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푸른 두 눈에 화가 잔뜩 일렁였다. 건드리면 폭발할 것 같은 아빠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오스카, 이 정도면 아이 앞에서 써도 되나?”
아빠의 말에 오스카는 말없이 엄지를 세웠다. 뒤통수에 눈이 있는지 오스카의 제스처를 본 듯한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 이건 오해…….”
“오해에에에? 이게 어딜 봐도 오해인가. 내 딸 얼굴에 땀이 뻘뻘 흐르고 옷에 흙이 잔뜩 묻었는데.”
“이건 그러니까 처제랑 같이 꽃밭에 씨를 뿌리는 중이었습니다.”
차마 전후 사정을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리큐르 초콜릿을 먹고 꽃밭을 망가뜨렸다고 하면 아빠가 형부를 가만두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장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작아지는 사위를 본 나는 형부의 손을 놓고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오, 우리 라피! 아빠랑 약속도 잊고 연락을 안 하더구나.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 후딱 왔단다.”
단 하루라도 이곳에 딸을 두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불태운 아빠는 형부를 매섭게 쏘아보며 나를 안아 올렸다.
“아빠, 낵아 혐부 꼿바틀 망가뜨려쏘여.”
술떡이 되어서 망가뜨린 게 아니라 놀다가 망가뜨렸다고 말하며 책임을 지기 위해 씨를 뿌리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라피, 책임을 지는 건 매우 훌륭한 생각이란다. 우리 딸이 어린 줄로만 알았더니 다 컸구나.”
“헤헤.”
헤실헤실 웃는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준 아빠는 형부를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봤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형부는 곡괭이를 버려 두고 달려왔다.
“아무리 내 딸이 잘못했다지만 아이가 이런 걸 하겠다고 해도 말려야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일하는 처제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꼼지락대며 씨앗 뿌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심장에 무리가 올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우리 라피가 귀엽다고 해도 자네 딸은 아니지 않나. 내 귀한 딸의 손에 물 묻혀도 뭐라고 할 판에 흙을 묻히다니.”
아빠의 가슴에 찰싹 붙어서 빵빵함을 음미하고 있을 때 언니가 달려왔다. 언니 역시 아빠가 왔다는 것을 보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아마도 판테르 공작저 마법사를 닦달해서 아퀼라 공작저의 마법사와 통신이 되자마자 허락받지 않고 바로 넘어온 것 같았다.
“아버지,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오셨나요.”
“내가 내 딸 집에 오는데 연락이란 것을 해야 하느냐. 볼일 있으면 그냥 올 수도 있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라피를 데리러 왔다. 이 녀석이 여기에서 뭔 일을 하며 정신이 없는지 연락하기로 한 약속을 잊은 듯해서 말이다.”
그 뭔 일이 꽃밭에 씨를 뿌리는 거라는 것을 알고 아빠의 기분이 약간 저조한 듯 보였다.
“아버지, 이왕 이곳까지 걸음하신 김에 나들이 가지 않으시겠나요? 안 그래도 라피랑 나들이 가려고 도시락 준비 중이었습니다.”
나들이란 말에 아빠의 귀가 쫑긋해진 듯했다.
“좀 쉬시다가 도시락이 완성되면 그때 움직이는 게 어떨까요. 우리 라피 처제도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요.”
“뭐 나들이 가려면 라피도 준비를 해야 하니…… 그나저나 자네는 언제까지 무릎 꿇고 있을 생각인가. 누가 보면 내가 폭군인 줄 알겠군.”
“동부의 폭군이 맞…… 크흠, 아닙니다. 그저 라피 아가씨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죄를 지어 이실직고하려고 그리한 것입니다.”
“됐고, 이만 일어나게. 우리 라피 앞에서 나를 얼마나 못된 가주로 만들 셈인가.”
아빠의 말에 카이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일어나 뒤에 섰다.
“라피, 얼른 씻고 옷 갈아입은 후에 나들이 가자꾸나.”
“니에. 나드리 조아여.”
