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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51)화 (51/164)

51화. 

얼마나 급했으면 괴발개발로 쓴 글씨겠는가. 해석이 필요한 글씨체만큼이나 아빠의 손도 바들바들 떨렸다. 몇 개의 단어만 눈에 들어와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아빠의 호흡이 불안정하다 못해 멈췄다.

지금 이 편지가 뭘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너무 놀라 숨마저 멎은 공간 속에서 아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편지와 나를 번갈아 봤다.

“아빠?”

“미, 미안하구나. 아, 아빠가……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아.”

차마 편지를 구기지 못한 아빠는 몇 장이나 되는 편지를 붙잡은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록 내가 아빠를 본 지 몇 달 안 되었지만 이런 표정을 지은 것은 처음이었다.

무너져 내릴 것 같으면서도 죄책감이 은근하게 물든 눈동자에서는 무언가 일렁이며 쏟아질 것만 같았다.

“오스카, 당장 에리카와 아버님께 연락하게나. 내게만 남긴 글이 아닌 듯하네.”

“지금 올 준비하고 계실 겁니다. 좀 전에 아가씨께서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곳으로 연락을 했더니 곧 오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그렇군. 그래…… 역시 우리 딸이 최고구나. 아빠는 그런 것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후우, 에리카와 아버님이 오시거든 내 방으로 모시게.”

“네! 알겠습니다.”

본디 손님이 오면 응접실에서 맞이하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본인의 방으로 모시라는 말은 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할아버지까지 가족으로 여긴다는 뜻이 되었다.

“그리고 벤스, 자네도 따라오게나. 하멜 경은 대기하고 있게.”

“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나를 보고 복잡한 눈동자를 한 채 멍하니 넋을 빼고 있던 하멜 경은 아빠의 말이 떨어지자 곧장 이마를 바닥에 댔다. 절대적인 복종을 뜻하는 모습에 아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공작님, 대체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기에 그러신 겁니까.”

아빠의 색다른 모습에 조금 놀란 듯한 벤스가 뒤따라오면 물었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슴에 편지를 댄 채 내 정수리에 입맞춤을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떨어지지 않게 가슴을 꽉 붙든 나는 아빠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한 해석이 맞다면 딸이란 배 속의 아이가 딸이었으면 한다는 바람이 적힌 듯했다.

그 외엔 자세히 봐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는 걸어가는 중에 편지를 펼치지 않아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부인이 남긴 편지를 읽게 해 달라고 할 수 없어 얌전히 아빠의 가슴에 찰떡처럼 붙었다.

“배 속의 아이가 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적혀 있네.”

“네.”

“그리고 아이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고 하는군.”

“그, 그러셨군요. 한데 저는 왜 부른 것인지요?”

“자네에게도 한 줄 유언을 남겨서 부른 것일 뿐. 그러니 잠시 입 닥치고 따라오게.”

벤스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복잡해 보이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두를 혼란스럽게 한 종이를 품은 아빠는 방 안으로 들어가서도 입을 다물었다. 아빠의 뒤에 선 벤스는 평소에 나만 보면 어떻게든 제집으로 데려가려고 애교를 부렸는데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로 여유가 없어진 탓이다.

계속 고요함이 감돌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꾸벅여졌다. 밥 먹고 그다지 활동하지 않았는데 이 비루한 몸뚱이가 견디지 못했다. 

다른 어린애들을 보면 에너자이저 저리 가라, 어른들을 녹다운시킬 정도로 움직이던데. 앉아서 공부만 하는 마법사에겐 체력이 쥐약인 것 같았다.

“라피, 졸리면 자도 된단다.”

내 상태를 살핀 아빠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묜 앙대여. 언냐랑 하부지 오니까여.”

“오거든 깨울 테니까 마음 편히 자도 된단다.”

안 자려고 발버둥치는 내 눈을 슬쩍 가려 주기까지 했다. 그러자 언제 따라왔는지 모를 씨엘이 품에 안겨들었다. 폭신폭신한 감촉과 따끈한 온기가 감돌자 스르륵 잠이 들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라피!”

아빠의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이들이 전부 내 이름을 불렀다.

“하부지, 언냐, 안냐세여. 보구시퍼서 불럿써여.”

