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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45)화 (45/164)

45화. 

“우웅, 요긴 오디? 나눈 라삐!”

아직도 비몽사몽한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우리 라피 아가씨, 이제야 깨어나셨군요.”

“카이? 요긴 오디에여?”

“에리카 아가씨의 방이랍니다.”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는 카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어제 언니 몫이라는 초콜릿을 먹었고 거기에 술이 들어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 후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물 드시겠습니까?”

“니에.”

카이의 말을 듣자마자 지독할 정도로 갈증이 느껴졌다. 그가 자리끼를 따라 주자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그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옆에 다른 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얜 모야. 왜 요기 잇눈 고져?”

콜린이 옆에 누워 자고 있자 말랑말랑한 볼을 콕콕 찌르며 물었다.

“어제 아퀼라 도련님이 생떼를 부려서 아가씨와 함께 잠잔 거랍니다. 그나저나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십니까?”

“무순 일이여? 라삐는 언냐 쪼꼬 머꼬 잔고 아뉜가여?”

“네, 아니었습니다만.”

방긋 웃은 카이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을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낵아 혐부의…….”

“네, 술떡이 되어 아퀼라 공작님이 직접 가꾼 꽃밭을 초토화시켰답니다. 매우 귀여웠지요. 웃으면서 데굴데굴 구르는데 아퀼라 공작님의 표정이 꽤 볼만했고요.”

“지, 징짜여?”

“네, 뭐 그래도 화전이 된 라피 아가씨를 보고는 아무 말씀도 못 하셨지만요.”

인절미에 이어서 술떡도 모자라 이젠 화전이 된 건가. 아주 찹쌀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간식거리가 다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유과도 나올지도.

“히잉, 큰일낫따. 혐부 화 마니 낫쓰면 어또카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리큐르 초콜릿 하나에 술떡이 되어서 주사를 부릴 줄이야.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터져 미처 대비하지도 못한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 화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와중에도 인절미를 서로 안겠다고 다투셨으니까요.”

“웅?”

“에리카 아가씨께서 라피 아가씨를 안고 데려가려고 하자 아퀼라 공작님이 본인이 안겠다고 해서 약간의 다툼이 있었답니다.”

물론 에리카 아가씨의 승리로 돌아갔지만요. 라고 방긋 웃으며 말한 카이는 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쑥 넣더니 그대로 들어 올렸다. 시녀들이 떠 놓고 간 세숫물에 수건을 적신 카이는 내 얼굴을 조심히 닦았다.

“어제 있었던 일은 공작님께 비밀입니다. 아셨죠? 아는 그 즉시 아퀼라 공작님의 목숨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니에.”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언니네 집에서 술떡이 되어 돌아다녔다고 하면 아빠한테 혼날 게 분명했다. 절대적으로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한 나는 자는 콜린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곳으로 오는 형부를 본 나는 뽀짝뽀짝 걸어가서 두 손을 꼼지락대며 말했다.

“혐부, 자모테써여.”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지 않는가. 형부를 보자마자 바로 사과를 한 내 몸이 순간 두둥실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처제가 뭘 잘못했지?”

“혐부 꼿바츨 망가뜨려써여.”

형부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나는 여전히 고개 숙인 채 사과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지?”

“우웅, 라삐가 혐부 꼿바테 씨 뿌려여.”

“그렇지. 그럼 우리 오늘은 형부 꽃밭에 새로운 씨앗 뿌리러 갈까? 물론 맘마 먹고 나서.”

“구롬 용소해 주는 고에여?”

“용서는 무슨, 어린아이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단! 처음은 몰라서 그런 거니 잘못한 게 아니지만 두 번째부터는 맴매할 수도 있단다.”

어휴, 이 쫀득한 인절미한테 어떻게 맴매를 해, 그냥 참고 말지.

작게 중얼거린 형부의 목소리에 그때야 고개를 들고 그를 봤다. 화가 났을 것으로 여겼지만 형부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웃음기가 드리워진 형부의 목에 손을 두른 나는 그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했다.

“요곤 하해 키쑤!”

