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잠들었다가 깨어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웅, 온제 잠드럿찌?”
언니와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한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으휴, 시간만 낭비햇네. 아까버라.”
얼른 마법 공부해서 마법사가 되고 싶은데 자는 데 시간을 쓴 게 못마땅한 나머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가, 우리 라피, 일어났니?”
조금은 잠긴 듯한 아빠의 목소리에 고개를 움직였다. 그곳엔 두 눈이 퉁퉁 부은 아빠가 매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인의 죽음 때문에 내가 잠든 사이에 펑펑 운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이 짠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뻗어 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탄탄한 얼굴엔 촉촉함이 감돌았다.
“아빠, 우럿써여?”
“응, 너무 너무 슬프고 아파서…… 그리고 기뻐서…….”
슬프고 아파서 우는 것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 기뻐서 운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아빠가 내 두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덮었다.
절절한 온기가 손등에 닿았다가 살짝 떨어져 내 손바닥에 아빠의 입술과 숨결이 닿았다.
“간지러버.”
손을 움찔하며 떼어내려 했지만, 아빠의 손이 놓아주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진득하게 붙잡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봤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시선에 나도 모르게 어색하게 웃었다.
“우리 라피를 보러 귀한 분들이 오셨단다. 가서 인사해야지.”
“우웅? 언냐랑 하부지요?”
“응, 그리고 또 다른 분도 오셨어. 그러니 우리 라피, 꼬까옷 입고 아빠랑 나가자꾸나.”
아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니와 이레나가 달려와서 옷을 갈아입혔다. 빗으로 머리를 손질하고 제이든이 준 머리핀을 꽂아 치장을 마무리하자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오디로 가여?”
“다들 응접실에 모여 계시단다.”
쪽-
응접실까지 가는 동안에도 아빠는 내 볼에 몇 번이나 입맞춤했다. 사랑이 절절 흘러내리는 모양새에 싫다고 거부할 수 없었다.
오늘따라 아빠의 진득한 사랑이 가득할 때 응접실 문이 열렸다. 전부 내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새끼, 예쁘기도 하지. 귀여운 옷을 입었구나.”
할머니를 본 나는 바동바동 움직여 아빠의 품에서 벗어났다.
“하무니! 나 왓쪄여.”
“우리 새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나를 품은 할머니는 연방 눈물을 흘리며 등을 다독였다.
“소피아,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죄송해요. 그래도, 내 새끼가, 우리 손녀가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여보, 이젠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세라피나에게도 그리 말하고 오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죠. 우리 말랑 콩떡이 떨어진 그 순간부터 우리에겐 행복이 왔지요.”
할머니 품에서 할아버지 품으로 이동하자마자 다니엘과 헬레나가 뛰어왔다. 그 뒤로 에이든과 제이든도 함께 와서 활짝 웃었다.
“헤에, 다들 우럿써여? 눈이 붕어 가타.”
“응, 너무 슬프고 아프지만 기뻐서 울었단다.”
아빠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한 듯한 다니엘이 내 볼에 입맞춤했다.
“아가씨, 우리에게 잘 오셨어요. 조만간 제대로 확대시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헬레나가 반대쪽 볼에 입맞춤하며 환하게 웃었다.
“고모, 나도 왔어.”
“고모, 우리 마법 공부할래? 책이랑 이것저것 챙겨 왔어.”
에이든과 제이든이 동시에 주둥이를 대려 하자 손을 뻗어 막았다.
“때끼, 절루 가. 다 커서 징그러버.”
“너무하네. 멀리서 고모할머니랑 고모 보러 왔는데.”
“맞아. 사비나도 고모 보고 싶다고 매일 통신구로 안부를 묻는다고. 오늘은 사비나에게 말할 내용이 풍부해지겠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개구쟁이처럼 웃는 에이든과 제이든을 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두 형제의 볼에 내가 직접 입맞춤을 했다.
“요곤 그간 마봅 갈쳐준 대가얌.”
나름 시크하게 말했건만 녀석들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가 보면 짝사랑이 이뤄진 것처럼 감정에 복받쳐 촉촉함이 감돈 눈동자로 나를 봤다.
“우리 인절미 처제, 멀리서 오느라 고생 많았어.”
멀리서 온 건 본인이면서 갑자기 뭔 말을 하는 건지 원.
“언냐, 혐부 노망낫써여?”
“풉,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만큼 우리 라피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오늘은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어가 주렴.”
“아니 처제, 어떻게 요 조그맣고 귀여운 입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나 너무 상처 받았…….”
“노망 맞군.”
“노망이 맞아. 아직 나도 안 걸려 본 건데.”
형부가 말하는 중에 아빠와 할아버지가 말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언니를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리카, 안 되었구나. 하나밖에 없는 남편이 노망이라니.”
“에리카, 이리된 거 이제라도 나이 많은 손녀사위는 버리고 돌아와도 될 것 같구나.”
음? 갑자기 이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분위기는 어쩔?
저번에 나쁜 감정을 모두 해결했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지금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깨어나면서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이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모, 나 왓써.”
“콜린, 안농. 요긴 첨이지?”
“응, 이모랑 가치 여기서 놀고 시퍼.”
해맑은 미소를 지은 콜린을 본 나도 방긋 미소 지었다.
“안 돼. 한 살 많은 조카는 좀 빠지는 게 어떨까.”
“그래. 우린 고모랑 마법 공부 해야 하거든.”
“시러여! 이모는 나랑 놀 거야!”
갑자기 애들 싸움으로 번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대체 언냐드른 애들 교육 어캐 시킨 건가여.”
어디서 어른들이 계신 곳에서 언성을 높이느냐며 말했건만 역시나 내 말은 웃음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다들 웃으며 나를 안아 주기에 바빴다.
