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오빠의 배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빈 위장을 타동하는 공기 소리에 나도 모르게 오빠를 봤다.
“배고파?”
“그러는 넌 안 고파?”
“나도 배고파.”
“하아,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식량을 따로 챙기지 않았어.”
식량을 실은 마차가 있었지만 귀족가의 자제인 오빠가 식량을 따로 넣은 가방을 들고 다닐 리가 없었다.
“여기에서 먹을 걸 구하는 건 힘드니까 아버지가 우릴 찾으러 오기 전까지 기다리자.”
언제 올 줄 알고? 아빠가 이 산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이 근처에 산이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운 좋게 아빠에게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그땐 피골이 상접할 것 같았다.
최대한 움직이지 않기 위해 한쪽에 앉은 오빠는 나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품에 안았다.
“산의 밤은 추우니까 이렇게 있는 게 나을 거야.”
안 그래도 슬슬 한기가 들어 오슬오슬 떨리던 참이었다. 오빠의 품에 안긴 나는 바르르 떨며 씨엘을 붙잡았다.
“오빠, 아까 비암이 사라진 곳에 길이 잇찌 안을까?”
상당히 커다란 뱀이 하늘로 솟을 리는 없었다. 캐츠아이로 밝히지 않은 어둠 속으로 도망갔다. 그렇다는 것은 길이 뚫려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곳이 반 황실파의 본거지였다면 함정용으로 구덩이만 파 놨을 리는 없었다. 분명 어딘가로 이어져 있을 확률이 높았다. 황실파의 기사들에게 발각이 되지 않으면서 이 산을 침입한 이들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라면 말이다.
“흐음, 네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닌 것 같아. 한데 아직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런 걸 잘 아는 거지?”
순간 뜨끔한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차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어느 정도 살다가 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비밀로 한 일을 꾹꾹 눌러 담은 나는 가방을 뒤적였다.
“가방에 대체 뭐가 있기에…… 나참. 하여튼 너 때문에 내가 할 말이 없다.”
내 손엔 떡이 떡하니 들려 있었다. 혹시 몰라 이것저것 넣을 때 제니에게 간식으로 먹을 만한 것을 챙겨 달라고 했다. 그때 제니가 준 구운 찹쌀떡이었다.
구운 찹쌀떡을 보기도 싫다고 했지만, 제니가 억지로 가방에 넣었다. 혹시 모르니 마차를 타고 오면서 씹으라고 넣어 준 구운 찹쌀떡은 고소한 향을 내뿜었다.
꼬르륵 꼬륵-
오빠와 내 배가 찹쌀떡을 보자 다시금 요동쳤다.
“오빠, 머거.”
“그래. 먹자. 같이.”
오빠가 찹쌀떡을 잡고 자르려고 했지만 그게 쉽게 잘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쭉 늘어나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찹쌀떡을 오빠 한 입, 나 한 입 야금야금 씹어 먹어야만 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평소엔 떡 근처에도 가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구운 찹쌀떡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해서 더 맛있게 느껴졌다.
찹쌀떡 하나를 둘이 다 먹고 나서야 가까스로 위장이 진정되었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우리가 찹쌀떡을 먹는 동안 씨엘은 내 품에서 벗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자체 사냥을 하려는 듯했다. 그것까지 막을 수 없었던 나는 오빠 품에 안겨서 한기를 참아내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씨엘의 배가 통통해 보였다. 뭔가를 실컷 잡아먹고 온 듯한 씨엘은 오빠 옆에 앉아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하니 이 녀석이 불침번이라도 설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친다고 했던가. 씨엘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와 오빠가 꾸벅꾸벅 졸 때도 두 눈을 부릅뜬 채 사방을 지켜봤다.
“으음, 고양이의 청력이 개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니, 오늘은 이 녀석에게 밤을 맡기는 게 좋겠어.”
“웅? 씨엘이 귀 조아?”