잠이 한가득 왔지만 나는 애써 참아내며 아빠의 품에서 빠져나와 배꼽 위에 손을 올린 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라피가 보고 싶다는 말에 얼른 뛰어왔단다. 우리 새끼, 귀엽기도 하지. 오늘은 말랑 콩떡에 콩가루가 한가득 묻었구나.”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나를 안아 올린 할아버지는 내 볼에 쪽쪽- 입맞춤을 해댔다.

“그러다가 우리 인절미 콩고물 떨어집니다만. 이리 온, 우리 동생.”

이번엔 언니가 손을 벌리자 그쪽으로 이동했다. 언제는 입맞춤하면 콩고물 떨어진다더니 언니는 더했다. 안아 올리더니 사정없이 내 얼굴을 언니 볼에 비비적댔다.

“한데 무슨 일로 이곳으로 부른 건가. 난 우리 세라피나만 만나 보고 라피랑 놀아 준 후에 갈 생각이었네만.”

이곳까지 부른 이유를 묻는 할아버지를 본 아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말도 못 듣고 오셨는지요?”

“이곳으로 가면 자네가 말해 줄 거라고 집사가 말해 주긴 했네만. 아! 밖에 다니엘도 있는데 불러들여도 되나? 혼자 오려고 했더니 녀석이 부득불 따라온다고 해서.”

“네, 그러셔도 됩니다.”

아빠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면서 다니엘이 천천히 들어왔다.

“고모부님,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뭔가 잔뜩 들고 온 다니엘이 아빠에게 인사하더니 내게 찡긋- 눈인사를 했다. 그의 눈인사에 힘없는 미소를 지어 준 나는 나직하게 하품을 했다.

“라피, 자고 싶으면 자렴.”

“우웅, 자묜 앙대는데…….”

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분명 편지를 보여 주려고 부른 것 같은데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라피가 잠이 들자 에리카는 사랑스러운 눈동자로 제 동생을 보며 연방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똑똑똑-

나직하게 울린 노크 소리에 판테르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벤스가 직접 문을 열었다. 오스카가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잠시 라피 덕분에 풀린 분위기는 판테르 공작이 내민 종이로 인해 무겁게 내려앉았다.

“좀 전에 하멜 경이 왔단다.”

“네? 하멜 경이라면 어머니의 호위기사였던 그……?”

에리카의 물음에 판테르 공작의 목이 느릿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시신이 보이지 않아 죽은 줄 알았는데…….”

아까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말한 판테르 공작은 제 품에 있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상당히 두툼한 것으로 봐서는 한두 장이 아니었다.

“세라피나의 유언이라고 합니다.”

차를 마시던 티그리스 공작과 다니엘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에리카 역시 라피를 안은 채 다독이던 손을 멈췄다.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딸이 유언을 남겼단 말인가.”

“네, 제게 남긴 글은 봤습니다만…… 아버님과 에리카에게도 남긴 글이 있어서 이리 부른 겁니다. 보시겠습니까?”

허름한 종이 뭉치를 본 티그리스 공작의 떨리는 고개가 간신히 끄덕였다.

“할아버지, 힘드시면 제가 읽어 드릴까요?”

“괘, 괜찮다. 네놈은 우리 세라피나의 글씨를 읽지는 못할 거다. 워낙 악필이라서.”

어렸을 때부터 마나를 잘 다뤄서 마법사로 키우려고 했지만, 검만 잡은 세라피나였다. 마법사로 대성하려면 십수 년을 수련해야 한다면서 빨리 결혼하려고 단기 속성으로 기사가 된 딸은 글씨 쓰기 연습을 게을리했다.

그렇기에 세라피나의 글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다니엘을 물리친 티그리스 공작이 직접 편지를 들고 읽었다. 

「아빠, 엄마. 오랜만에 편지를 적어 봅니다. 한데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밖에는 치열한 전투 중입니다만 소강상태라 급히 적습니다.

아빠, 엄마! 저한테 아기가 생겼어요. 근데 아무것도 모르고 참전하고 말았어요. 그러니 조시를 원망하지 마세요. 그이도 다른 곳에 참전 중이라 제 소식을 늦게 받았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아빠가 준 그 목걸이…… 진짜 효과가 있는 건가요? 그렇다면 전 제 목숨 대신 아기의 목숨을 살리고 싶어요. 아빠랑 엄마라면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아빠, 엄마! 저를 꼭 닮은 아이일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우리 말랑 콩떡이 품에 안긴다면 어렸을 때 저를 품어 주신 것처럼 꼭 안아 주세요.