일전에 티그리스 공작가의 식구랑 나들이 갔을 때를 떠올린 나는 활짝 웃으며 아빠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말했다. 그러자 아빠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내 등을 다독였다.
언니와 형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서 아빠가 기다리는 동안 나는 뽀득뽀득하게 씻겨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 신물 나게 입어 본 옷 중 하나를 입고 아빠에게 갔다.
“할아부지, 안냐하세요. 콜린이에요.”
마침 공부를 끝내고 나온 콜린은 처음으로 본 제 할아버지를 보고 조금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흐음, 네가 에리카의 아들이라고? 에리카는 하나도 안 닮았구나.”
“네, 구래두 어무이 아들인 건 마자요.”
콜린을 유심히 본 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카를 닮았으면 더 잘생겼을 건데.”
형부 외모를 가지고 은근히 타박하는 듯한 말을 한 아빠는 마침 안으로 들어온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리…….”
“이모, 이리와. 나랑 가치 가자.”
아빠가 손을 뻗기 전에 콜린이 먼저 달려와 내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아빠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갔다.
“콜린이 라피를 좋아해서 그래요. 둘이 사이가 안 좋아서 싸우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라피가 옷 갈아입고 왔으니 얼른 그 나들이란 것을 가 보자꾸나.”
내 뒤에 있는 언니의 말에 아빠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놀드가 커다란 바구니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방금 막 만든 따끈따끈한 음식이 담긴 바구니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언냐, 얼른 가여. 아빠도 가치.”
나들이 가고 싶은 나는 얼른 언니를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움직였다.
“제롬, 얼른 가요. 아버지도 얼른 움직이세요. 우리 라피가 나들이 가고 싶었나 봐요.”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판테르 공작저로 돌아왔지만, 아빠가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아빠가 아닌 제니와 함께 정원으로 나들이 아닌 나들이를 가야만 했다.
형부의 꽃밭을 망가뜨린 덕분에 우린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마차를 타고 한적한 곳에 내렸고 그곳엔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조금은 투박하지만 여러 색깔의 들꽃이 반기는 들판에 형부가 돗자리를 폈다.
“이곳에서는 마음껏 데굴데굴 굴러도 돼. 지지 묻어도 되니까 실컷 놀렴.”
저번엔 술떡이 되어서 정신없는 와중에 꽃밭에서 굴러다녔지만, 본디는 그럴 나이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빠 옆에 앉았다.
“아빠눈 나드리 간 적 잇써여?”
“음? 아니 없구나. 너무 바빠서 나들이가 뭔지 모르고 지냈었지. 예전에 세라피나가 함께 나들이 가자고 장소를 봐 뒀다는 말을 하긴 했다만…… .”
아련한 표정을 지은 아빠는 나를 안아 다리에 떡하니 올렸다.
“구롬 이버니 첨이네여? 언냐랑도 첨으로 나드리 온거구여?”
“음?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에리카와도 처음으로 나들이 온 것이로구나. 에리카, 아비가 바빠서 너와 유진과 함께 나들이 한 번 못 온 거 미안하구나.”
언니가 어렸을 때 제대로 놀아 주지 못한 것을 사과하자 언니는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렸을 땐 섭섭했는데 제가 어른이 되고 보니 알 것 같아요. 그땐 서로가 다 힘든 시절이었잖아요. 아버지도 바빠서 저희를 봐줄 시간 없었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이해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고맙긴요. 그나저나 티그리스 가문에게 라피의 첫 나들이를 빼앗겨 놓고 아직도 나들이를 안 간 건가요?”
“그건, 너와 함께 가고 싶어서 미룬 거란다. 크흠흠.”
아빠, 귓바퀴가 살짝 붉어진 거 자각은 하고 계시는지요.
헛기침하며 언니의 시선을 살짝 피한 아빠는 내 머리만 계속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미소 지었다.
“우리 라피 덕분에 못 해 본 것도 하게 되었네요. 요 인절미가 조금만 더 일찍 떨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더 늦게 안 떨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 어떨까요. 만약 처제가 늦게 나타났다면 그만큼 골이 더 깊어졌을 테니까요.”