“응, 네가 기르는 고양이니 뭔가 이상함이 느껴지면 바로 소리 내어 알려 줄 것이야. 그럼 내가 일어나서 대응하면 되는 거고.”
어린아이인 나는 한 번 잠에 빠져들면 지도를 그려도 쉽게 일어나지 못하리란 것을 오빠가 아는 것 같았다. 오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씨엘에게 말했다.
“씨엘, 구롬 부타케.”
냐옹.
내가 뻗은 손에 제 머리를 비비적댄 씨엘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캐츠아이를 둔 채 나는 눈을 감았다. 산에서 움직이느라 체력의 한계가 느껴진 나는 오빠의 품에서 비비적댔다.
“우웅, 졸료.”
“졸리면 자. 지켜 줄게.”
“우웅.”
열세 살짜리 오빠였지만 그 말이 참 듬직하게 들린 나머지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제 품에 안겨 편히 잠든 라피를 본 유진의 눈동자에서 서서히 날카로움이 무뎌졌다.
“나 참, 어디서 이런 호박떡 같은 게 굴러떨어져서는.”
라피를 품은 유진은 조심스레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제가 쓰다듬는데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은 라피의 소식을 전한 편지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기숙사로 향했다. 제 방으로 들어가 편히 쉬려고 할 때 갑자기 기숙사의 하인이 뭔가를 급하게 가져왔다.
“뭐야. 동시에 세 개?”
동부와 남부 그리고 북부에서 보낸 편지가 동시에 손에 쥐여줬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던 아버지의 편지를 먼저 개봉한 유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아이를 호적에 올렸다고? 그것도 누님이 허락을 해서? 말도 안 되는…….”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그저 에리카가 승낙해 여자아이를 판테르 공작가의 호적에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당장 항의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에리카가 승낙해서 호적에 올렸다는데 제가 떼를 쓰며 파양하라고 한들 아버지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떼를 쓸 나이도 지났고 말이다.
아버지가 보낸 짧은 편지를 접어 둔 유진은 이번엔 에리카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아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그리고 어머니가 한 말을 똑같이 했어?”
우연의 일치라고 여겼다. 평소 에리카가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아는지라 조금 닮은 아이마저 거두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가에서 보낸 편지를 읽었다. 평소에 무뚝뚝한 성격의 유진은 외할아버지가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해도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그저 묻는 말에 간단하게 대답하고 돌아설 뿐이었다.
마법사의 길을 걷지 않아 서운하다는 말을 몇 번 했지만, 마법 멀미를 한 유진이 마법을 배울 리가 없었다.
“하아, 외가마저도 이 아이가 홀린 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머니를 쏙 빼닮은 말랑 콩떡이라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외할아버지인 티그리스 공작의 편지에 유진은 이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나, 대체 어떤 아이이기에 이 세 집안을 휘어잡은 거지? 웬만해서는 한 곳도 뚫기 힘들 텐데. 그 정도로 어머니를 쏙 빼닮은 건가.”
단순히 어머니를 닮은 것으로 세 집안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는 것은 어려울 게 분명했다. 일개 집안도 아니고 무려 공작가였다. 공작이란 사람들이 여자아이 한 명에 환호할 리가 없었다. 얼마나 경계심이 특출한 곳인데.
“세 살짜리가 유혹술이라도 배운 건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첩자로 교육해서 보낸 건가.”
아무리 그랬다고 하더라도 세 집안에서 동시에 인정받기는 힘들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소식을 동시에 전한 편지를 본 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직접 가서 보면 되겠지.”
“대체 아까부터 혼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기숙사 룸메이트의 물음에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한테 여동생이 생겼다는데?”
“그래? 판테르 공작님이 언제 재혼하신 거야?”
“그건 아니고 세 살짜리 여자애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딸로 삼았다고 연락 왔어.”
유진의 말에 룸메이트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하더니 뭔가 결론이라도 내린 듯 입술을 열었다.
“예뻐?”
“몰라. 생긴 게 구운 찹쌀떡, 말랑 콩떡, 그리고 인절미 같다고 하네.”
