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미양, 냐앙.
언니네 집에 갈 때 떼어놓고 간 이후로 씨엘은 애교가 늘었다. 오늘도 마법서를 보고 공부하는 내 다리에 비비적대며 어떻게든 눈 한 번 마주치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씨엘, 나 곰부하눈 중이얌. 마봅 곰부해서 마봅사 대야 해.”
나옹.
씨엘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봤다. 놀아달라는 듯한 시선에 나는 녀석을 끌어안아 올려 다리 위에 올렸다. 매끄러운 까만 털을 쓰다듬으며 다시 마법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뀨우.
“자꾸 왜 이리 보채눈 고야?”
끼잉.
동물과 대화가 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게 될 리가 없었다. 마법 중에서도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왜 구래? 띰띰해? 노라죠? 나 불 마봅 곰부하느라 바뿐데.”
원래 바람 계열 마법이 전공이었지만 하나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해서 에이든과 제이든이 가르쳐 준 화염 마법을 부전공으로 생각했다.
정신 집중해서 얼마 전에 화염 마법을 시전했지만, 컨트롤을 하지 못해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때 곁에 있었던 제니의 머리카락을 홀라당 태울 뻔했다.
그날 나는 제니에게 계속 사과했다. 사과의 의미로 내 볼때기를 몇 분간 대 줘야 했지만 말이다. 내 볼을 조물조물 만지며 표정을 푼 제니는 이후로 마법서를 펼치면 멀찍이 떨어져서 뜨개질을 했다.
슬쩍 뒤돌아 제니를 본 나는 인형이 달린 낚싯대를 잡고 움직였다. 낚싯대 끝에 매달린 물고기 인형이 움직이자 씨엘이 다리 위에서 사뿐히 내려갔다.
고개와 눈동자만 움직이던 녀석은 어느 정도 예열이 되었는지 갑자기 쏜살같이 뛰어가 물고기에게 달려들었다. 몇 번 휘휘 손을 움직이다가 제니를 불렀다.
“제니, 씨엘이랑 노라조여.”
“씨엘은 제가 낚싯대 흔들면 반응하지 않던데, 어디 한 번 해 볼까요?”
일찍이 몇 번 시험 삼아 낚싯대를 흔들어 봤던 제니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내게서 낚싯대를 건네받은 제니가 낚싯대를 흔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물고기 인형에 환장하게 달려들었던 씨엘은 고장난 장난감처럼 멈춰 버렸다.
“아가씨, 이 일을 어쩌죠.”
“어쪼긴, 굼겨야지. 배가 불러서 구론걸꺼에여.”
이런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냐는 듯 씨엘을 노려본 나는 더는 말하지 않고 마법서를 탐독했다. 그러자 제 죄를 알았는지 씨엘은 제니가 흔드는 낚싯대에 반응을 보였다.
“어머어머, 이제야 씨엘이 저한테도 마음을 열었나 봐요. 이것 보세요. 호호호.”
그건 마음을 여는 게 아니라 안 굶으려고 그런 것이란 걸 알았지만 딱히 고쳐 주지는 않았다.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마법서를 읽다가 뭔가를 안듯이 두 손을 내밀었다.
내 모습을 본 제니는 순식간에 축지법이라도 사용한 듯 뒤로 물러섰고 씨엘은 아예 저만치나 달아난 상태였다.
“빠이어!”
마법서에 적힌 대로 몸에 있는 마나를 싹싹 긁어내 쥐어짜며 시동어를 외쳤다.
하지만 이게 웬일?
손아귀에서 매우 미약한 불꽃이 생기다가 그대로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허연 연기뿐이었다. 그 연기마저도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아, 아가씨 대단하세요. 방금 불꽃이 팍 튀겼어요. 보통 사람들은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하지 못할 경지 아닌가요?”
제니의 말이 맞긴 했다. 마법에 재능이 없는 사람은 이론으로 중무장해도 불씨 하나 만들어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전직이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제니의 말이 위로로 와 닿지 않았다.
“히유, 하부지네 지베 가바야 할 거 가튼디.”