바구니에서 간식거리를 죄다 꺼낸 형부는 아빠에게 시원한 차를 권했다. 더워서 얼굴이 븕게 물든 것 같다며 시원한 것을 마시라는 말에 아빠는 두말하지 않고 차를 받아 마셨다.
“이모, 조기 나비야. 우리 가치 가서 잡자.”
“기찮…….”
귀찮다고 말하려는 찰나에 콜린이 나를 잡아당겨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내 손을 잡고 나비에게 돌진했다.
이젠 나비 잡으려고 팔짝팔짝 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콜린이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추기 위해 건성으로 움직였다.
아까 씨를 뿌리느라 조금 힘든 나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서 콜린만 봤다. 남자아이라 그런지 힘이 넘친 콜린은 잡히지 않고 기를 쓰고 팔랑이며 날아다니는 나비를 잡기 위해 잘 뛰었다.
역시 몸과 마음이 젊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다.
내가 나비를 잡기 위해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콜린을 구경할 때 뒤에 계신 분들은 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라피가 세계지도는 그리지 않았더냐?”
그만하지? 나 이제 쉬야 안 하는데.
“아쉽게도 그건 경험하지 못했어요. 아버지.”
“그래? 난 또 낯선 환경 때문에 세계지도를 그릴 줄 알고 신제품 팬티 기저귀를 가져왔는데.”
아빠의 말에 순간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 답답한 기저귀를 찰 바엔 차라리 밤에 안 자고 말지.
“처제, 쉬야 마려? 내가 같이 가 줄까?”
“쉬야 안 마려여.”
콜린을 보는 것도 슬슬 지겨운 나는 터벅터벅 걸어 자연스럽게 아빠의 가슴에 안겨들었다. 앉아 있어서 그런지 낙사할 위험이 없어 편하게 앉아 언니와 형부가 먹여 주는 간식을 야금야금 먹었다.
“와! 나비 자밧써요.”
의지의 아퀼라 가문답게 가까스로 눈 삔 작은 나비 한 마리를 잡아 온 콜린이 방싯방싯 웃으며 달려왔다.
“오! 역시 우리 아들은 집중력이 좋기도 하지. 뭐든 한 번 찍으면 놓지 않은 것을 봐서는…….”
“에리카를 닮은 모양이로군. 외모는 아비 판박이여도 성격은 어미를 닮아서 다행이로구나.”
“그렇죠? 에리카가 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아이 낳고 잘살고 있지요. 후후.”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우리 딸한테 언제 면사포를 씌워 줄 생각인가.”
“네, 네?”
아빠의 말에 형부는 뜨거운 숯 위에 앉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빠 앞에서도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잘만 말하던 형부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잖은가. 설마하니 이대로 내 딸한테 웨딩드레스도 안 입혀 주고 평생 살 건가?”
“그, 그건…… 아, 아닙니다. 아, 아버님만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이라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늦었지만 두 공작가의 결합엔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아침에 뚝딱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아버지…….”
“애까지 낳았는데 어쩌겠느냐. 어쩌다가 저런 늙은 놈을 좋아해서는…… 내가 다음에 여기 올 땐 너희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길 바라마.”
“아, 아버지…… 아버지…… 흐윽.”
아버지만 연거푸 부른 언니는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아빠를 끌어 앉은 탓에 나는 샌드위치가 되어 찌그러졌다.
“가, 감사합니다. 아버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그간 마음고생하게 해서 미안하구나. 우리 딸 손 잡고 에스코트해 줘야지.”
“아버지…… 흐윽.”
그간 아픔이 모두 눈물로 희석되진 않겠지만 언니는 아빠를 붙들고 울고 또 울었다. 언니의 눈물이 잠잠해질 무렵 콜린의 두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마치 사고 치기 직전인 듯한 콜린은 아빠를 보며 말했다.
“할아부지, 이모가 겨론하려면 할아부지한테 허락 바다야대요?”
“당연하지. 근데 그건 왜 묻는 것이더냐.”
언니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던 아빠는 콜린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할아부지, 이모를 제게 주세여. 햄복하게 해 줄 자신 이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