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이모, 나, 나! 할쑤잇써!”
갑자기 콜린이 나섰다. 내게 잘 보이려는 듯 손을 번쩍 든 채 앞으로 나선 콜린을 보며 방긋 웃었다.
“조카드라, 쪼꼬미도 한다는데 니들이 안 하묜 안 대지.”
“고, 고모…… 하, 하지만…….”
“요고 노래 끝까지 잇눈데, 공쥬님한테 불러주묜 조아할곤데.”
내 말에 에이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표정을 지은 제이든과 함께 콜린 옆에 섰다. 그러고는 마법사답게 엄청난 기억력을 자랑하듯 율동과 함께 귀요미 송을 불렀다.
조카들이 귀요미 송을 부를 때부터 끝날 때까지 어른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얼마나 크게 웃는지 주변이 떠나갈 정도였다. 할머니는 눈물을 찔끔하실 정도였다.
“역시 우리 라피 아가씨가 최고예요. 호호호. 정말이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귀여워 죽을 것 같아요.”
“우리 라피가 있어서 어렸을 때도 안 한 재롱을 다 커서 하게 되는구나. 하하하.”
헬레나와 다니엘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귀요미 송은 대가족의 마음에 위안이 되어 줬다. 즐거움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나는 티그리스 공작저에서처럼 노래를 불렀다.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노래와 율동이건만 이들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쪽쪽-
“우리 라피가 있어서 이 할미가 살 것 같구나. 그동안 요 귀여운 말랑 콩떡을 보지 못하고 산 게 너무 억울할 지경이야.”
내 볼에 소리가 날 정도로 입맞춤한 할머니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볼 수 있는 게 어디입니까. 이리 가까이에서 원할 때마다 볼 수 있다는 것에 심장이 기분 좋게 뛰는군요. 안 그렇습니까. 부인.”
서로 존대하며 존중하는 듯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 모습을 웃으며 보는 아빠의 얼굴에 알게 모르게 그늘이 지는 것 같았다. 얼른 아빠 곁으로 가서 꼭 안았다.
“아빠, 내 아빠가 대어죠서 고마버여.”
“별 이상한 말을 다 하는구나. 나야말로 내 딸이 되어 줘서 정말 고맙고 행복하구나. 사랑한다. 라피.”
내 진짜 아빠는 아니지만, 아빠가 사랑한다고 말하자 순간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런 내 얼굴을 살며시 감싸 쥔 아빠의 눈동자엔 눈물이 차올랐다. 그 눈물이 채 흘러내리기 전에 얼른 소매로 닦아 주려고 했건만 여기저기에서 손수건이 대령되었다.
“자네, 이걸로 닦게.”
“아버지, 손수건 여기…….”
“아버님!”
“고모부님.”
“고모할아버지!”
순식간에 손수건이 겹겹이 쌓였다. 할아버지와 언니, 형부, 헬레나와 에이든의 손수건을 받아든 아빠의 입가엔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졌다.
“이거…… 기념으로 가져도 됩니까?”
“내가 할 줄 아는 건 없고 우리 사위 손수건 정도는 만들어 줌세. 그러니 매일 새로운 손수건으로 쓰게나. 우리 집에 쌓여 있으니 말일세.”
아빠의 말에 할머니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할아버지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저기, 소피아? 그 손수건 전부 제 것이 아닙니까?”
“여보, 욕심이 많으세요. 이제껏 제가 만든 손수건을 독점했으니 이번 기회에 사위에게 좀 나눠 주는 건 어떨까요. 우리 라피를 낳아 준 하나뿐인 사위인데 이 정도도 못 해 줄까요.”
할아버지를 달래는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의 말에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위 사랑은 장모님이라는 건가. 그 모습이 재미있어 나도 모르게 키득대며 웃었다.
“하무니, 사위가 가묜 꼬꼬 자바준댓써여. 담에 아빠 가묜 꼬꼬 주세여.”
“그래그래, 우리 라피랑 사위가 오면 꼭 맛있는 닭고기 요리를 준비하라고 말해 둘 터이니 언제든지 오려무나. 내 새끼.”
지금이라도 북부에 있는 닭이란 닭은 다 잡아 줄 것 같은 할머니는 굉장히 기운이 넘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색이 완연해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는데 말이다.
“어? 처제! 진짜 사위가 가면 닭 잡아 주는 거야? 아, 아버님! 저는요? 저도 닭고기 좋아하는데.”