모든 것을 떡으로 통일한 세 집안이었다. 유진의 말을 들은 룸메이트는 픽, 웃었다.
“떡같이 생겼다니 참 귀엽겠다. 나중에 동생이 여기 오면 보여 줘.”
“됐거든. 난 아직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았단 말이야.”
룸메이트가 아이를 보여 달라는 말에 괜히 기분이 나빠진 유진이었다. 그날 이후로 룸메이트는 계속해서 동생 보여 달라고 안달했지만, 유진은 그때마다 철벽을 쳤다. 저도 안 본 아이인데 보여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가 방학이 되자 유진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집안에 연락했다. 조만간 집에 가겠노라고. 그러자 아버지는 다른 사실을 알려 줬다.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빛의 속도로 짐을 쌌고 동부로 향했다.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몰래 동부로 이동 중이었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괜찮았지만, 외부에서 동부에 원한이 있는 이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동부 초입에 들어서자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가 마중을 나왔다. 이번엔 맥스 워렌 후작인가.
평소엔 다른 사람을 보냈는데 워렌 후작을 보낼 정도로 저를 그리 아끼나 싶었다. 하지만 뒤이어 보인 여자아이에 유진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똑같은 은발에 금안을 지닌 아이였다. 그냥 봐도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딱 박아 놓은 듯한 아이는 수줍음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안농, 오빠! 라삐라고 해. 글고 얘눈 씨엘이야.’
첫 만남부터 대뜸 오빠라고 부르는 라피는 어린아이 같지 않았다. 마치 십 수 년을 살다가 어린아이 몸에 빙의라도 한 어른 같기만 했다.
목소리는 어린애였지만 말하는 게 성인 수준이었다. 그걸 애써 숨기려고 말을 짧게 잘라 말하는 라피를 처음 본 유진은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졌다.
어머니와 너무 많이 닮아서인가. 아니면 세 가문이 동시에 인정한 아이라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면 고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해 보지 않은 아이의 해맑음이 부러워서인가. 확실치는 않았다.
잠시 지나간 생각을 한 유진은 제 품에 안겨 곤히 잠든 라피를 봤다. 지금 가장 확실하게 제가 해야 할 일은 판테르 공작가의 호적에 오른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제 어미는 지키지 못했다. 당시 열 살이었던 유진은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다가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마법 멀미조차 이겨내고 바로 워프 게이트를 통해 힘들게 집에 도착했지만, 어머니는 관속에 누워 계셨다.
배 속에 있는지도 모를, 태어나지도 못한 제 동생을 품고서.
그 동생이 태어났으면 라피 또래였을 터이다.
“어머니가 내가 아플 때마다 주문을 외워 주셨는데…… 역시 넌 어머니의 딸인 걸까?”
아플 때마다 ‘아픈 거 아픈 거 다 날아가라.’라고 주문을 외워 주시면 다음 날 거뜬하게 일어날 수 있었던 유진은 라피의 주문을 떠올렸다. 너무 오랜만에 들은 말에 울컥했다.
“후우, 넌 대체 어디에서 살다가 세 살이 되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거니? 설마하니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 품에서 3년 만에 떨어져 나온 건 아니겠지?”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냥 지어낸 말이라고 하기엔 라피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아이라 파멸의 아이라고 칭한 황실과 신전에서 아이를 데려와 죽이려 했다는 것도 모르진 않았다.
“파멸의 아이치고 너무 작고 하찮잖아.”
아직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는 제 품에 안겨 곤히 잠들었다.
“우웅, 오빠눈 낵아 지쿄…….”
라피의 잠꼬대를 들은 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술 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가 날 지키려면 아직 멀었다니까 그러네.”
제게 처음으로 오빠라고 불러 준 라피를 소중하게 품었다. 어머니를 지킬 수 없었던 열 살의 어린 유진은 이제 열세 살이 되어 정체불명의 동생을 지켜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