘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조그만 고사리가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그 손을 본 판테르 공작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얼른 눈물을 떨치고는 조그만 손을 꼭 잡아 올렸다.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한 라피는 처음과 같이 방긋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겨들었다. 하지만 긴장이 갑자기 풀린 걸까. 순식간에 울음을 터트렸다.
“아빠! 왜 이제 와써여. 낵아 올마나 무서벘는데…… 흐아아앙.”
“쉬쉬, 라피, 내 딸……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늦어서 너무 미안하구나.”
라피를 끌어 올린 후 곧장 유진을 구덩이에서 끄집어냈다. 두 아이 모두 건강함을 확인한 판테르 공작은 씰룩이는 콧잔등에 라피의 눈물이 닿자 이내 머금고 있는 눈물을 와르르 쏟아냈다.
“아, 아버지…….”
세라피나가 죽었을 때도 이렇게 감정 표현을 하지 못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냉혈인이라고 여겼던 판테르 공작의 눈물에 유진은 당황했다.
“자, 잘 왔다. 네 동생을 지켰구나. 멋지게 성장했어. 역시 나와 세라피나의 자식이 분명해.”
“아, 아닙니다. 그게…… 저, 저는…….”
평소에 들어 본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에 유진은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 유진을 위해 남은 팔을 벌렸다. 자연스레 든든한 팔에 안겨든 유진은 혼날 줄 알고 잔뜩 쫀 몸이 녹아내렸다.
“잘 왔어. 다행이다. 진심으로 다행이야. 내 새끼들, 너흴 못 볼 줄 알고 이 아비가 얼마나 속을 졸였는지 모를 것이다.”
애간장이 절절하게 타 버린 판테르 공작의 습기 찬 목소리에 유진 역시 저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그 모습을 티그리스 공작과 제롬은 얼른 제집으로 보낼 영상석을 준비했다. 집에서 이곳에 오지도 못하고 발만 구르며 속을 태울 가족들을 위해 마련한 모습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유, 유진? 라피!”
품에 안긴 채 울던 두 아이가 동시에 긴장이 풀리기라도 한 듯 폭 꼬꾸라졌다. 순간 놀란 판테르 공작은 두 아이를 품은 채 소리를 질렀다.
“걱정하지 말게나. 유진과 라피가 긴장이 풀려 기절한 것 같으니. 이때 얼른 워프 게이트로 옮기게.”
“맞습니다. 처남이 기절했을 때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집에 데려가서 아이들의 몸 상태를 체크해 봐야 할 것 같았던 판테르 공작은 모두의 도움을 받아 공작저로 돌아왔다. 다들 걱정했는지 얼굴엔 근심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두 아이의 무사 귀환에 다들 환호성을 지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라피와 유진을 씻긴 후 진찰을 한 엘리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4일간 산에서 지낸 것 치고 건강하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긴장이 풀려서 잠드신 겁니다.”
“저, 정말인가?”
“네, 두 분 다 어리신데 체력 안배를 하신 것 같습니다. 영양 상태도 괜찮고, 무엇보다 저체온증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금방 깨어나실 겁니다.”
엘리오의 호언장담에 판테르 공작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속으로 연방 세라피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아이들을 돌봐 준 것 같았다.
“후우,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 이 녀석들이 잘못되었으면 난 정말…….”
뒷말을 삼킨 판테르 공작은 두 아이의 얼굴을 쓸어 만졌다. 곤히 잠든 아이들은 정말이지 천사 같기만 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당장 처남과 처제를 공격한 놈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찾으면서 습격자 수색도 했지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 버렸네.”
“마법사를 대동하고 있어서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도망가서 마나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네. 마법탑 출신의 마법사가 있었음이 분명해.”
마법사는 두 군데서 양성되었다. 티그리스 공작가와 마법탑. 두 집단은 거의 원수처럼 행동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한들 티그리스 공작가의 출신인 마법사들이 유진과 라피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런 의뢰가 들어온다면 즉시 티그리스 공작저에 알렸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계속 처제가 위험해질 수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당분간은 그럴 수 없을걸세. 세 가문이 아이들을 찾기 위해 나선 것을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게 분명해.”
