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편지 겸 유언은 판테르 공작의 방을 울음과 탄식으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전쟁에서 본인이 죽을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두서없이 적은 글에 그저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자네에게도 우리 딸이 뭔가 말을 남겼겠지? 좀 보면 안 되겠나.”
“보셔도 됩니다. 대신 아버님 것도 제게 보여 주십시오.”
굳이 비밀로 할 일이 아니기에 세라피나가 남긴 글을 각자 돌려봤다. 그 글을 본 판테르 공작은 순간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생겼다.
“이 문구는 뭘 뜻하는 겁니까. 목걸이라니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혹시 몰라 준 거라네. 티그리스 공작가에 전설로 내려오는 목걸이일세. 보라색 다이아몬드로 만든 건데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이 있지.”
말 그대로 티그리스 가문의 역사서에 적힌 목걸이였다. 그렇기에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이 목걸이를 세라피나가 걸고 있음으로써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지내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목걸이가 사람의 생명을 살려 준다는 겁니까?”
“그게 소원이라면 그렇네.”
“하면 진짜 그 전설이 맞다면 어째서 세라피나는 자신을 살리지 않은 겁니까. 본인이 살면 배 속 아이도 살 수 있을 텐데요.”
“내 딸 성정이 올곧은 편이지. 아마도 죽음 직전에서야 소원을 빌었을걸세. 본인과 아이가 같이 죽어 가니 본인만 살자고 아이를 버릴 수 없었을 거야.”
비록 판테르 공작부인이 되었지만, 기사로서 황실에 충성하고 황제의 말을 따르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황실에서 신전과 짜고 성전을 벌였을 때 출전한 것이다.
서부의 미네르바 루피노 공작은 출산과 집안 내부 사정으로 참전하지 못했다. 대신 최정예 기사단을 보냈다. 중앙의 드라코 공작은 황도를 지켜야 한답시고 역시 당당하게 출전하지 않았다.
북부 티그리스 공작은 윗 지역 경계 업무를 보는 중이라 함부로 자리를 뜰 수 없어 마법사를 파견해 보조했다. 남부 아퀼라 공작은 성전 중에 전사했다. 해서 제롬이 대신 출전해야 옳았지만 판테르 공작이 압박을 넣어 장례 중이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혹 재수 없어 나이 많은 사위놈이 덜컥 죽게 되면 제 딸이 평생 아들 하나만 키우며 과부로 사는 꼴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볼 수 없었다.
동부의 판테르 공작 본인도 다른 곳에 출전 중이기에 황실과 신전에서 대놓고 움직이라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올곧은 기사라 정평이 나 있는 세라피나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것이다.
만일 판테르 공작이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저지했을 테지만 제가 알았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황실의 명대로 따른 세라피나는 동부 귀족과 기사들 및 병사를 이끌고 성전이랍시고, 타 왕국을 도발해 일부러 일으킨 전쟁에 참전했다.
이 모든 게 제게 협조적이지 않은 공작가의 세력을 약하게 하려는 짓거리라는 것을 판테르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적의 함정에 빠진 세라피나는 마지막 남은 병사까지 탈출시킨 후 복부가 꿰뚫린 채 전사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판테르 공작은 워프 게이트를 통해 그곳으로 향했다.
세라피나의 시신을 보며 울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의무실 의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세라피나 님께서 임신 중이셨습니다. 본인도 이곳에서 아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버린 판테르 공작은 세라피나를 죽인 왕의 목을 댕강 잘라 곧장 황실로 향했다. 본디 5대 공작이 출전하지 못하면 황제나 황태자가 직접 출전해야 옳았다. 하지만 황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황태자는 황태자비가 출산 예정이라며 거절했다.
이유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지만 그로 인해 임신한 세라피나가 죽게 되었다. 가만히 있을 판테르 공작이 아니었다.
황족이 모두 모여 성전의 승리를 논하는 곳에 들어가 염장한 왕의 대가리를 바로 앞에 던졌다. 순간 아비규환이 벌어졌지만 판테르 공작은 말없이 상석으로 걸어가 황제와 황태자를 보며 말했다.
