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제롬이 직접 훈련 참관하며 훈련시킬 때가 제일 싫고 무섭고 짜증난 기사들이었다. 이 집안의 가주로 월급을 주는 고용주는 매우 혹독했다. 일명 돈을 주니 그 값을 하라는 뜻이 내포된 훈련에 기사들 사이에서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제롬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았다. 독종 중의 독종이었다. 가족들 앞에서만 생글생글 웃을 뿐 다른 이 앞에서는 사늘하기만 했다.
그런 제롬이 오늘 연무장에 왔다. 요즘 영지 일은 에리카가 전담하다시피하고 아이마저 데려가니 할 일이 없어진 제롬은 연무장에 자주 와서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제롬의 날카로운 눈빛이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움찔움찔했다. 그 어떤 것보다도 오싹오싹하게 만들 수 있는 제롬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을 본 게 분명했다.
제롬이 느릿하게 움직이자 옆에 있는 단장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오늘이 너희 제삿날이라고 알려 주는 듯한 표정이었다.
“전원 자세를 잡게나. 오늘은 특별히 내가 훈련을 직접 감독할 것이니.”
드디어 오고야 말았다. 모두 치를 떠는 제롬의 훈련 방식은 매우 간단했다. 하지만 그만큼 힘이 들었다. 기본 중의 기본인 가로베기와 세로베기를 하는데 군더더기 없는 자세를 잡아야 했다.
단 한 명이라도 자세가 흐트러지면 모두에게 연좌제를 물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곤 했다. 제롬이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기사들은 앓는 소리를 했다. 제발 오늘만은 무사히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이렇게 약해 빠져서 어찌 아퀼라의 기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하늘을 나는 독수리 깃털이라도 닿을 수 있겠는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목소리에 기사들은 이를 꽉 깨물었다. 기껏 기본 동작에서 자세가 살짝 풀어졌다고 약해 빠졌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 기사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나름 잘나가는 기사였지만 이곳에서는 신참처럼 대해졌다. 다들 이를 악물고 할 때 우연히 고개가 돌아간 기사의 시선에 아이가 보였다.
포동포동한 얼굴의 귀여운 아이는 자신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아퀼라 공작저에 존재하지 않은 생명체를 본 이들이 하나둘 늘어갔다.
기사와 시선이 마주친 아이는 방긋 웃었다. 여기 있는 기사의 아이인가 싶을 때 아이의 눈동자가 제롬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대범하게 연무장 안으로 침범을 시도하며 두다다닥- 뛰었다.
“혐부우우우우!”
“음?”
형부? 누가?
순간 베기 연습을 하던 기사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이를 보자마자 잔뜩 굳어 있던 제롬의 표정이 새벽에 막 개화한 꽃처럼 변했다.
“우리 귀여운 인절미, 아니 처제!”
처제? 저 꼬맹이가?
제롬은 이제껏 판테르 공작저에 갈 때마다 불필요한 인원은 데려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제롬의 처제 정체에 대해서는 극소수만 알고 있었다. 그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기사들은 아이가 두 팔을 쭉 내민 채 넘어지자 순간 흠칫했다.
그 상태로 일어나지 못한 아이를 본 제롬이 후다닥 달려가 일으켜 세웠다. 콜린이 넘어졌을 땐 알아서 일어나라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한 제롬은 아이의 옷에 묻은 흙까지 탈탈 털어 줬다.
순간 자신들의 가주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제 자식에게도 해 주지 않은 행동에 기사들은 두 눈을 깜빡였다.
“우리 처제, 괜찮아?”
제롬이 애달프다 못해 달달한 목소리로 말하자 기사들은 기겁했다. 하지만 뒤이은 아이의 행동에 살살 녹아 버렸다.
두 손을 앞으로 쭉 내민 아이는 울먹울먹하며 말했다.
“아포, 요기 아포, 호호 해 주세여.”
철컹-
몇몇 기사가 저도 모르게 검을 놓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제롬은 그런 기사들을 호통치기보다는 아이의 조그만 두 손을 붙잡더니 입김을 불어 줬다.