파멸의 아이를 붙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고 한들 세 가문이 보호하는 아이임을 지금 깨달았을 것이다. 머리란 게 있다면 들쑤셔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버님이 그러하시다면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도와줘서 고맙네.”
“천만에요. 그 전에 우리 인절미 처제의 볼살을 조금만 만져 보겠습니다.”
전쟁 후 전리품을 취한 것처럼 방긋 웃은 제롬은 라피의 통통한 볼을 콕콕 찌르다가 살짝 늘렸다. 쫀득하게 달라붙는 감촉에 힐링이 된 제롬은 진짜 라피임을 확인하고서야 아퀼라 공작저로 향했다.
“나도 가족에게 보고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네. 그리고…… 앞으로는 라피를 자주 우리 집으로 보내게나. 라피의 마나량을 좀 늘려야 할 것 같네. 며칠 전 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만약 라피의 마나가 풍부했다면 워프 스크롤을 찢었을 때 바로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한데 근처 산으로 떨어질 만큼 마나량이 적었기에 티그리스 공작은 라피를 좀 더 강하게 가르치고 싶었다.
“그건 나중에 라피가 깨어나면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자네도 이제 쉬게나. 애들이 깨어났을 때 퀭한 모습으로 있지 말고.”
티그리스 공작마저 나가자 판테르 공작은 두 아이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지키지 못할 뻔한 아이들이 살아 돌아와 다행이라고 연신 생각한 판테르 공작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 두 분께서 무사히 오셨으니 이제 밀린 일을 하셔야지요.”
뒤에서 벤스가 방긋 웃으며 구워서 부피를 부풀린 찹쌀떡 같은 서류를 들고 왔다. 그 모습을 본 판테르 공작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 집안의 가주이자 동부를 호령하는 공작으로서 제 자식들을 계속 보고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남부의 보좌관은 사위 놈이 없어도 알아서 하는데 우리 보좌관은 그러질 못하나 보군.”
“크흠, 상대와 비교하는 것은 나쁜 버릇입니다. 나중에 아가씨께서 친구 아빠가 더 좋다고 칭찬하면 어떤 느낌이 드실 것 같습니까.”
“으음, 안타깝게도 라피의 친구가 될 아이의 아빠라는 놈보다 내가 못날 리가 없잖은가.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아빠이지 않은가. 공작에다가 가슴도 빵빵한 잘생긴 아빠니까.”
판테르 공작의 말에 벤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른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지금도 물떡처럼 부피를 불린 서류를 판테르 공작에게 안겨 줬다.
“라피 아가씨라고 생각하시고 곱게 일 처리를 하시지요. 저도 돕겠습니다.”
부모자식간의 정 대신에 억지로 펜을 쥐게 한 벤스는 판테르 공작의 곁에 섰다.
“정보 누출자는?”
“저희가 찾았을 땐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부검 결과 타살로 판명났지만, 꼬리가 잘려 찾지 못했습니다.”
라피가 유진과 만나는 것이 당일에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에 결정을 했고, 그 소식을 들은 이가 정보를 누출해서 미리 매복한 놈들이 아이들을 습격한 것이다.
“죄송합니다. 빨리 찾았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대신 앞으로는 경계를 철저하게 하게나.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길 시엔 그땐 우리 찹쌀떡 볼을 만지는 것을 금할 것이네.”
“히익! 그런 잔인한…….”
바들바들 떤 벤스는 즉각 호위할 인원부터 늘렸다. 그런 후에야 안심하고 판테르 공작의 보조로 일을 했다. 판테르 공작이 서류를 전부 본 후 가까스로 한숨을 내쉴 때쯤 유진이 깨어났다.
“깨어났느냐.”
“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유진은 제 옆에서 아직도 곤히 자는 라피를 보고는 안도했다. 다행히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동생을 잘 지켰더구나.”
