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요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일만 한 판테르 공작이었다. 이 시기엔 항상 몸을 혹사하다시피 했다. 그 이유를 아는 이들은 판테르 공작에게 일 좀 그만하고 쉬라는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이번 기일엔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소처럼 공작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따르는 게 나을 것 같군.”
이 시기만 되면 고용인들도 전부 말수가 줄었다. 올해 꼭 4년째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아무도 자그마한 한숨조차 내쉴 수 없었다.
뭔가 특별한 일은 하지 않지만 그게 못내 안타깝고 불안한 이레나가 오스카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지만 무작정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번엔 라피 아가씨도 계시니 뭔가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않을까요?”
“그럴 일은 절대로 없네. 만일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진작 말씀하고도 남으셨을 분이시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판테르 공작 때문에 그의 보좌관과 고용인은 전부 각자의 방식으로 판테르 공작부인을 기렸다.
“아퀼라 공작저와 티그리스 공작저에는 연락을 넣지 않아도 될까요?”
“그것 역시 공작님께서 결정하실 일이네.”
갑자기 뚝 떨어진 라피 덕분에 아예 연락을 끊고 지낸 두 공작가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아퀼라 공작저는 몰라도 티그리스 공작저엔 연락을 넣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어찌 되었든 티그리스 공작의 늦둥이 딸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판테르 공작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레나, 그 말은 더는 하지 말게. 지금 가장 아픈 사람은 공작님이니, 우린 그분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되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따스하게 웃으며 품어 준 세라피나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 슬픔에 젖은 채 그녀를 닮은 어린 라피의 방 쪽을 힐끔댔다. 활짝 열린 창문 틈으로 고양이와 놀아 주고 있는 모습을 본 이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세라피나의 기일이 되었고 판테르 공작은 라피를 눈에 한 번 넣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와중에도 일을 해야 하는 제 신세가 끔찍하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급한 일을 끝난 판테르 공작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평소라면 벤스가 가긴 어딜 가냐고 따라붙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 있으면…… 알아서 처리하게.”
“네, 알겠습니다.”
다른 날도 아닌 오늘은 타인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픔을 속으로 삭이며 걸음을 옮긴 판테르 공작을 본 이들은 옆으로 비켜서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라피는?”
“제니가 데리고 가서 씨엘과 놀고 있습니다.”
판테르 공작이 부인의 방에서 나간 후 라피의 행적에 대해 오스카가 알려 주자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내가 나올 때까지 들이지 말게나.”
“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오스카가 열쇠를 꺼내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내려가는 길목 중간마다 밤에도 빛난다는 캐츠아이가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인적이 없는 지하로 내려간 판테르 공작은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석관 앞에 섰다. 판테르 공작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모셔져 있는 가족묘였다.
“세라피나…….”
작은 목소리였지만 밀폐된 지하에서 묵직하게 내려앉아 울렸다. 하지만 이름을 불린 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왔어. 나 왔는데…… 이젠 나와 보지도 않는 거야?”
항상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마중을 나와 주던 제 어린 부인이 떠오른 판테르 공작은 아픈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못 와서 정말 미안해. 항상 핑계를 대서 미안한데 정말 바빴어.”
뿌연 먼지가 살짝 쌓인 석관을 맨손으로 쓸어 만진 판테르 공작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손잡으면 항상 따스하던 그녀의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차갑고 단단한 석관을 본 판테르 공작의 눈가에 이윽고 이슬이 영글었다. 항상 이곳에 오면서 절대 울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 무참히 깨졌다.
후두둑-
석관 위로 그리움과 아픔이 스민 이슬이 떨어졌지만 이젠 그의 눈가를 훔쳐 줄 이가 없었다. 손수건을 꺼내 석관 위를 닦은 판테르 공작은 다섯 살짜리 아이를 만난 열네 살의 조슈아가 되어 미소 지었다.
“그때 당신 모습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말하지 못해서 미안, 사랑한다고 한마디 해 주지 못해서 미안…….”
잘한 것보다 못한 게 너무 많아 사과만 한 판테르 공작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입술 사이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강한 남자를 좋아한 그녀였기에 눈물은 어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는 소리는 내고 싶지 않았다.
“읏, 세라피나…… 여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우리를 위해 잘 구워진 찹쌀떡을 보낸 거야? 몇 달 전에 하늘에서 아이가 떨어졌어. 근데 당신을 빼다 박았어.”
작년 이곳에 왔다가 나간 후부터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한 판테르 공작은 라피에 관해 설명했다.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때 어린 시절의 당신을 보는 것 같아서 너무 놀랐어. 그리고 당신이 한 말을 아이가 해서 두 번 놀랐고, 에리카도 마찬가지였대.”
마치 옆에 세라피나가 앉아 조용히 귀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판테르 공작은 쉼 없이 말했다.
“당신 이름을 아이에게 줬는데 괜찮을까? 미안, 진작 물어봤어야 했는데…… 근데 말이야. 티그리스 공작가와 아퀼라 공작가마저 라피가 공략해 버렸어.”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을 닮은 미소를 지은 판테르 공작은 석관을 조심히 끌어안았다. 지하에서 추워할 부인을 꼭 안아 온기를 준 판테르 공작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당신 허락을 받지 않고 아이를 우리 호적에 올렸는데 괜찮을까? 이것도 미안, 먼저 일 저지르고 통보만 해서…… 근데 진짜 우리 아이 아닐까? 아무리 봐도 우리 아이 같아.”