“어, 으음…… 우리 처제, 오늘 또 뭐 망가뜨리지 않을래? 우리 집에 귀한 게 상당히 많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형부가 망가진 것 같았다. 그런 형부를 본 아놀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될까? 화해 키스가 좀 부족…….”

“하면 제가 해 드릴까요? 우리 아가씨를 꽃밭에 방목한 죄가 크니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갑자기 필요 없어졌습니다.”

카이가 중간에 나서서 말하니 형부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와중에 잠에서 깬 콜린이 두다다닥- 뛰어왔다. 오른팔로 나를, 다른 왼팔로는 콜린을 안아 올린 형부는 팔 힘을 자랑하듯 매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모, 뽀뽀!”

“응?”

“어제 이모가 나한테 귀엽다고 뽀뽀해졋는데…… 헤헤.”

아무래도 술떡이 되어서 여기저기 헤픈 짓을 너무 많이 하고 다닌 듯했다.

“시러. 이젠 제정신이라소 안 해.”

“칫! 또 아무이꺼 쪼꼬 머그면 돼지.”

“시러. 울 아빠가 알묜 너랑 다시는 못 만나.”

“히잉, 그런 시룬데.”

입술을 삐죽삐죽 내밀며 조금 못마땅한 티를 내는 콜린의 볼에 형부가 입 맞췄다. 그러자 고개를 슬쩍 뒤로 뺐다.

“아부지 뽀뽀는 별루…… 이모가 해 준 게 젤 조아.”

“이 녀석, 사춘기도 아닌데 벌써 아비가 싫어진 게냐. 충격이로군.”

“그치만 이모가 젤 이뿐 거는 어쩔 수 업써요.”

“그건 맞지. 하하하, 우리 아들은 나를 닮아서 눈이 참 높구나.”

저 말이 네 살짜리 아들과 나눌 말이란 말인가. 형부와 콜린을 흐린 눈으로 볼 때 언니가 나타나더니 대뜸 나를 가로채 안았다.

“우리 라피, 뽀뽀!”

아무래도 난 보는 사람마다 뽀뽀하고 다닌 게 분명했다. 내민 볼에 모닝 뽀뽀를 해 주자 언니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이 녀석, 어제 언니 초콜릿을 먹고 주사를 부리다니, 또 그런 일이 있으면…….”

“혼낼끄에여?”

“아니, 칭찬할 거야. 어휴, 어쩜 그리도 애교가 넘쳐나니.”

어제 내가 잠들기 전까지 언니네 가족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버지한테는 비밀로 할까? 아버지가 알면 우리 라피는 언니랑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니까.”

2차로 입단속을 당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동생이 아니라 딸 같아서 너무 좋다. 우리 라피, 언니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

내 볼에 입맞춤을 한 언니는 이젠 제 얼굴을 비비적댔다. 그 모습을 본 형부가 때는 이때다를 외치는 듯한 눈빛을 한 채 콜린을 보며 말했다.

“콜린, 이모 같은 여동생 하나 있으면 어떨 것 같니?”

“이모 가튼 동생이 생기리란 봅은 업짜나요.”

콜린이 단칼에 잘라냈다. 형부와 언니가 밤새도록 으샤으샤 한다고 해도 나를 닮은 아이를 낳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언니가 아빠가 사랑한 부인의 소생이 아니니 말이다.

“역시 우리 콜린은 나를 닮아서 똑똑하단 말이야. 자! 그럼 식사하러 가자꾸나. 가브리엘 백작님도 따라오시지요. 라피 꽁무니 따라다니느라 힘들었을 터이니.”

친정집 보좌관까지 챙긴 언니는 나를 안고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이미 음식이 놓여 있었다. 냅킨을 두른 나는 천천히 음식을 음미했다. 

이따금 내 눈치를 보며 채소를 골라내던 콜린과 시선이 마주하면 조그만 어깨가 움찔했다. 어제는 채소를 씹어 삼키더니 오늘은 씹는 게 아니라 거의 삼키다시피 했다.

저러다가 탈이 날 것 같았지만 위장이 튼튼한지 콜린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식사를 끝낸 후 우유를 다 마신 나는 아퀼라 공작저에서 매우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형부의 꽃밭에 간 나는 어제의 내가 만들어 놓은 작품에 할 말을 잃고 멍 때렸다. 잠시 후 고용인들이 오더니 망가진 꽃들을 전부 쓸어갔다.

