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58)화 (58/164)

58화. 

유진이라면 세라피나를 닮은 라피를 좋아할 것이라고 여겨서 아이를 마중 보냈다.

“이런 건 제 어미를 안 닮았다니 참 아이러니하군.”

어느 누가 마법사 가문을 외가로 둔 유진에게 마법 멀미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유진이 지금보다 어렸을 때 뭣 모르고 워프 게이트를 타고 황도로 간 적이 있었다. 

그날 갑자기 녀석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구토를 하고 곧 죽을 것처럼 축 늘어져 의사를 불렀다. 그리고 그때야 유진이 마법 멀미가 매우 심한 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도에 갈 땐 매우 편하게 갔지만 돌아오는 길은 매우 길고 험난했다. 어린 유진을 안은 세라피나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잠시 행복한 시절을 떠올린 판테르 공작은 지금쯤이면 라피가 유진을 만났을 거라 여겨 통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이 연결되지 않았다.

“통신구가 고장 났나? 그럴 리가 없는데.”

맥스에게 최상급의 통신구를 줬기에 고장이 날 리가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판테르 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질 때마다 마법사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밤이 되어 갈 무렵 통신구가 반짝하며 빛이 났다.

“라피? 대체 뭘 했기에 이리도 늦게 통신이 된…….”

라피와 유진이 싸우기라도 한 건가 싶어 말하던 판테르 공작은 곧장 말을 멈췄다.

[고, 공작님! 다, 당했습니다.]

피를 질질 흘리는 맥스가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와 동시에 판테르 공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당장 기사들을 소집하라. 유진과 라피가 습격을 당했다.”

* * *

갑자기 발밑이 푹 꺼졌고 우린 그대로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푹 빠졌다. 찰나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 오빠?”

“왜 불러.”

“오딧써?”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오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가 잔뜩 무거운 공기를 타고 귓가에 흘러들었다.

“네 밑에.”

“웅? 앗! 오빠, 갠차나?”

그때야 고개를 내려 보니 오빠의 등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떨어졌는데 안 아프더라. 얼른 후다닥 일어나자 그때야 오빠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후우, 물에 불린 찹쌀처럼 무겁기도 하지.”

“나 가뵵거든! 혐부가 깃톨보다 가뵵다고 햇써. 글고 인졸미라고 햇써.”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치켜든 나를 본 오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형이 상한 인절미를 먹고 헛소리한 거겠지. 누님한테 잘 보이려고 너한테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했나 보네.”

“아뉜데, 징짠데.”

“어 그래. 그렇다고 해 줄게.”

마지못해 말한 뉘앙스를 풍긴 오빠는 고개를 들어 위를 봤다. 햇빛이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위를 보고 있노라니 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진 듯했다.

“군데 오빠, 안 아포?”

저 정도 높이에서 나를 업은 상태로 떨어졌으니 충격이 상당할 것이다. 거기다가 나 때문에 낙법을 못해서 바닥에 닿을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제 몸으로 받았을 게 분명했다.

“난 대 판테르 공작가의 남자이다. 겨우 저 높이에서 떨어졌다고 다치거나 아파하는…… 윽!”

오빠가 당당하게 말하고 있을 때 손으로 가슴을 툭 치자마자 앓는 소리가 터졌다. 몸을 움츠리며 얼굴을 찡그리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은 나는 가방에 손을 넣었다.

뒤적뒤적-

“여깃다.”

“그건 뭔데?”

가방에서 꺼낸 것을 오빠의 손에 던졌다.

“오다가 주엇써.”

“너…… 이게 얼마짜린데 오다가 주웠다는 거야.”

본인 손에 든 물건을 본 오빠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징짜야. 오다가 주엇써. 오빠가 써.”

무심한 척 말한 나는 오빠가 힐 파스를 가슴에 붙이는 것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빠 말대로 힐 파스는 고가인 편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저택 한두 채값이 붙을 정도로 비싼 편은 아니었다.

힐 마법이 걸려 있어서 가벼운 부상을 당한 곳에 붙여 주면 몇 시간 내로 나을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일전에 할아버지가 워프 스크롤을 줄 때 혹시 모르니 몇 개 더 챙겨 넣어 준 물품이었다.