“말만 하게나. 주방장들이 알아서 만들어 줄 것이니.”
“직접 안 잡아 주십니까?”
“자네를 직접 잡아 버리기 전에 그 입은 좀 다물게나.”
아빠가 형부에게 협박성 말을 서슴없이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그런 말해 봤자였다.
반나절 동안 재미있는 나들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 우리는 다음 날은 판테르 공작저의 정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즐긴 가족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하는 게 너무나 보기 좋았다.
대가족이 다시 소가족이 되었지만, 예전처럼 쓸쓸하지는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통신구로 연락을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오늘은 형부의 푸념을 들어줬다. 딸을 가지고 싶은데 언니가 동의해 주지 않아서 힘들다는 말을 장장 한 시간이나 해댔다. 나를 찾아온 아빠가 듣다못해 통신구를 던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말렸다.
“앙대여. 그거 비싸여.”
“괜찮아. 아빠는 부자니까 이런 것쯤은 몇 개나 사 줄 수 있단다.”
“글애두…… 앙대여. 던지려면 혐부를 던지세여.”
“응.”
내 말에 바로 수긍한 아빠는 통신구를 던지지 않았다. 형부는 튼튼하니까 아빠가 던져도 크게 다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앗! 처제! 어떻게 나를 아버님께 팔아넘길 수 있는 거야.]
“구롬 혐부가 아빠 이기묜 대자나여.”
[나도 이기고 싶은데, 그런데…… 안 되는 건 안 돼.]
이미 시도를 해 본 듯 형부는 포기가 빨랐다. 처음 언니와 결혼하겠다고 허락받으러 왔을 때 아빠가 대뜸 연무장으로 끌고 가서 대련을 해야 했다나.
그때 형부는 아빠한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고 말했다.
[내가 어찌 아버님을 팰 수 있겠어. 그냥 조금이라도 나이 어린 내가 맞아 주는 게 낫지.]
“하아? 자네, 그리 자신 있으면 오게나.”
[아닙니다. 아버님, 제가 어찌 천륜을 저버리고 아버님을 이겨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냥 저는 영원히 진 것으로 해 주십시오. 크흠, 처제, 다음에 연락할게. 그동안 잘 지내.]
아빠가 손가락을 까딱하며 언제든지 들어오라는 말에 형부는 갑자기 통신구를 꺼 버렸다. 이 모습을 보아하니 아빠가 형부보다 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빠가 혐부보다 쎄여?”
“그럼, 그리고 그놈보다 가슴도 크단다.”
가슴의 크기는 검술 실력을 나타내는 지표인가. 고개를 갸웃한 나는 아빠와 간식을 먹고 난 후 벤스와 오스카에 의해 끌려가는 아빠를 배웅해 줬다.
“흐음, 이젠 뭐 하지?”
대가족이었을 땐 뭘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복작복작해서 정신이 없었다. 한데 막상 다들 돌아가서 한가해지니 공부하는 것도 미룬 채 주변을 돌아봤다.
씨엘이 낚싯대를 솜방망이 발로 톡톡 건드리며 놀아 달라고 했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낚싯대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흔들었더니 말랑말랑 찰떡 같은 내 팔에 근육이 생길 것 같았다.
“아! 맞따. 그 책 아직 안 일것지? 거기 드러갈 수 있으려나.”
열쇠는 아빠가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괜히 평온해진 아빠의 마음을 들쑤실 것 같아 따로 말하지 않고 무작정 제니와 함께 방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어딜 가시려고요?”
“아빠의 부인 방으로 가려구여.”
“어머, 아가씨! 아빠의 부인이라니요. 엄마라고 불러야지요. 자! 따라해 보세요. 엄마!”
저번에 아빠도 그러더니 내가 세라피나 판테르를 부인이라고 부르면 곧장 엄마라고 교정해줬다.
“어, 엄……마?”
엄마라는 말이 타인에겐 익숙할지 몰라도 내겐 낯설었다. 전생과 전전생 모두 엄마가 없었다. 둘 다 나를 두고 야반도주를 했다. 그 화풀이를 어린 내가 오롯이 견뎌야만 했다.
단 한 번도 실제로 뵌 적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아빠의 딸이 되었으니 그분의 딸도 맞았다.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립고도 아픈 호칭을 부르자 제니가 살며시 웃었다.
