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자고로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튀는 것도 한 가지 방법 아니겠는가. 판테르 공작의 딸로서 자존심 구긴 채 도망갔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살고 봐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역사는 살아남은 자에 의해 적히니까.
“헥, 으허억.”
얼마 전에 할아버지가 모나코 후작에게 뜯어낸 배상금을 내게 준 적이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젤리 같은 게 잔뜩 들어 있는 것을 보며 햄 볶을 때 할아버지가 선물이랍시고 더 챙겨 줬다.
이젠 내 엄마가 된 존재에게 해 주지 못한 것을 전부 내게 해 줄 심산인지 저택 한 채값에 해당되는 스크롤 뭉치를 몰래 넣어 줬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대비하는 게 좋을 거란다. 이건 워프 스크롤이니 혹여 위험한 일이 생기면 네 어미처럼 혼자 전부 책임질 생각하지 말고 바로 튀거라.’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인해 나는 복면인의 손을 피해 가까스로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몸 안에 쌓인 마나가 극미하여 멀리 도망가지는 못했다. 이 세계에서는 마법 스크롤이란 게 가지고 있다고 개나 소나 다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몸에 마나가 있어야 가능했다. 이제 수련하는 중인 이 비루한 몸뚱이에 마나가 넘쳐흐를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워프 스크롤을 입으로 문 채 한 손으로 멋지게 찢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좌표 설정이 된 스크롤이라고 해도 그곳까지 갈 마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뚝 떨어진 곳은 마차에서 보이는 산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옆엔 나무를 붙든 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 죽어 가는 오빠가 있었다.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얼굴을 왈칵 찌푸린 오빠의 안색은 극도로 창백했다.
이런 게 마법 멀미라는 것인가. 매우 특이한 체질인 오빠는 상당히 힘들어했다.
“오빠, 갠차나?”
“크읍…….”
안 괜찮은가 보다. 오빠를 마법 멀미로 훅 보낼 수 있음을 깨달았지만 나는 짠한 마음이 앞서 그의 등을 조그만 손으로 톡톡 다독였다.
속이 완전히 뒤집힌 오빠는 그대로 몇 차례 무지개떡을 토해내며 실신 직전까지 갔다. 엄청난 마법 거부감에 오빠는 다 죽어 가는 표정을 지었다.
“너, 너 대체 무슨 짓을…….”
“오빠, 빈대똑 부치고 싶지 안으묜 우리 딴 데로 가자.”
바닥이 온통 오빠가 토해낸 무지개떡으로 즐비했다. 그곳에서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은 나는 나뭇잎으로 무지개떡을 대충 가렸다. 생전 처음 와 본 산이지만 우선 기력이 쇠해 정신 잃을 것 같은 오빠를 끌고 자리를 옮겼다.
“너!”
“요고 박카 사탕이얌. 머거.”
민트가 진정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빠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바로 그의 입에 쏙 넣어 줬다. 박하사탕이 입에 들어가자 오빠가 뭐라고 하려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는 오빠의 안색은 처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오빠는 박하 향을 뿜어내며 말했다.
“너 내가 마법 멀미가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웅, 군데 구게 오때서?”
“하아? 너 나 암살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아까 디질 뻔 햇짜나.”
아까 죽을 바엔 차라리 극심한 멀미를 겪더라도 명줄을 연명한 게 낫다는 내 말을 알아들은 오빠는 잠시 씩씩댔다.
“아버지가 아시면 맞아 죽을지도 몰라.”
“헹, 안 마자주거. 잘햇따고 쑤다듬 해 줄걸?”
“그거야 너한테나 해당하는 거겠지.”
“오빠, 아프로 가기 위해 일보 후태라는 말 몰라? 오빠 바보구나.”
백보를 가기 위해 오십보를 물러설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한 걸음 뒤로 후퇴했다고 한들 이미 한 번 걸어가 봤으니 쉽게 건너뛸 수 있을 것이다.