‘내 아내와 내 아이가 죽었는데 그리도 기쁘십니까. 본디 황족이 출전해야 옳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성전이라 했으면 성기사가 출동해야지 왜 그 새끼들은 가만히 있는 겁니까.’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된 판테르 공작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내 아이, 내 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시시덕거리니 좋나. 대신관 자네도 말해 보게나. 성전인데 왜 자네들은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는지!’
감정 쏙 뺀 목소리에 대신관은 움찔하며 그 잘난 주둥이조차 나불거리지 못했다. 그 대신 황태자가 대변인처럼 나섰다.
‘판테르 공작부인이 임신 중이란 걸 몰라서…….’
‘알아도 출전하라고 했을 걸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그렇게 바보 아닙니다.’
‘고, 공작!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황족을 협박…….’
‘협박? 아! 이게 협박이로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그럼 진짜 협박 좀 해 보겠습니다.’
픽 웃으며 좌우를 본 판테르 공작은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대신관에게 말했다.
‘앞으로 성전이 있으면 우린 건드리지 말고 순수 성기사들로 꾸려 싸우러 가십시오.’
‘성전은 신성한…….’
‘그러니까 신성한 전쟁이니 너희나 하라고! 왜 죄 없는 내 영지민과 기사들을 죽으라 떠미는 것인가. 대신관, 그리고 내 말 안 끝났으니 끝까지 들어. 대가리 멀쩡히 달려 있고 싶으면!’
세라피나와 이름조차 지어 주지 못한 아이가 죽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판테르 공작은 기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후로 동부의 신전을 모두 폐쇄할 것입니다. 만일 한 달 내로 나가지 않으면 나는 악마가 되어 신관들을 도륙할 겁니다.’
‘지금 그건 신성 모독…… 히익!’
대신관이 한 마디 하려다가 목에 닿는 검을 보며 숨 쉬는 것조차 멈췄다. 검에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채 뚝뚝 흘러내렸다.
‘폐하, 그리고 황태자 전하! 황족으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이후로 전쟁이 터져도 황군과 드라코 공작의 수족을 데려가서 싸우십시오.’
‘파, 판테르 공작! 정신 차리게!’
‘전 지금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비록 부인과 태어나지도 못한 아이가 죽었음에도 말이지요. 만약 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 무사하진 못할 것입니다.’
노여움으로 범벅이 되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황제를 본 판테르 공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지금 우리 동부는 독이 오른 상태입니다. 원한다면 싸우러 오셔도 됩니다. 언제든지 환영하지요. 평화에 젖은 오합지졸이 전쟁으로 다져진 동부를 이길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요.’
그 말을 끝으로 판테르 공작은 황궁을 나왔다.
잠시 옛 생각에 잠긴 판테르 공작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때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자네, 괜찮나?”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습니다. 4년 전에 황제와 황태자 싸대기라도 때렸어야 했는데 그걸 못해 지금에서야 분통이 터지는군요.”
눈을 감은 판테르 공작은 라피를 안은 에리카를 품은 채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때 정말 아수라장이었지요. 적국 왕의 대가리를 냅다 던지시더니 피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지요.”
당시 뒤에 있던 벤스는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설명했다. 그곳에 있지 않았던 티그리스 공작과 에리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그런 일을 자네 혼자만 한 건가!”
“아버지, 피눈물을 흘리셨다니 얼마나 원통하셨으면…… 저도 알았으면 따라갔을 겁니다.”
티그리스 공작과 에리카가 잠든 라피를 보고는 소리 죽여 말했다. 그들을 본 판테르 공작은 바람 불면 사라질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황실에 밉보이는 것은 저 혼자면 족합니다. 괜히 북부와 남부까지 밉보일 필욘 없으니까요.”
표현을 하지 않은 판테르 공작 덕분에 티그리스 공작과 에리카는 당시에 있었던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족들이 수치스러워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함구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당장 말하게나. 우리가 누구인가. 가족 아닌가.”
“맞아요. 아버지!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제발 표현 좀 하세요. 그래야 오해 사지 않잖아요.”
당장이라도 황궁에 가서 난장판을 내자고 하면 바로 달려갈 것 같은 이들을 본 판테르 공작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만. 우리 라피가 진짜 세라피나 소생입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세라피나를 닮은 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서 그녀를 대신해 사랑해 주기로 여겼는데…….”