“제가 아니라 라피가 저를 지켜줬습니다.”
유진은 습격을 당했을 때부터 일을 소상히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판테르 공작은 가까스로 진정시켜 놓은 심장이 다시금 거칠게 뛰는 것을 느꼈다.
“라피 때문에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구나. 아버님께서 자꾸 챙겨 줘서 아이 버릇 안 좋아진다고 거절했는데 라피가 몰래 받아서 요긴하게 쓸 줄이야.”
서로 온기를 나누며 식량을 나눠 먹으며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에 판테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누워 있거라. 아직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을 테니.”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어머니께서 남긴 편지…… 보여 주십시오.”
공작의 편지에 세라피나가 남긴 유언이 있다는 말도 적었었다. 유진은 그걸 읽기 위해 방학이 되자마자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다.
「우리 사랑하는 아들 유진에게.
유진, 축하해 주렴. 엄마의 배 속에 아기가 생겼단다. 네가 동생을 원했는데 이제야 그 소원을 들어주게 되어서 다행이야.
그래서 말인데 동생을 보면 꼭 사랑으로 지켜 줬으면 해.
네 동생은 세상을 유랑하다가 이곳이 안전해졌다고 생각하면 돌아올 거니까 낯설겠지만 꼭 안아 주렴. 내 아이를 안아 주고 젖을 물려 줄 수 없어 안타깝지만 그만큼 유진이 안아 주고 입 맞춰 주렴.
유진, 내 아들…… 꼭 멋진 사람이 되어 행복한 가정을 꾸리렴. 엄마가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야. 에리카와도 사이좋게 지내고 아빠와 절대 척을 지지 말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네 아빠처럼 감정을 숨기지 말고 표현해 주려무나.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내 아들, 내 새끼…… 엄마는 다른 이들에게도 편지를 써야 해서 길게 쓰지 못하겠구나.
안녕. 내 아가, 잘 있으렴. 우리 먼 훗날에 보자꾸나.
그땐 부디 충분히 사랑했고 행복했노라고 말해 주길 바랄게.」
툭 투둑-
눈앞이 아른거려 내용이 잘 보이지 않더니 이내 편지 위에 맑은 눈물이 떨어졌다. 힘없이 쏟아진 눈물에 놀라 얼른 소매로 편지를 닦았다.
“방수 처리가 된 편지지니까 울어도 된단다.”
판테르 공작의 말에 유진은 일그러뜨린 얼굴을 편지지로 가린 채 펑펑 눈물을 흘렸다. 우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흔들리는 어깨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유진을 본 판테르 공작이 옆으로 가서 조심히 어깨를 다독였다. 한동안 눈물을 그치지 않던 유진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는지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며 판테르 공작을 봤다.
금안이 붉게 물들었지만 판테르 공작은 제 손수건으로 아들의 남은 눈물을 훔쳤다.
“아, 아버지…….”
“말하려무나.”
“지, 진짜…… 진짜로 라피가…….”
유진이 하고자 한 말이 뭔지 안 판테르 공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엉, 어,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면 나이 들어 보인다고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금세 버릇이 금방 나온 유진이었다.
“우리, 우리 동생…… 진짜로…….”
“그래, 조카님이 가져온 약으로 아버님과 에리카, 그리고 벤스가 있는 곳에서 친자 검사를 했고…… 내 아이, 네 동생으로 판명이 났어.”
그 한 마디에 유진은 판테르 공작의 손수건을 빼앗다시피 해서 패엥- 코를 풀고 라피를 봤다.
“어, 어디서…… 호박떡이 될 때까지 있었던 거야. 오빠 안 보고 싶었어? 오빠는 그런 줄도 모르고…… 보자마자 투덜댄 거 미안해…… 오빠가 나빴어.”
첫인상이 좋지 않았을 텐데 오빠를 지켜 준다고 말한 라피의 말이 떠오르자 가슴 아프게 옥죄고 또한 기쁨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