“군데 오느른 부인의 기일인데 이러케 떠들어도 대여?”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고인을 기리는 게 정상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내 머리에 입맞춤하고는 말해다.
“부인이 아니라 네 어미지. 네 어미는 무거운 분위기를 싫어했단다. 아마 오늘 같은 날은 모두 웃으며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것을 더 좋아할 거야.”
“그래, 맞단다. 세라피나는 그런 아이였지. 4년 만에 모두 모여 이렇게 있으니 우리 딸도 하늘에서 한시름 높았을 거야.”
아픔을 미소로 승화한 듯한 아빠와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감지 않았는데도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였다.
“씨엘, 이리 와.”
한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씨엘이 불쌍해 보여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녀석은 후다닥 뛰어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부비부비-
안겨서 비비적댄 씨엘을 쓰다듬었다.
“이모가 기르는 냥이야?”
“응, 낵아 주엇써.”
“나도 냥이 기르고 시픈데.”
형부가 동물을 싫어하는 탓에 콜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요기 자주 와서 씨엘이랑 놀묜 대지.”
“아! 구로쿠나! 역시 이모는 똑똑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온 콜린은 씨엘을 쓰다듬었다. 씨엘이 순간 솜방망이에서 발톱을 꺼냈지만 내가 두 눈을 부라리자 얼른 숨겼다.
“히야, 보들보들해.”
“그치? 아프로 콜린이 씨엘이랑 노라주면 대겠다.”
나 공부하는 동안에 살아 있는 낚싯대가 되어 주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콜린은 씨엘을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한동안 응접실에서 눈물을 전부 말린 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인원이 너무 많아져서 모든 이야기를 전부 들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대가족이 된 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미소 지었다.
“고모, 이리 와 봐. 새로 나온 기초 마법서인데 한 번 봐봐.”
“이것만 보면 마법 문외한도 손에서 불을 피울 수 있을 정도라고 하더라고.”
가만히 앉아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한쪽에서 에이든과 제이든이 나를 불렀다. 그곳으로 가니 막 출간된 따끈따끈한 마법서를 꺼내 들었다.
“히야, 징짜네.”
나이 많은 조카들이 말한 것처럼 초보자도 한눈에 파악하기 쉽게 적힌 마법서였다. 두 눈을 반짝이며 보던 나는 에이든과 제이든을 봤다.
“요고 나 주묜 앙대?”
“당연히 되지. 고모 주려고 가져온 거야.”
에이든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베네딕트 왕국에서도 이렇게 쉽게 적힌 마법서는 없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중 갑자기 내 몸이 두둥실 위로 떠올랐다.
“우리 딸, 이제 나들이 가자꾸나.”
“나드리?”
부인의 기일에 뜬금없이 나들이를 가자는 아빠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엄마에게 좀 더 좋은 곳을 보여 주고 싶거든. 가족이 전부 모여서 나들이 가는 게 세라피나의 소원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죽은 이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단체로 마차를 타고 움직였다. 마치 이런 날이 올 거란 것을 알았는지 아빠는 거침없이 우리를 어디론가로 데려갔다.
“히야, 요기 좋아.”
탁 트인 널찍한 동산이었다. 예쁜 들꽃이 잔뜩 핀 곳은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는데도 잘 가꿔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씨엘은 나비를 보자마자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족끼리만 온 자리라 귀하신 공작가의 핏줄들이 돗자리를 깔고 간식용 바구니를 들고 날랐다. 돗자리도 몇 개나 깔 정도로 대가족이었다.
“허허,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좋군.”
“그러게요. 이곳에 온 우릴 보고 있을 세라피나를 위해 편히 놀다가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나란히 앉아서 인자한 미소를 지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주변 경치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네요.”
“사실 이곳은 세라피나가 찾아낸 곳이란다. 나중에 나들이 오려고 벼르고 벼른 곳인데 정작 본인만 못 왔구나.”
언니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은 아빠는 앉자마자 내게 쿠키를 물려 줬다. 야금야금 쿠키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빳빳해진 고개가 슬쩍 왼쪽으로 움직이자 그곳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셨다.
“우리 라피, 오랜만에 재롱부리는 거 보고 싶은데…… 자네는 라피가 재롱부리는 거 본 적 있나?”
“본 적이 없습니다만…… 라피, 섭섭하구나. 할아버지랑 할머니한텐 재롱부려 놓고 정작 아빠한테는 안 보여 주다니.”
신이 난 할머니의 말에 아빠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쩔 수 없이 발딱 일어나 새로운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했다.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답게!
“라삐 더하기 라삐눈 귀요미!”
노래를 부르며 검지 두 개를 뻗어 내 볼을 콕 찍었다. 순간 아빠의 광대가 승천하듯 올라갔다. 새로운 노래를 해서인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춰 줬다. 형부는 이 순간에도 딸 낳자고 언니 옆구리를 콕 찔러대다가 포크로 찔릴 뻔했다.
“찰똑 더하기 찰똑은 귀요미, 콩똑 더하기 콩똑도 귀요미!”
귀요미 송이 끝나자마자 다들 손뼉을 쳤다. 심지어는 주변을 감싸듯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의 어깨도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이 많은 두 조카님은 이 순간을 즐기지 못했다.
아빠의 무릎에 털퍽- 소리나게 앉은 나는 이마를 조그만 손으로 훔치며 말했다.
“히유 힘드러, 조카드라! 고모 한고 다 밨찌? 모해? 얼룬 재롱 부려야지.”
이 나이에 내가 계속 재롱부릴 수는 없잖니.
하루하루 나이 먹어 감을 느낀 나는 몸이 서서히 무거워져서 엉덩이 떼는 게 싫어졌다.
이럴 때를 대비해 조카들이 필요한 거 아니겠는가.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