판테르 공작가 전부가 그리 생각했다. 라피는 세라피나를 닮은 아이라고 말이다. 판테르 공작이 딸로 호적에 올렸지만 같은 피는 흐르지 않는다고 여겼다. 하지만 공작부인에게 지은 죄가 있었던 이들은 전부 라피를 우쭈쭈쭈 해 주며 사랑으로 대했다.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세라피나 유모의 딸이 라피를 시중들다가 본 것을 말해 주더군. 저 목걸이 말일세.”
“저건 그냥 모조품 아닙니까? 라피가 떨어질 때부터 걸고 있는 목걸이였습니다.”
“아닐세, 저 다이아몬드는 겉보기엔 모조품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보라색일세. 아이가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목숨이 경각에 달해 저 보석의 힘으로 살아서 이곳으로 떨어진 것 같다는 게 우리의 의견일세.”
“하면 왜 진즉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 말이 틀리면 자네가 너무 실망할까 봐 묻어 두려 했네. 이러나저러나 라피는 라피니까.”
글도 배우지 않은 아이가 고대어를 읽는다는 게 이해가 되었다. 그 세계에서 고대어를 배웠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게다가 가끔 아이답지 않은 생각을 하는 게 마치 세상을 오래 살아 본 것 같았다.
아이 몸에 성인의 영혼이 스민 게 아닌가 싶었다. 한데 이 모든 게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딱 들어맞았다.
“그럼 우리 라피가 진짜로 제 동생이 맞나요? 어머니가 쓴 편지를 읽긴 했지만 반신반의라서…….”
“그럴 줄 알고 제가 이걸 가져왔습니다.”
눈물을 애써 말린 다니엘이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투명한 액체가 든 유리병이었다.
“이건 뭐지?”
“혹시 몰라 가져온 친자 확인용 수액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반대하셨지만 그래도 한 번은 검증하고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라피가 친자가 아닌들 어쩌겠는가. 라피는 앞으로도 라피로 불리며 키워질 것이다. 그걸 알기에 다니엘은 친자 확인용 수액을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어떻게 하는 거지?”
“고모부님의 피 한 방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고모가 안 계시니 대신 할아버지의 피도 필요하고요.”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판테르 공작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팔을 그으려는 것을 다니엘이 말리며 딱 한 방울만 떨어뜨리라고 부탁하자 벤스가 어디선가 급조해 온 바늘로 대체했다.
손끝을 찌르자 붉은 피 한 방울이 몽글몽글 맺히더니 수액 속으로 떨어졌다. 소독약에 담근 바늘로 티그리스 공작이 손을 땄다.
역시 붉은 피가 한 방울 들어가자 둥글게 뭉쳤지만 두 방울의 피는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친자 관계이거나 같은 혈족일 시엔 일정 부분 피가 섞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라피의 피가 필요한데…….”
“우리 라피가 아파할걸세.”
“그럴 줄 알고 마취약을 가져왔습니다.”
준비가 철저한 다니엘은 잠든 라피의 손가락에 마취약을 발랐다. 그러자 곁에 있는 씨엘이 대놓고 털을 세우며 허튼짓하면 곧바로 공격할 자세를 갖췄다.
“네 주인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 확인할 게 있어서 피 한 방울이 필요한 거니 가만히 있어.”
다니엘의 나직한 목소리에 씨엘은 털을 눕혔지만, 여전히 그를 노려봤다. 씨엘의 시선 뒤로 더 무서운 판테르 공작과 티그리스 공작의 시선이 닿았지만 다니엘은 라피의 조그만 손에 바늘을 찔렀다.
“윽!”
마치 제가 찔린 것처럼 에리카가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톡하고 건드리기만 하면 생채기가 날 것 같은 라피의 조그만 손끝에 이내 작은 핏방울이 맺혔다.
라피의 피가 똑- 떨어지자 이내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핏방울이 반응을 일으켰다. 판테르 공작의 피가 절반쯤 라피의 피와 섞였다. 그리고 티그리스 공작의 피도 일부 섞였다.
그걸 본 이들은 매우 놀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눈만 끔뻑이던 판테르 공작은 가까스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 진짜 내 새끼…….”
“내 새끼도 되네. 우리 새끼가 낳은 내 새끼가 맞다니. 오 세상에! 신이시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흐읍…… 내 새끼, 내 새끼가…… 으윽.”
라피의 출생이 밝혀졌고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고는 잠든 아이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가슴으로 폭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