만일 셋째가 생긴다면 세라피나를 똑 닮은 딸이었으면 했다. 세라피나가 커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쉬운 판테르 공작은 어린 딸을 사랑으로 키워 주고 싶었다. 곁에서 아이가 커 가는 것을 보며 세라피나가 그리 커 왔음을 실감할 수 있게 말이다.
“은발에 금안은 티그리스 공작가의 직계 혈통에서만 나타난다는데…… 우리 딸은 엄마가 너무 열심히 일해서 아빠 씨를 밀어내 버린 것 같아.”
저와 닮은 구석은 아무 곳도 없었다. 그게 더 마음에 든 판테르 공작은 석관을 끌어안은 순간 라피를 떠올렸다. 라피는 잠잘 때마다 제 품으로 꼼지락대며 파고들었다. 그런 아이를 가운데 두고 부인과 함께 한 침대에서 자 보고 싶었지만, 그 소원은 영영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꿈이기에 영원히 깨지지 않을 세상을 떠올리기만 했지만, 심장에 아릿한 통증이 스몄다.
“세라피나, 너무 보고 싶어. 이젠 당신을 꼭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영원히 속삭여 줄 수 있는데.”
판테르 공작가의 핏줄로 제 감정을 절대 표현하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감정을 드러내면 그게 곧 약점이 된다는 세뇌에 가까운 가르침에 그는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당신에게 해 주지 못한 모든 것을 라피에게 쏟아붓고 있는데 질투하는 건 아니지?”
대답이 없을 거란 걸 알지만 판테르 공작은 계속 세라피나에게 질문을 했다.
“여보, 너무 보고 싶어. 그러니까 꿈속에서 잠시만 왔다 가면 안 될까?”
애원이 섞인 투정을 부렸다. 이제는 대답하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지만 판테르 공작은 그녀에게 계속 말했다.
“여보, 제발 한 번만…… 응?”
물기 어린 목소리는 묵직하게 내려앉은 공기를 애달프게 스몄다. 후회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그녀가 떠난 후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보, 세라피나…….”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석관 주변의 차가운 공기가 젖어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가까스로 석관에서 몸을 떼어냈을 때 저를 보는 시선에 판테르 공작은 흠칫했다.
“아빠…….”
“라피? 이곳은 어떤 일로…….”
분명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는데 라피가 이곳에 있었다. 혹여나 아이가 충격받았을까 걱정이 된 판테르 공작은 굳은 표정을 풀며 말했다.
“아빠, 바께 손님이 왔다구, 오쓰가 말햇써여.”
손님이 왔는데 본인들이 내려가면 죽을지도 모르기에 라피를 대신 보낸 듯했다. 대체 누가 왔기에 이런 곳에 라피를 보내 소식을 알린 것인가.
“미안, 아빠가 오늘은 감정적이 되어서…… 잠시만 기다리렴.”
석관에 짧은 입맞춤을 한 판테르 공작은 라피를 안아 올렸다.
“여보, 이 아이가 라피야. 당신을 참 많이 닮았지? 아이가 있기엔 적당한 공간이 아니라서 이만 데리고 나가 볼게. 나중에 또 봐.”
짤막한 인사가 끝나자 라피도 손을 흔들었다.
“우움, 담에 바여.”
라피를 안은 판테르 공작은 급히 지상으로 올라왔다.
“자네들은 정신이란 게 있는 것인가. 아무리 급한 일이라지만 라피가 충격받을지도 모르는 데 지하로 내려보내다니.”
판테르 공작의 음산한 목소리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은 전원 고개를 숙였다. 예쁘고 좋은 것만 봐야 한 어린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지하 가족묘로 오게 하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용서하지 못할 짓이었다.
보통 아이보다 똑똑하고 잘났다지만 꽃에 맞아도 생채기가 생기는 아이니 말이다. 귀한 아이가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건 아닌가 싶어 라피를 살폈다. 가슴팍에 찰싹 붙은 구운 찹쌀떡은 그저 얼굴을 비비적댈 뿐이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했습니다. 책임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이곳까지 온 이가 가져온 소식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평소의 분위기를 뺀 담백한 목소리로 말한 벤스의 뒤에는 조금은 지저분한 남자가 서 있었다. 덩치가 큰 이는 판테르 공작을 보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스틴 하멜이 판테르 공작님을 뵙습니다.”
“저스틴 하멜?”
이름을 들은 판테르 공작은 라피를 안은 채 숨을 멈췄다. 그동안 그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어 뭘 어쩌지 못했다. 시신조차 보이지 않아 실종자로 분류되었던 저스틴 하멜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자네를 그동안 찾았는데 어찌 지금 나타난 것인가.”
저스틴 하멜은 세라피나 판테르 공작부인을 지척에서 끝까지 호위한 기사였다. 그런 그가 공작부인 사후 꼭 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내자 판테르 공작은 불신이 섞인 시선으로 그를 봤다.
혹시 전쟁이 무서워 탈영한 게 아니냐는 판테르 공작의 시선에 저스틴 하멜은 바닥을 긁듯 주먹을 쥐었다.
“저, 저는 절대로 탈영한 게 아닙니다. 제 집안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면 이곳에 온 이유가 뭔가.”
“판테르 공작부인의…… 세라피나 님의 명을 실행하고자 염치 불고하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나직한 판테르 공작의 물음에 저스틴 하멜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뭔가를 꺼냈다. 종이를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임직한 종이를 내민 저스틴 하멜은 애간장이 끓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세라피나 님께서 가족에게 남기신 마지막 편지입니다. 이걸 전하기 위해 4년 만에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