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나는 잠을 안 잘 수 없는 것인가.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지만 하루 동안 큰일이 펑펑 터졌다. 남들은 긴장하느라 잠을 못 잤겠지만, 오빠 품에 안겨 있었던 나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아주 잠시만 자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깨어나 보니 어느새 구덩이 안으로 한 줄기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오, 오빠?”
분명 잘 땐 오빠 품이었는데 일어나 보니 건초더미 위였다. 놀란 나는 발딱 일어났다. 내 몸을 덥고 있는 오빠의 겉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씨엘!”
항상 내 옆을 지켜 준 씨엘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캐츠아이도 사라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오빠, 씨엘!”
오빠와 씨엘을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순간 혼자 남겨진 두려움과 아픔에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집도 아닌 구덩이에 남겨진 충격은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켰다.
연방 오빠와 씨엘을 불렀다. 여러 번 불렀음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목소리에 서서히 습기가 차오르며 바르르 떨릴 때 뭔가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미야옹.
씨엘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팔짝 뛰어 내게 안기려는 순간 오빠가 녀석을 옆으로 슬쩍 밀어 착지점을 바꿨다.
“이제 깨어났어? 놀랐나 보네.”
“오, 오디갓따가 와써?”
“미안해. 이 구덩이가 어디로 연결되었는지 알아보려고 씨엘이랑 같이 갔다가 네가 부르는 소리에 얼른 뛰어온 거야.”
정말 미친 듯이 뛰어왔는지 오빠의 들숨 날숨이 내 머리카락을 들썩이게 했다. 나를 꼭 안아 준 오빠는 괜찮다며 계속 등을 다독여 줬다.
“마니 무서웟써.”
혼자 남겨진 아픔을 알기에 순간 놀란 나는 오빠를 꽉 붙들었다. 비록 열세 살짜리 오빠였지만 이곳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오아시스나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오빠가 왔잖아.”
나를 안심시켜 주려고 한동안 작게 속삭이며 온기를 내어 준 오빠는 잠시 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빠도 혼자였으면 무서웠을 건데 우리 라피가 있으니까 괜찮은 것 같아.”
“징짜?”
“응. 진짜야. 지켜야 할 존재가 있다는 게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
“흥, 구럼 나도 강해. 오빠, 지쿄!”
“그래그래. 우리 라피도 강해. 네 나이 또래에 이 상황에서 안 울고 버틴 것만으로도 용하지.”
안정을 찾은 나를 옆에 둔 채 오빠는 구덩이에 연결된 통로를 살핀 감상을 읊었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크기의 통로가 계속 쭉 이어져 있다고 한다.
역시 이곳은 반 황제파가 주둔해서 활동했던 게 맞는 것 같았다.
“씨엘의 머리에 캐츠아이를 달아서 갔다가 왔어. 나는 계속 가 보고 싶은데 라피는 여기에 계속 있고 싶어? 네가 가기 싫다고 하면 오빠도 여기 남아 있을게.”
내게 결정권을 준 오빠의 말에 잠시 생각해 봤다. 이곳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가족을 기다릴 바엔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자. 오빠.”
어제까지 복면인에게 쫓겼다. 한데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철수를 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기척을 숨긴 채 우리를 찾으러 다니는 게 분명했다.
“근데 앞에 벌레 같은 게 좀 많이 있긴 한데 괜찮겠어? 오빠한테 업힐래?”
“우웅, 다리 아푸면 그때 어빵해져.”
“그래. 그러도록 하자. 그럼 이만 가실까요. 공주님?”
“나 공쥬님 아뉜데. 공쥬님은 삐나 언냐야!”
“비나 언니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가자. 자! 오빠 손잡아야지.”
어젠 그렇게 싫은 티를 내더니 갑자기 성숙해진 듯한 오빠의 손을 봤다. 그 어느 때보다 듬직하게 보이는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아직은 덜 여문 손이 오므라지며 내 손과 얽혔다.
“가자.”
“웅.”
씨엘의 머리에 매단 캐츠아이에 의존해 어둠 속을 파고들었지만 나는 그렇게 많이 무섭지는 않았다. 옆에 오빠가, 그리고 앞엔 씨엘이 있었다.