이 나라의 마법으로는 양대 리그 중 하나인 티그리스 가문이 외가였기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물론 아빠가 쉽게 허락해 주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요즘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은 듯 아빠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나를 가슴으로 품어 반들반들 윤이 날 정도로 애틋하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니 공작님께 한 번 말씀해 보세요. 그리고 저도 데려가는 거 잊지 마시고요. 짐은 미리 싸 놔야…… 아…….”
이번엔 기필코 나를 따라오려는 의지를 불태우려고 시도만 하다가 푸시시 꺼져 버린 제니는 탄식을 했다.
“왜여? 먼 일 잇써여?”
“네, 생각해 보니 모레가 공작부인의 기일이세요.”
이곳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다. 그 기간에 미친 듯이 앞날만 보고 움직였다. 그렇기에 판테르 공작가의 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직 어린아이인 내게 그런 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니.
“구로쿠나. 후음, 하부지 지베 가는 거 안 대겟네.”
판테르 공작부인이 티그리스 공작가의 늦둥이 딸이기도 하니 그곳 분위기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아퀼라 공작가도 새어머니를 좋아하는 언니가 있으니 마찬가지일 것이고.
결론은 이 방에 쥐 죽은 듯이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얌전하게 앉아 마법책만 들여다봤다. 판테르 공작부인의 기일이 곧이라는 말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제대로 읽지 못하고 책장만 팔랑팔랑 넘길 때 씨엘이 와서 팔짝 뛰더니 책 위에 앉았다. 공부하지 말고 저를 봐 달라는 듯한 금안을 본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히유, 오쩔수 업찌. 아랏써. 노라주께.”
공부도 안 되는데 책만 붙들고 있는다고 마법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씨엘이 원하는 대로 실컷 놀아 준 덕택에 내가 먼저 녹다운을 당했다.
“역시 마봅사는 체려기 야케.”
그렇다고 신체 단련을 할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은 직종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 세뇌했다. 실제로 베네딕트 제국에서 마법을 배울 때도 란슬롯 오빠가 달리기라도 하라고 했지만 거절한 적이 있었다.
잠시 베네딕트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나는 속으로 한숨만 쉬었다. 옛날 생각해서 뭐하겠는가. 그저 가슴만 아플 뿐이지.
내 핏줄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충분히 사랑스러운 떡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다들 제 핏줄이 아님을 알 것인데도 판테르 공작부인에게 못 해 준 게 잔뜩 있었던 이들은 그 모든 걸 내게 해 주고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고 말이다. 이곳 문자도 몰라야 정상인 내가 고대어를 읽는데도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겨 버렸다. 추궁했다면 꼼짝없이 토설했을지도 모르는데.
“제니, 이짜나여. 낵아 징짜 부인이랑 달마써여?”
“네!”
씨엘과 놀아 주다가 체력이 바닥난 나는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한 채 제니에게 물었다. 그러자 제니는 찰나의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축 늘어진 찹쌀떡 같은 아가씨를 안아 왔는데 저도 모르게 왈칵 울어 버렸답니다. 부인을 너무 똑 닮아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훅, 치고 들어오는데…….”
안 물어봤으면 큰일 났으려나.
제니는 딱 한 마디만 물었는데 열 마디 이상을 말해 줬다. 그간 제가 겪어 본 판테르 공작부인을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입술을 다물었다. 그 마지막이 판테르 공작부인의 죽음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분 그리미 잇찌 안나여? 보고시프다.”
“있긴 있어요. 한데 그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요. 부인께서 돌아가신 후로 공작님께서 문을 걸어 잠가 버렸거든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 본인의 마음을 닫듯 부인의 방문을 걸어 잠근 건가. 잠긴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게 아직 그럴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
조용하게 이틀이 흘렀고 아침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난 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후아암.”
늘어지게 하품하다가 옆에서 입을 쩍 벌리고 똑같이 하품하는 씨엘을 봤다.
“씨엘, 조은 아침이야.”
미야옹.
내 품에 와서 비빈 씨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져야만 했다.
“아빠랑 같이 밥 먹으러 가자꾸나.”
“니에.”
방으로 들어와 나를 번쩍 안아 올린 아빠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평소처럼 고기를 조각내어 내 입에 넣어 줬지만, 아빠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몇 번 먹지 않고 식기를 내려놨다.