내 말을 들은 오빠는 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벗어 던졌다. 순간 묘한 그리움에 사무친 나는 멍하니 오빠의 얼굴을 봤다. 나처럼 넋을 놓고 볼까 봐 일부러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 건가 싶었다.
“아띠, 징짜 잘생겻네.”
아빠의 어린 시절 모습이 이런 걸까. 이렇게 잘나서 어린 엄마가 한순간에 훅 빠진 건가 싶을 정도였다.
“어린애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네.”
“군데 참…….”
익숙한 모습이었다. 아빠의 모습도 낯설지 않았는데 지금의 오빠 모습은 내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한동안 말똥말똥 두 눈을 크게 뜬 채 오빠를 본 나는 잠시 머릿속에서 흐려진 인물 하나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어? 마, 마자! 오, 오빠다. 오빠아아!”
“애가 갑자기 왜 이래.”
“오빠, 보고시펏써!”
오빠가 분명했다. 베네딕트 제국의 황제이자 유일하게 나를 살려 주고 동생으로 인정해 준 오빠 란슬롯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빼다 박아 놓았다.
전 약혼자와 싸울 때 어떻게든 나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오빠의 모습과 겹치자 나도 모르게 덥석 안았다. 순간 울컥한 마음에 눈가에 이슬이 방울방울 얽혔다.
“오빠, 죽디마! 이버넨 낵아 지쿄줄께!”
“내가 네 도움을 받을 정도로 약해 빠지진 않았어. 그러니까 좀 떨어져!”
말은 떨어지라고 했지만 안겨들어 눈물 흘리는 나를 마냥 밀어내지는 못했다. 오빠는 마지못해 내 등을 감싸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오빠 가슴에 안겨서 울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하필 어려서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본 란슬롯의 얼굴과 똑같을 게 뭐란 말인가.
황제의 손에 어미가 죽어 황녀로서 존재도 유명무실해진 내게 먼저 다가와 안아 준 란슬롯이었다. 당시 황태자였던 란슬롯이 나를 동생으로 인정하자 그때야 주변에 돌봐 줄 시녀들이 채워졌다.
그때 각인되듯 새겨진 얼굴을 보자 잠시 감정에 복받쳐 추태를 부린 나는 히끅 하며 숨을 삼킨 채 어색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입양했다고 해서 장군감을 데려온 줄 알았는데…… 이건 뭐 평범한 어린애잖아.”
뭔가 실망한 듯하면서도 내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그러더니 오빠는 손수건을 꺼내 내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 줬다.
“울지 마라. 젠장, 잠시 잊고 살았는데 똑 닮은 얼굴로 울 게 뭐야. 우리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았단 말이야.”
미간을 잔뜩 찌푸린 오빠는 내 얼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야오옹.
잠시 잊혔던 씨엘이 다가와 제 머리를 내 다리에 툭 갖다 대며 울었다. 그때야 녀석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씨엘의 까만 털을 쓰다듬었다.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씨엘을 안아 올려 오빠의 옆에 갖다 댔다.
“오빠랑 달맛써.”
“검은 털에 노란 눈동자라고 해서 나한테 갖다 붙이지 마.”
언니를 보면 아빠 씨만 일한 티가 났다. 한데 오빠를 보니 다행히 엄마도 자신의 유전자를 약간 보탰는지 눈동자가 노란색이었다.
“징짠데, 달맛는데.”
“이 세상에서 동물이랑 닮았다는 말을 좋아하는 남자는 별로 없을 거야. 그나저나 이젠 어떻게 해야…….”
오빠가 말하는 중에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정말 이곳에 그 애가 떨어진 거라고?”
“마법사가 이 산으로 마나가 이어졌다고 했으니까 맞겠지.”
“흐음, 그나저나 파멸의 아이가 아니라 진짜 판테르 공작의 딸이 아닐까? 어린애가 마법 스크롤을 찢어서 도망갈 정도면 마나가 조금이라도 있다는 뜻이잖아.”
“하긴 판테르 공작의 딸이라면 마법 명문 티그리스 공작의 외손녀가 되니까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하긴 한데…….”