“호호, 아이고, 우리 인절미 손이 빨갛게 부었네. 이 일을 어쩌지. 아직도 아파?”
“아니여. 혐부가 호호 해서 이젠 안 아포여.”
어리광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연무장은 한순간에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심장을 부여잡고 연무장에 쓰러지다시피 한 기사들은 방긋방긋 웃는 아이를 보며 볼때기를 한 번만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을 든 손이 움찔움찔했다.
“차, 찹쌀 인절미야. 저 두 볼 좀 봐. 빵빵하게 부푼 인절미!”
“세상에나, 요즘엔 인절미가 굴러다니네. 아주 쫀득쫀득할 것 같은데.”
아이의 부어오른 손바닥에 입맞춤한 제롬은 손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아 줬다. 그리고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귀, 귀여워…….”
“나도 저런 찹쌀 인절미 처제…….”
딸뻘인데 처제란다. 한데 아퀼라 공작의 처제라면 부인의 동생이라는 건데 제롬의 처가는 판테르 공작가였다.
“판테르 공작님이 늦둥이 보신 건가.”
“판테르 공작님이 애를 낳았으면 우리가 모를 리 없잖아.”
“근데, 인간적으로 너무 닮은 것 같은데. 판테르 공작부인을 아주 박아 놨어.”
수년 전에 판테르 공작부인을 본 적 있었던 기사의 말에 다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저 아이가…….”
“말도 안 돼. 그분은 돌아가셨는데. 그리고 만약에 저 아이가 판테르 공작님의 딸이라면 티그리스 공작님의 외손녀가 되잖아.”
“맞아. 만약에 그분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입양하면 티그리스 공작가에서 난리났겠지.”
기사들끼리 소곤거릴 때 제롬은 라피를 꼭 안아 올렸다. 그러자 조그만 두 손이 제롬의 목을 끌어안았다.
“우리 처제, 살이 좀 찐 것 같네.”
“나 무거어여?”
“응, 무게감이 느껴지는걸.”
“흥, 오늘 혐부랑 말 안 할끄야!”
삐쳤는지 고개를 홱 돌린 아이를 본 제롬은 연방 웃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혐부랑 가치 맘마도 안 머글끄야.”
“헉!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우리 날씬하고 독수리 깃털보다 가벼운 아름다운 레이디, 오늘은 제 품에 안겨서 가실까요.”
“흥칫뿡.”
연방 콧방귀를 뀌는 라피의 모습이 귀여운 나머지 제롬이 도톰한 볼에 입 맞췄다. 하지만 얼른 고개를 뒤로 빼냈다.
“안타깝지만 그런 스킨십은 허용하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카이의 손이 라피의 볼을 막았다. 덕분에 카이의 손등에 입술이 부딪친 제롬은 미간을 팍 찡그렸다.
“여기에 가브리엘 백작이 올 것이란 생각은 못 해 봤군.”
“그럼 지금 생각하고 보면 됩니다. 아퀼라 공작님의 시선에 오롯이 담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요.”
카이가 웃으며 아까 판테르 공작이 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 종이엔 아퀼라 공작저에 갔을 때 조심하라고 위험 순위표가 적혀 있었다.
1순위 제롬
2순위 아퀼라 공작
3순위 사위놈
그 셋 모두에 해당하는 눈앞의 남자는 어깨만 으쓱였다.
“가브리엘 백작, 이왕 여기까지 오신 거 우리 기사들을 훈련 좀 시켜 주시지요.”
“제가 왜요?”
“저는 지금부터 우리 처제랑 놀아야 하거든요. 에리카가 없을 때 단둘이 노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막 굴려도 되니까 잘 부탁합니다.”
“저는 판테르 공작님의 사람입니다만.”
“판테르 공작가의 기사들을 굴릴 때처럼 굴리셔도 됩니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요. 그럼 전 이만. 처제, 가브리엘 백작이랑 기사들한테 인사해야지.”
제롬의 말에 라피는 방긋 웃더니 손을 펼쳐 들고 흔들었다.
“뺘뺘! 담에 바여.”
모두에게 손 인사를 한 라피가 제롬과 함께 퇴장하자 남겨진 카이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넋 놓고 라피가 사라진 쪽을 본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그럼 우리 몸 대 몸으로 매우 친근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요.”