“아빠, 맘마 머거여.”
“응? 아니야. 오늘은 입맛이 별로 없어서 말이다.”
벌써 얼굴이 반쪽이 된 듯한 얼굴을 본 나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어서 아빠의 입에 넣었다.
“아빠가 맘마 안 머그면 하눌에서 예뿐 부인이 시러할지도 몰라여.”
“음? 아, 그래. 세라피나는 내가 식사를 안 할 때마다 입에 억지로 구운 찹쌀떡을 물려 주곤 했지. 배가 든든해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내가 먹여 주는 대로 꾸역꾸역 먹은 아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나를 안고 어디론 가로 향했다. 판테르 공작저를 전부 돌아다니진 않았지만, 아빠와 함께 가는 곳은 너무나 낯설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복도를 걷다가 멈춘 아빠는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묵직하게 누르는 숨결의 무게가 머리카락을 스쳤다.
굳게 닫힌 문을 보고만 있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은색 열쇠를 꺼낸 아빠는 조그만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덜컹-
둔탁한 금속성 소리가 들리자 아빠는 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입술을 말아 깨물었다. 잔뜩 긴장이라도 한 듯한 아빠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끼이익-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문임을 알게 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귀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 모든 게 그대로 멈춰 버린 세상이 앞에 펼쳐졌다.
“이곳은……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보내야 했던 그녀의 방이란다.”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아빠의 목소리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다. 보통 귀족가의 안주인 방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하지만 이 방은 담백했다. 기본적인 가구와 더불어 기사 출신이라 그런지 검이 몇 자루 장식되어 있었다. 그녀의 평소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방을 보던 나는 벽을 보다가 그대로 굳었다.
“어떠냐, 내가 사랑하는 이와 닮았더냐. 열여덟 살 때 그린 그림이란다.”
“…….”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진짜 이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림 속에 존재하는 판테르 공작부인은 베네딕트의 황녀였던 내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아 놓았다.
나 역시 성년식이 되기 전에 오빠의 배려로 마법탑을 벗어나 황궁에 가서 초상화를 그렸다. 그때 그린 내 모습이 이곳에서 옷과 배경만 달리해서 존재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 달맛써요.”
“그렇지? 우리 라피가 열여덟 살이 되면 저 모습이 되어 있을 거야.”
이곳에 사는 또 다른 내가 판테르 공작과 결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소름이 끼친 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똑똑똑-
“공작님, 급히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마침 벤스가 와서 노크하며 아빠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평소 장난기를 쪽 뺀 목소리에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봤다.
“아빠는 잠깐 일하러 가야겠구나. 우리 라피도 같이 갈까?”
“잠깐만 요기 잇쓸래요.”
“그래. 그럼 좀 이따 보자꾸나.”
아빠가 나를 내려놓고는 벤스와 나갔다. 물론 밖에 있는 이들이 나를 볼 수 있게 문을 열고 가는 것은 잊지 않으셨다.
아빠가 나가자 나는 짧은 다리를 이용해 방 안을 조심히 걸어 다녔다.
좋은 말로 하면 소박하고 나쁜 말로 하면 볼 것도 없는 방 안을 보다가 작은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움? 요고만 때깔이 다르네.”
다른 책이 우중충하다면 두 개의 책은 표지가 산뜻한 색이었다. 많이 읽은 듯 닳아진 커버를 보고는 손을 뻗었다. 좀 높은 곳에 있어서 손이 닿지 않아 까치발을 디뎠다.
간신히 책에 손이 닿았다. 손가락에 기억도 나지 않은 젖 먹던 힘까지 불어 넣어서 책을 빼냈다. 반쯤 책을 뺐을까. 뒤에서 익숙한 소리에 얼른 손을 내렸다.
“아가씨, 이만 나오시는 게 어떨까요? 여긴 환기가 되어 있지 않아서 오래 계시면 몸에 좋지 않을 거예요.”
제니의 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 * *
라피가 제니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가자 밖에서 대기 중인 기사가 문을 잠갔다. 문이 닫히며 미세한 진동이 생겨서인지 라피가 꺼내려고 한 책 두 권이 책장에서 떨어지며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책에 그려진 삽화는 이 시대에 존재하지 않은 물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