아빠가 그립고 보고 싶었지만, 이때만큼은 꾹 참고 말하지 않았다. 걷다가 지치면 잠시 앉아서 쉬었다. 쉬다가 꼬르륵 배꼽시계가 울리면 가방에서 꺼낸 구운 찹쌀떡을 먹으며 버텼다.
아가페가 챙겨 준 주스 한 병을 나눠 마시며 갈증을 해결했다.
“오빠, 머거.”
“난 충분히 마셨으니까 라피가 마셔.”
오빠가 준 주스 병은 여전히 무거웠다. 처음과 같은 내용물의 양을 본 나는 오빠가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빠, 요거 주스라서 오래 대면 상해.”
“어? 으, 응.”
“구니까 머거.”
“아…….”
생수가 아닌지라 주스는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괜히 안 마시고 있다가 상해서 버리면 아까우니까 오빠에게 다시 주스를 건넸다. 그때야 겨우 한 모금 꿀꺽 삼킨 오빠를 보고는 나도 한 모금 마셨다.
비록 성인보다 먹는 양이 작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먹을 것을 최대한 조금씩 섭취했다. 언제 이곳을 나갈지 모르니 말이다.
가다가 다리가 아프면 쉬고, 씨엘이 멈추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연하듯이 서로 부둥켜안았다.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추운 곳에서 버텼다.
절대 언제쯤이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데 오빠라고 알 리가 없었다. 곧 있으면 나가서 맛있는 음식 실컷 먹을 수 있다고 오빠가 독려했다. 작은 희망이라도 생각하며 버티라는 의미일 것이다.
며칠째 이곳을 걷고 있는지 모른다. 이 길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첫날에 본 뱀 같은 파충류나 독충은 보이지 않았다.
“어빵할래?”
“시러, 오빠 힘드러.”
“오빠는 오빠라서 괜찮아.”
오빠가 등을 내보이며 몸을 숙이려 할 때 앞에 있는 씨엘이 평소와 달리 울부짖었다.
냐옹, 냐아앙, 냥냥.
뭔가를 갈급하게 가리키는 듯한 울음소리에 나와 오빠는 씨엘의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미약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우리를 찾는 복면인이면 어쩌지 싶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봄바람처럼 스몄다.
“당장 내 새끼 찾게! 그 어린 것들이 이 험한 산속에서 아직도 오들오들 떨고 있다고 생각하면 여길 다 불살라 버리고 싶으니.”
“이대로 우리 새끼들 놓치면 난 딸 볼 낯이 없단 말일세! 얼른 안 찾고 뭐 하나!”
“우리 인절미 처제는 처남에게 딱 달라붙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얼른 뛰어! 에리카와 콜린이 처제랑 처남 찾기 전엔 오지도 말라고 했단 말일세!”
* * *
유진과 라피 실종 보고를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판테르 공작은 억지로 문을 연 듯한 마차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과 아가씨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본디 맥스는 문관 출신으로 검술은 사교용으로만 배운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연락을 했다는 것에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아닐세, 자네 잘못이 아니야. 자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후우, 미치겠군.”
이 마차에 타고 있어야 할 남매의 부재는 판테르 공작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사이좋게 오는 것은 바라지 않았지만 이리 동시에 사라져 버릴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들을 같이 보냈을 것인데. 설마하니 제 영역에서 이런 일이 터질 줄은 생각하지 못한 판테르 공작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마차를 살피는 내내 맥스에게 상황 보고를 들으며 이를 사리물었다.
“이 새끼들을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세라피나가 하늘로 갔을 때 황궁에 찾아가서 황족과 대신관을 도륙해 버렸어야 했다. 한데 살려 둔 게 이렇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분명 기사급 실력이었습니다.”
“멍청하긴, 이런 일엔 기사가 아니라 암살자를 파견했어야 뒤가 깔끔할 건데. 그런 멍청이를 받드는 것들도 불쌍하군.”
한밤중이었지만 캐츠아이를 줘서 기사들에게 주변을 샅샅이 뒤지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기에 애간장이 타들어간 판테르 공작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무너지더라도 아이들을 전부 찾은 후에야 가능했다.