집 안에만 있어서 구른다고 하더라도 힐 파스를 붙일 정도로 다치지 않을 거라고 거절했다. 그런 내게 할아버지는 폭신한 침대에서 굴러도 다칠 것 같다며 가방 속에 욱여넣어 주셨다.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위기에서 벗어난 나는 앞으로는 주는 대로 무조건 챙기자고 다짐했다.

힐 파스를 붙였지만 바로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아픔이 가실 터였다. 그렇기에 아직도 미간을 찡그린 오빠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자그맣게 주문을 외쳤다.

“아푼고, 아푼고 다 나라가라!”

“…….”      

“좀 잇쓰묜 안 아플꼬야.”

좀 귀여운 척한다고 주문을 외웠는데 어이없었는지 오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이 닿은 가슴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군데 요기 구덩이 누가 팟을까.”

자연적으로 생긴 구덩이는 절대 아니었다. 주변 돌을 보니 날카로운 무언가로 찍어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금속으로 만든 연장으로 쪼갠 게 분명했다.

혹시 사냥용으로 파 놓은 건가 싶었지만 높이가 사냥꾼이 빠져서 나가지도 못할 정도였다. 

“으음,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황실에 반기를 든 이들이 활동한 본거지였댔어. 그들이 이런 구덩이를 파 놓은 게 분명해.”

얼마 전에 교과서에서 봤다면서 배운 내용을 읊은 오빠였다. 이곳이 오래전에 반 황실파의 주둔지였다나 어쨌다나. 결론은 이곳에서 최후 항전을 했기에 이런 구덩이가 있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가 한 말이 뭔지 이해는 하고 끄덕이는 거니?”

“웅, 요기서 싸우묜서 구덩이를 팟다. 이런 고?”

오빠가 몇 분을 읊은 내용을 단 한 줄로 요약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지금은 여길 탈출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겠군.”

위로 올라가기엔 너무나 가팔랐고 높았다. 내가 마법만 제대로 쓸 수 있으면 플라이를 써서 날아오를 수 있을 텐데. 마나가 극미하여 번번이 플라이 마법을 실패한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열세 살짜리 오빠한테 가파른 절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을 기어 올라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여기에서 우릴 찾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말 그대로 깊게 파인 구덩이었다. 아빠가 이 산으로 오리란 법도 없었다. 이러다가 여기에 갇혀서 굶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오빠, 우리 이제 오또케 해?”

“글쎄, 지금 당장 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그놈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법은 없어. 이대로 우리 안전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야.”

이대로 마냥 기다리자는 말에 나는 토를 달지 않았다. 대신 미약하게 새어 흘러나온 빛이 사라지려 하자 오빠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산은 밤이 일찍 찾아온다고 하더니 서서히 날이 저물었다.

복면인이 우릴 찾지 못할 확률이 높았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위험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구덩이에 우리만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 예로 뭔가 붉은 빛을 내는 무언가가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오빠…….”

잔뜩 굳은 나는 한 손으로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그때야 내 쪽으로 시선을 옮긴 오빠는 숨을 들이마시며 이를 꽉 깨물었다. 

어둠에 파묻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는 공포로 다가왔다. 복면인보다 더 무서운 무언가가 스르륵 가까워지자 오빠는 왼쪽으로 손을 옮겼다.

검을 잡으려고 할 때 이제껏 얌전히 있던 씨엘이 앞으로 나섰다. 솜방망이질밖에 하지 못하는 발을 들이미는 녀석이 앞에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보다 하찮게 보였다.

씨엘이 나설 곳은 절대 아니었다. 얼른 씨엘을 붙잡기 위해 손을 내밀기보다는 우선 어둠을 물리기 위해 다시 가방을 뒤적였다.

최소한 앞에 있는 게 뭔지는 알고 나서야 할 것 같았다. 뒤적이던 손에 매끄럽고 동글동글한 게 닿자 얼른 꺼냈다.

“네 가방에 대체 없는 게 뭐니?”