“안 그래도 아가씨께서 그 방에 가 보고 싶어 하시면 언제든지 가도 된다고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정말? 울 아빠 체고!”
“그럼요. 공작님은 언제나 최고세요. 그리고 그보다 더 최고는 우리 찹쌀떡 아가씨고요. 자! 얼른 가요.”
제니의 손을 잡고 세라피나, 아니, 이젠 엄마가 된 분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 혼자 잇쓸래여.”
“그래요. 아가씨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실 거예요. 밖에 있을 테니 볼일 보고 나오세요.”
제니를 밖으로 보낸 나는 쫄랑쫄랑 따라온 씨엘과 함께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이게 모야.”
내가 보고자 한 책 두 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연의 일치라고 여긴 나는 그걸 보고는 깜짝 놀랐다.
“말도 앙대!”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림이 내 눈에 보였다. 이 시대엔 절대로 볼 수도 그리고 상상하지도 못한 삽화가 책에 그려져 있었다.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를 본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미야옹.
씨엘이 내게 오더니 아픈지 알았는지 연방 다리에 제 머리를 비비적댔다.
“나, 안 아포. 구냥 좀 놀라소 구래.”
이걸 보고 안 놀랄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시대에 누가 이런 삽화를 그린 것인가. 엄청난 상상력이 더해진 삽화의 책을 본 나는 입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시대로 따지면 SF공상 소설인 줄 알 터였다. 한데 거기엔 로맨스가 존재했다. 이 책 속에서는 현대 로맨스로 표현이 된 글을 쭉 살폈다.
“마, 말도 앙대. 진짜 이럴쑤는 업써!”
정말 말도 안 되는 로맨스 판타지였다.
“나 요기 아라. 요기도…… 히익, 모야 이게!”
보면 볼수록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허름한 동네에서 사는 여자애가 주인공이었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혼자 노력해서 대기업에 들어가 사장과 사랑을 이룬다는 이른바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내용이었다.
한데 문제라면 그 허름한 동네가 내가 살았던 곳이란 거다. 그리고 주인공인 여자애는 나와 친하지는 않았지만, 한동네에 살고 있어 가끔 지나가며 눈만 마주치는 존재였다.
“하아, 말도 앙대!”
정말 말도 안 되는 스토리였다. 가정 폭력에 노출된 나를 알고 있는 여자애가 신고하려는 찰나에 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자동차 사고로 떠나 버린 나를 불쌍히 여긴 여자애는 그때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게 되는 존재로 자란다는 내용이었다.
“아, 징짜 모리 아포.”
결론은 내가 이 책 속에 빙의한 게 된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다른 책을 읽었다.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황녀 세라피나는 제 성년식에 전 약혼자 집안의 반란으로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베네딕트 제국의 황제이자 내 오빠인 란슬롯은 전 약혼자의 반란을 가까스로 잠재웠고, 살아남았다는 내용에 그저 입만 떡 벌렸다.
“구럼 낵아 첨엔 요기, 담엔 요기에 책빙의 햇따는 고야? 와, 구롬 지금의 난 몬데?”
본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된 건가? 그게 아니면 차원 이동을 하면서 그쪽 세계와 이쪽 세계의 시간의 흐름이 달라 찹쌀떡이 된 건가.
보고도 믿어지지 않은 나는 얼른 두 책의 저자를 살폈다. 최소한 이름을 알면 공작가의 정보통을 이용해 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난 저자가 적힌 곳을 보고 좌절했다.
「작자 미상의 구전 로맨스」
“이씽, 나랑 장난해!”
버럭 소리치자 문이 열리며 제니가 안으로 뛰어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신가요?”
“제니는 요거 아라여?”
작자 미상의 구전 로맨스라니, 차라리 작자 미상의 고려 가요, 아니 사반나 가요가 낫겠구먼.
씩씩대는 내가 두 권의 책을 보여 주자 제니는 픽, 웃었다.
“이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건 고대 국가에서 구전된 로맨스를 글로 적어 놓은 건데요. 말 그대로 구전이라 작자 미상이랍니다.”
사만나 제국에서 이 두 로맨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본디 구전 로맨스인데 나중에 고대어로 적힌 글이 발견되어 원본이 존재한다나 어쨌다나.
허허, 고대인들도 막장 아침 드라마급 소설을 좋아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