“당장 북부와 남부에 연락을 넣게나.”
한밤중이라 연락을 받은 이들이 내일 아침에야 말을 전해 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도 판테르 공작은 마음이 급해서 미리 연락하게 했다.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 거지? 아이들이 어떻게…….”
“마법 스크롤을 찢었을걸세.”
“아버님?”
한밤중이라 이곳에 오지 못할 것으로 여겼던 티그리스 공작을 본 판테르 공작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라피에게 혹시 몰라 이것저것 챙겨 줬는데 그중 워프 스크롤도 있었네. 분명 저를 붙잡으려고 하자 스크롤을 찢었을걸세.”
“그렇다면…….”
“아마도 멀리 이동하진 못했을 것 같군요. 마나량이 충분해야 멀리 움직일 수 있는데 우리 인절미 처제의 마나는 쥐꼬리만 하니 분명 이 근처 어딘가로 이동했을 겁니다.”
제 말을 방해한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니 제롬이 휘하의 기사들을 이끌고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 온 듯했다.
“이곳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리고 자네도 고맙네.”
“고마울 것도 많군. 난 당연히 내 새끼들을 찾으러 온 것일세.”
“아버님, 저 얼른 우리 인절미 처제랑 유진 처남을 찾아야 합니다. 밤에 연락받고 에리카와 콜린에게 쫓겨났습니다. 찾기 전까진 집에 오지도 말라고 하더군요.”
본인 집인데 쫓겨났다며 투덜거린 제롬은 표정을 굳히며 라피와 유진을 찾기 위해 기사를 모았다.
“초반이었으면 워프 스크롤과 연결된 라피의 마나의 움직임을 낚아채 대충 어디로 이동했을지 알겠지만, 지금은 알 수 없네. 그러니 직접 몸으로 부딪쳐 보지.”
자연스레 지휘는 판테르 공작이 맡게 되었다. 맥스와 부상당한 기사들은 무조건 치료받으라 명을 한 판테르 공작은 근처부터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커리큘럼을 보면 아직 유진 도련님은 생존과 관련된 수업을 받진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합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네.”
카이의 말에 안 그래도 돌아 버릴 것 같은 이성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대로 세라피나가 낳은 두 아이를 잃을 수는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찾아야만 했다.
“그놈들은 아마 진즉 철수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놈들의 흔적보다는 처제와 처남을 찾는 것을 중점으로 두는 게 낫습니다.”
그놈들도 한 줌 제정신을 가지고 있더라면 판테르 공작이 아이들을 찾으러 올 걸 알고 도망갔을 것이다.
“으음, 전 이쪽을 뒤지겠습니다. 아버님은 저쪽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자네는…….”
일을 분담한 셋은 곧장 아이들을 찾기 위해 수색 인원을 데리고 각자의 구역으로 향했다.
“라피, 유진! 어디 있는 것이더냐.”
애가 타게 외치고 또 외쳤지만,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목소리가 쉬고 목구멍이 부어올라 더는 소리를 내는 게 힘들었지만 판테르 공작은 쉼 없이 외쳤다.
“우리 쪽은 없네. 그러니 이제 저쪽을 같이 뒤져 보세나.”
벌써 4일이 지났다. 아이들이 산속에서 4일간 살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세라피나…… 안 돼. 외롭더라도 아이들은 나중에 데려가 줘. 대신 나를 데려가. 제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판테르 공작을 본 티그리스 공작이 괜찮을 거라며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힘내 봅시다.”
에리카와 콜린에게 통신석으로 신나게 혼난 재롬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제대로 씻지도 자지도 못해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다들 아이들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오전 수색은 성과 없이 끝났다. 아이들은 굶고 있을 건데 점심을 먹는 것도 너무 미안할 지경인 판테르 공작은 수색 인원들을 다독였다.
서로를 독려하며 잠시 쉬다가 다시 수색을 하며 외칠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냐오옹-
라피가 데리고 다니는 고양이 소리를 들은 이들은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뭇잎과 돌로 가려진 작은 둔덕이 들썩이며 그토록 원하고 그리워 가슴 설렌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하부지, 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