캐츠아이-

빛이 사라진 밤에도 고양이 눈처럼 빛나는 희귀한 보석이었다. 이것 또한 밤에 쉬하러 가다가 이불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고 할아버지가 챙겨 주신 보석이었다.

“요고 하부지가 줫써. 근디 지금 구게 문제가 아닌 거 가타.”

씨엘이 하찮은 솜방망이질을 하는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검은 뱀이 가느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뱀은 혀로 냄새를 맡는다고 했던가. 동물의 왕국에서 언뜻 들은 기억이 났다. 그렇다고 당장 저 주둥이를 구워 버릴 형편이 되지 못한 나는 오빠를 봤다. 오빠 역시 커다란 뱀을 보고 잠시 놀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오오옹!

조그만 씨엘의 울음소리조차 매우 하찮게 들렸다. 제 몸의 몇 수십 배나 큰 뱀을 상대로 자살을 생각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쉭 쉬쉭-

뱀이 제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저런 커다란 뱀은 독으로 죽이지 않고 사냥감을 몸통으로 조여서 죽인 다음에 한 입에 꿀꺽한다고 하던데.”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한데 굳이 지금 이 상황에서 꺼낼 내용은 아닌 듯싶다. 씨엘 정도면 간에 기별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나 아니면 오빠를 노리고 달려들 게 분명했다. 

위험한 상황임에도 오빠는 절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모습으로 나를 뒤로 밀쳤다. 그러더니 검을 꺼냈다.

아까도 그러더니 기사 교육을 받는답시고 기사도 정신에 입각해 나를 뒤로 숨겼다. 그렇지만 만약 오빠가 저 뱀에게 먹히면 다음 목표물은 나였다. 

이곳에서 도망가지도 못한 채 저 뱀이 먹이를 다 소화할 동안 공포에 떨다가 한입에 삼켜지는 것은 절대 싫었다.

“비암 시르다…… 아빠, 온제 와여! 아빠, 언냐…….”

파충류를 좋아하는 아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소름 끼치게 생긴 커다란 뱀을 본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른 아빠가 와 줬으면 했지만 그런 바람이 바로 이뤄질 리가 없었다.

아무리 이곳이 판타지 세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럴 땐 좀 개연성을 말아 먹어도 될 것 같은데 현실은 언제나 그렇듯 시궁창이었다.

오빠의 옷자락을 꽉 붙잡을 때 앞에서 당당히 자살 쇼를 하듯 씨엘이 울부짖었다. 분홍 젤리 발바닥으로 바닥을 탕탕 두들기며 날카롭게 벼린 황금색 눈동자로 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야오오옹!

너무 하찮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데 씨엘의 경고성 울음소리에 앞으로 달려들려던 뱀이 순간 흠칫했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씨엘을 앞에 두고 뱀은 목적을 잃은 듯 갈팡질팡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으르르릉.

응? 방금 고양이가 으르르릉 하며 맹수가 내는 소리를 낸 거 맞나?

쥐도 코너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씨엘도 그런 건가 싶었다. 털과 꼬리를 바짝 세워 몸을 부풀린 씨엘이 소리를 지르며 하찮은 작은 송곳니를 보이자 뱀이 혀를 쏙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방금까지 보인 공격성은 어디로 보냈는지, 뱀은 그 길로 도망가 버렸다. 

뭐지? 갑자기 이 허무해지는 상황은?

어이없는 모습에 나는 개선장군처럼 의기냥냥한 모습으로 내게 달려온 씨엘을 꼭 안았다. 그 모습을 본 오빠도 반쯤 뽑았던 검을 집어넣었다.

“이 고양이…… 혹시 전설 속의 드래곤이 변한 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절때 아냐.”

전설 속의 드래곤이 쉬 하려고 자리를 옮기다가 데굴데굴 구른 내 궁둥이에 깔릴 리가 없었다. 하지만 커다란 뱀이 고작 씨엘의 하악질에 도망갔다니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우선은 안도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을 위협하던 뱀이 사라지자 2차적인 위험이 다가왔다.

꼬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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