“우리가 뭐 어쩌겠나.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누군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걸 들은 나는 순간 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마법 스크롤은 아까 찢은 게 전부였다. 게다가 내 비루한 몸뚱이엔 마나가 개미 똥구멍만큼 존재했다.
즉 마나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있어서 마법 스크롤이 있다고 한들 그걸 사용할 수 없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잡혀가서 죽는 건가 싶을 때 손목에 따뜻한 게 닿았다.
자연스레 손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빠가 내 손목을 잡고는 제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무얼 뜻하는지 안 나는 얼른 한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빠가 얼굴 가린 내 손의 위치를 슬쩍 밑으로 내렸다. 숨은 쉬어도 된다는 뜻에 입만 가린 채 오빠와 함께 매우 조심히 움직였다.
저들은 고도로 훈련을 받은 매우 기민한 존재들이 분명하기에 최대한 기척을 줄였다. 씨엘은 소리 죽여 걷는 것을 포기했는지 오빠의 어깨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지만 어린 내 체력은 바닥 그 자체였다. 게다가 마법사 지망생이 아닌가. 그 누구도 넘나들 수 없는 저질 체력을 지닌 나는 금세 숨결이 거칠어졌다.
이 나이대의 어린애들은 모 건전지처럼 쉬지 않고 놀 정도로 체력이 좋던데. 난 현실적인 어린아이도 아닌 듯했다. 이가 빠지고 허리가 굽은 노인처럼 입술 사이에서 거친 숨소리가 연방 터졌다.
손으로 가린다고 한들 완벽하게 막지는 못할 것이다.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러다가 둘이 다 붙잡히면 안 되기에 나는 오빠가 이끄는 대로 가다가 발을 멈췄다.
“왜?”
바람결을 타고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오빠, 먼저 가.”
“뭐?”
“먼저 가. 난 나중에 가께.”
어차피 저들의 목적은 오빠가 아니라 나였다. 내가 순순히 붙잡힌다면 오빠에게 신경은 쓰지 않을 것이다. 나 때문에 판테르 공작가의 후계자를 잃어서는 아니 될 말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를 거둬 주고 딸로 삼아 준 아빠에게 은혜 갚을 생각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아? 요 꼬맹이가 지금 뭐래. 영웅 심리를 가지고 있나 본데 네가 잡힌다고 해도 나를 놓아줄 것 같니? 입막음용으로 죽일 텐데.”
“아…….”
멋진 척해 보려다가 시도하기도 전에 실패한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오빠의 눈빛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발을 옮겼다.
소리 내지 않고 걷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근육이 당겨 아팠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는 걷지 못해서 금방 붙잡힐 것 같았다.
“얼른 아버지가 오셔야 할 건데.”
“아빠가 오또케 와?”
“우리가 만난 후로 연락을 하지 않았잖아. 그럼 연락을 시도하다가 오실 거야. 그것도 아니면 우리 측 기사 중 한 명이 튀어서 얼른 연락을 취하거나.”
“우웅, 기사인데 튀어?”
땀이 비 오듯이 흘러 눈동자에 닿았다. 쓰라리고 아파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지만 앓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연방 소매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지만 땀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더는 걷지 못할 것 같을 때 오빠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뒤돌아서 나를 본 오빠의 눈높이가 갑자기 낮아졌다. 순간 또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땐 더는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대신 가슴에 뜨거움이 왈칵 느껴졌다.
“오빠?”
어느새 등에 업힌 나는 놀라 얼떨결에 오빠를 불렀다.
“우리 집안 기사는 함께 싸우다가 같이 산화하는 것 대신 도중에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게 규칙이야.”
“왜?”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 소식을 제대로 전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래.”
“우웅.”
“전멸 대신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으아아앗!”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걷던 중 갑자기 오빠가 비명이 응축된 작은 소리로 외쳤다. 나 또한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몸이 쑥 빨려들어 가는 느낌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를 질렀다.
“꾸에에엑, 찹쌀똑 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