반대한 결혼을 해서 엄마랑 아빠 가슴에 대못을 박았는데, 마지막까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거 죄송해요. 하지만 우리 아기만 살 수 있다면 전 또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아기 사랑해 주세요.

엄마, 아빠…… 진심으로 사랑해요. 죽어서도 사랑할 거예요.

추신 : 다니엘 그놈 나이 많다고 오빠 노릇 하려는 버릇이 있어요. 혼내 주세요. 내가 말이야. 헬레나 봐서 참아 준다. 

어쩌다가 착한 헬레나가 그런 놈 색시가 되었는지 원. 티그리스 가문의 앞날이 걱정되지만, 헬레나 덕택에 마음 놓고 간다. 이 자식아. 개미 똥구멍만큼 사랑한다.

에이든이랑 제이든이 우리 딸 무시하면 그날 마른하늘에 날벼락 칠 줄 알아라.」

편지를 읽은 티그리스 공작은 끝내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내 딸, 내 새끼…….”

티그리스 공작의 뒤에 서 있던 다니엘 역시 전부 알아먹지는 못했지만, 추신으로 적힌 글씨를 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모, 미안해…… 고모…… 앞으로는 안 그럴게. 고모…….” 

다니엘마저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벤스는 판테르 공작에게 종이 한 장을 받았다.

「벤스 크리스토퍼 후작에게.

처음으로 크리스토퍼 후작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이도 어린데 빨빨대며 일하는 게 보기 안쓰럽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할게요. 그이가 좀 강압적이고 유진도 그이 성격을 빼다 박아 놔서 일하는데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 주세요. 

우리 그이와 아이들 부탁할게요.」

판테르 공작가를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히 묻어난 엉망진창인 글씨체를 본 벤스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후우, 글씨 쓰는 연습 좀 하시라고 했는데…….”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제가 한 말에 세라피나는 방긋 웃기만 했다. 한데 끝까지 글씨 쓰는 연습을 못 했는지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막상 가까스로 해석한 글을 보니 아프고 아련하기만 했다.

“아니 대체 무슨 편지기에 그리도 눈물을 질질 흘리는 건가요? 애가 깨어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직 편지를 보지 못했지만, 덜컥 겁이 난 에리카는 괜히 큰소리를 냈다. 그런 에리카에게 판테르 공작이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사랑하는 내 딸 에리카에게

문뜩 처음 널 보았을 때가 떠올라. 상처받은 네게 사탕을 건넸는데 왈칵 울어서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 말았지. 

비록 너를 직접 낳아 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누가 뭐래도 넌 내 딸이란다.

그러니까 아퀼라 공작저에서도 힘내렴. 누구든 못살게 굴면 나한테 말해. 꿈속에서라도 조져 버릴 거니까.

아직은 어린 너를 타지로 보낼 생각에 조시가 몇 날 며칠을 잠도 못 자고 골골대는 것을 보았단다. 그러니 너무 미워하지 말렴. 본디 천성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사람이라 너를 사랑하는데도 말 한마디 못한 것뿐이란다.

내가 좀 더 이 세상에 남아 콜린이 커 가는 것도 보고 사위놈이 우리 딸에게 어떻게 하는지 지켜봐야 하는데 그러질 못할 것 같아.

그래서 말랑말랑한 아이를 보낼 거야. 척 보면 아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란다. 네 동생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배를 쓰다듬으면서 내가 겪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어. 아마 너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 아이도 네게 다가설지도 모르겠구나. 

본디 내가 키워야 옳은데 그러질 못할 것 같으니 엄마 대신 동생들을 돌봐 주렴.

에리카, 엄마가 사랑한다는 거 알지? 조시도 널 사랑한단다.

더 쓰고 싶은데 상황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 같아. 엄만 이만 갈게. 에리카, 부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얼마나 급박했으면 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고 끊었을까.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읽은 에리카의 눈동자에서 이슬이 흘러 잠든 라피의 얼굴로 굴러떨어졌다.

우는 에리카의 곁에 앉은 판테르 공작이 말없이 어깨를 다독였다. 언제나 그 자리에 우직하게 존재한 아비의 그늘에 한숨 돌린 에리카는 울컥한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아버지…… 사랑해요.”

세라피나가 채 적지 못한 마지막 구절은 에리카의 입을 빌려 4년 만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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