그날 아퀼라 공작저의 기사들은 카이가 왜 비밀친위대 대장인지 몸소 깨달으며 장렬하게 뻗어 버렸다.
뛰는 제롬 위에 나는 카이를 본 기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한 것 위에 더 독한 것을 경험한 기사들은 그날 이후로 제롬이 시키는 훈련을 불만 없이 소화해냈다.
* * *
형부와 만나서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곧장 여자 몇이 달려왔다. 그중 앞에 있는 여인이 시녀장이라고 밝히며 흙이 묻은 나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처제, 아까 넘어져서 인절미에 지지 묻었으니까 깨끗하게 씻어야 해. 아니면 나랑 같이 씻을까?”
그 말을 들은 나와 주변인은 순간 경악하며 형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뵨태!”
“아, 아니야. 그냥 처제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것뿐이야.”
“구니까 뵨태! 뵨태랑 노는 거 아니래써여.”
내가 두 눈을 흘기며 보자 형부는 진심이 아니라고 온몸을 흔들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시녀장은 나를 잽싸게 안더니 욕실로 들어가 형부가 보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아가씨께서 오실 줄 몰라서 아직 방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준비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니에, 알겟쏘여.”
내 말에 아퀼라 공작저의 시녀장은 방긋 웃었다. 내가 언니의 동생이라지만 언니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 쉬거나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욕실에 있는 동안 밖에서 방을 부랴부랴 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내일쯤 에리카 님과 도련님이 오실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먹고 놀고 주무시면 됩니다.”
능숙하게 옷을 벗긴 시녀장의 손에 씻겨진 나는 몸이 풀리는 듯했다. 마치 뜨거운 물에 담겨 녹아내리고 있는 찹쌀떡 신세랄까.
판테르 공작저에서 나올 때 챙겨 온 짐을 풀어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형부와 재회했다. 아까 같은 변태력이 사라진 그의 품에 안기니 하품이 절로 나왔다.
“후아암.”
“처제, 졸려? 나랑 같이 코오코오 할까?”
대답도 하지 못하고 꾸벅꾸벅 조는 나는 형부의 가슴에 기댄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꺅! 어쩜 저리도 귀여워요.”
“아퀼라 공작가에도 아가씨가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에서 키우고 싶어.”
시녀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우웅, 시러. 아빠랑 가치 잘꼬야. 후아암!”
졸린 와중에도 할 말을 다 한 나는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해서 잠이 저절로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깨어나 보니 카이가 옆에 앉아서 나를 노려봤다.
“우리 아가씨, 늦잠꾸러기라고 해야 할까요. 어제부터 내리 주무셨습니다.”
“낵아?”
“네, 새벽에 에리카 아가씨가 오신 것도 모르시고 주무시더군요.”
카이의 말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 수련을 하느라 요즘 한밤중에 몰래 일어났다. 책을 읽거나 할아버지가 알려 준 방식대로 마나를 움직이기 위해 잠을 걸렀더니 그 후유증으로 어제 오후부터 푹 자 버린 것 같았다.
“워, 원래 아이드른 마니 자눈 거예여.”
“맞습니다. 많이 자는 거. 그럼 이제 에리카 아가씨를 만나러 가 보실까요. 우선 세수하시고.”
마침 옆에 대기 중인 시녀가 세숫물을 대령했다. 얼른 조그만 두 손으로 물에 담가 세수를 했다. 아직 컨트롤이 되지 않아 이곳저곳에 튀었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세수 후 옷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 곧장 머리가 빗겨졌다. 간단하게 치장이 끝나고 형부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형부와 언니가 보였다.
“혐부, 언냐 안넝히 주무셔써여?”
“응, 처제도 잘 잤어?”
“우리 라피, 못 보는 사이에 많이 컸구나.”
두 사람의 인사를 받을 때 언니 옆에 혹 하나가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아퀼라 공작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형부와 똑 닮은 남자아이였다. 나보다 조금 커 보인 남자아이는 내게 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
“아부지, 어무니. 제 색시에요?”
응?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