어제의 내 멱살을 잡고 두드려 패고 싶은 것을 꾹 참은 나는 형부가 준 씨앗을 뿌렸다.

“처제, 그 씨앗은 이쪽에 뿌려 줘. 그리고 이 까만 씨앗은 저쪽에 뿌려 주면 돼.”

내가 씨앗을 뿌리면 형부는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진짜 본인이 가꾸는 꽃밭이 맞는지 고용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본인이 움직였다.

“히유, 힘드러.”

씨앗만 뿌렸는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잠시 멈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려는 찰나에 콜린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제 손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아 주고는 뒤에 서 있는 시녀가 들고 온 쟁반에서 주스를 내려 내게 줬다.

“우웅?”

“이모, 이거 머거.”

“아, 나 머그라고? 고마버.”

“헤에에.”

두 손으로 주스 잔을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콜린, 내 것은 없니?”

곡괭이를 들고 땅을 고르는 형부의 말에 콜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업써요.”

“아니 왜?”

“아부지는 어무니가 챙기니까요.”

“에휴, 이래서 아들은 낳아 봐야 소용이 없어. 딸이 갖고 싶은데.”

“이모 달믄 동생 나아줄 거 아니면 피료업써요.”

이번에도 단호하게 말한 콜린은 연방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줬다.

“이모, 나가튼 남자는 별로 업써.”

“하고시픈 말이 머야?”

“조신한 남자가 대서 외조 잘할 수 잇써.”

“풉!”

오렌지 주스를 마시는 중에 콜린의 말을 듣고 그대로 뿜어 버렸다. 이 와중에도 깨알 어필을 하는 콜린이 얄밉지는 않았다. 빈 잔을 시녀에게 건넨 나는 콜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으휴, 귀여븐 것 가트니라고.”

“헤에, 나 귀여버? 그럼 나랑 겨론해.”

“군데 난 멋찐 남자랑 겨론할거야.”

“움, 나중에 멋찐 남자가 댈거야. 그래소 이모랑 가치 살거야.”

“어, 구래구래. 곰부 열씨미 하면 생각해 보께.”

미래에 멋진 남자가 될 거라고 예약한 콜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자 콜린이 얼른 공부하러 간다고 후다닥 뛰어갔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처제한테 부탁할걸. 우리가 계속 공부하라고 할 땐 이리 빼고 저리 빼더니 하하하.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을 줄이야.”

뭔가 맥이 빠진 듯한 형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땅을 고르게 폈다. 어차피 하루 만에 다 하지 못하는 작업이었기에 나는 형부를 도와준답시고 아침마다 꽃밭으로 출근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평소처럼 씨를 뿌리는 데 카이가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아가씨, 공작님께 연락한 적이 있었던가요?”

“아녀, 히익! 큰일 낫따!”

이곳의 평범한 삶에 젖어들어 있었던 나는 아빠랑 연락하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얼른 아빠한테 연락할 필요성이 생긴 나는 얼른 형부에게 달려갔다.

“혐부, 아빠한테 연락하수 잇께 해 주세여.”

“음? 아버님께? 아! 이제 보니 우리 처제, 판테르 공작저에 연락을 안 했구나. 그래. 얼른 가서 아버님께 며칠 더 있다가 갈게요. 라고 연락하자.”

사심 가득한 표정을 지은 형부가 내 손을 잡고 한 발 떼기도 전에 앞에 아놀드가 매서운 속도로 뛰어왔다. 나이에 맞지 않은 뜀박질을 하며 온 아놀드는 목이 막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그, 그게…….”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앞쪽에서 흉흉한 기세가 낮게 드리워지며 카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안달복달해서 라피를 보냈더니 감히 막일을 시켜? 이런 조옷…….”

“크흠흠, 공작님 아가씨 앞입니다만.”

뒤에서 따라온 오스카가 아빠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그때야 나와 시선이 마주친 아빠는 애써 표정을 풀더니 형부를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런 주옥같은 놈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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