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두 밤 자고 가기로 했지만 나는 미리 짐을 꾸렸다. 그걸 나중에 와서 본 아빠가 묘하게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준비한 것이더냐.”
“니에.”
자고로 어딜 가려면 준비성 하나는 철저해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방긋 웃으며 아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아빠가 나를 품어 주며 엉덩이를 다독여 줬다.
“라피, 결혼하지 말고 평생 아빠랑 같이 살까?”
“아빠가 기찬을 건데여.”
“아니야. 어찌 우리 딸을 귀찮게 여기겠느냐. 아빠는 라피만 옆에 있으면 좋을 것 같구나. 어차피 유진 그놈은 여기를 떠날 수 없으니 오겠지만.”
집안의 장남은 당연히 여길 이어야 하니 오겠지만 딸은 결혼하면 시댁으로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다. 정 맘에 드는 놈이 있다면 데려오려무나. 아빠가 시험 좀 해 보고 데릴사위로 거두면 되니까.”
그 시험이 뭐가 될지는 상상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우선 반쯤 죽이고 시작할 것 같은 아빠의 위험한 미소에 나는 말없이 가슴에 찰싹 붙을 뿐이었다.
“에리카 집에 가도 아빠 생각나면 연락하고.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바로 와도 된단다.”
“니에.”
“한데 언제 올 거니.”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언제 올 거냐고 묻는 아빠의 물음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후음, 일곱 번 자고 올게여.”
티그리스 공작저에 갈 때도 애초에 일주일이라고 약속을 했었다. 나중에 늘어지긴 했지만. 그래서 형평성에 맞게 대충 일주일 후에 오겠다고 했건만 아빠의 표정이 그리 상큼해지지 않았다.
“요즘엔 여행을 가더라도 당일치기가 유행이라고 하더구나.”
아침에 갔다가 그날 저녁에 오라는 소리인가.
아퀼라 공작저에 가는데 당일치기는 너무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대답하려던 내 입은 바닷물 만난 조개처럼 쩍 벌어졌다.
“후아암!”
“졸리나 보구나. 이제 자렴. 아빠가 재워 주마.”
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탄탄한 가슴에 안긴 나는 아빠의 다독임에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 * *
두 밤을 잔 후 미리 싸 둔 크로스백을 어깨에 멘 나는 준비를 마치고 짐을 든 제니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으잉?”
뭐지. 왜 사람들이 워프 게이트에 가득 있는 걸까.
눈에 익은 이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아빠가 와서 나를 안아 올렸다.
“배웅 나온 것이란다.”
“아하! 언냐 지베 가따가 올게여.”
배웅 나왔다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렇게 단체로 배웅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군데 왜 벤이 요기 이써여?”
고용인들이 배웅하러 나온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벤스를 비롯해 다른 이들이 몰려 있자 고개를 갸웃했다.
“네 수행원이란다.”
아니 보좌관들을 수행원으로 보내는 경우는 또 뭐란 말인가. 입이 떡 벌어지게 많은 수행원이라 쓰고 보좌관이라 보는 이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너무 적니?”
“아녀! 혼자 가따 올 곤대여.”
“혼자 가다니, 가는 중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어차피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에 목적지에 가 있을 건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단 말인가. 아빠의 이해하지 못할 말에 벤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처음으로 아퀼라 공작저에 가는데 어찌 아가씨를 혼자 보낼 수 있겠습니까. 저희의 저력을…….”
“댔고, 혼자 갈 끄야여.”
이 사람들을 다 데리고 가는 것도 어떤 의미로는 조금 얼굴 팔렸다. 그렇기에 아퀼라 공작가와 기싸움 하려는 이들을 말렸다. 그러자 몇몇 이들이 입맛을 다셨다.
“안 돼.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니 그래도 조금이라도 데려가려무나. 아빠가 가고 싶은데 바빠서 갈 수가 없으니…….”
엄청 아쉬워하는 눈빛을 한 아빠는 자신의 보좌관들을 일일이 보더니, 누군가를 콕 짚었다.
“카이 가브리엘, 자네가 그나마 적합한 것 같군.”
아빠의 지명에 카이 가브리엘 백작이 앞으로 나오며 살짝 고개 숙였다. 내가 듣기로는 판테르 공작의 비밀 친위대 대장이라고 하던데. 그런 사람을 고작 언니 집에 가는 꼬맹이한테 붙여 준다는 건가.
“세라피나 아가씨, 카이 가브리엘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카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기사들은 대부분 가슴이 빵빵하고 덩치가 있는 편이었다. 한데 카이는 그들에 비하면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마치 암살범들처럼 날렵함을 자랑하는 듯한 몸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냐세여. 라삐에여.”
통성명하자 카이가 내게 손을 뻗었다. 푸른색 강직한 눈동자를 본 나는 아빠의 품에서 카이의 품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빠가 왜 카이를 지목했는지 알 것 같았다. 빵빵함이 없는 가슴에 반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가.
나를 카이에게 안겨 준 아빠는 그에게 또 뭔가를 건네줬다. 그걸 받아든 카이는 주머니에 넣었다.
“공작님, 저는요? 우리 미래의 며느님은 제가 지켜야 합니다!”
갑자기 벤스가 앞으로 나오며 말했지만, 아빠는 귓등으로도 듣는 시늉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를 보며 볼에 뽀뽀를 해 줄 뿐이었다.
“라피, 잘 다녀오려무나. 아빠 보고 싶으면 바로 오고.”
“니에! 다녀오겟쑵니다.”
모두와 작별 인사를 하며 제니의 품에 안긴 씨엘을 봤다. 꼬랑지와 귀가 축 처진 모습에 나는 손을 흔들어 줬다.
“씨엘, 뺘뺘.”
뀨우.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 측은함마저 생겼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씨엘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형부가 애완동물을 싫어해서 아퀼라 공작저에서는 동물을 기르지 않는다고 들었다.
집주인의 취향을 고려한 나는 씨엘에게 안녕을 고했다. 그러자 제니에게 짐을 받아 든 카이가 곧장 워프 게이트에 섰다.
“라피, 지금이라도 안 간다고 해도 아빠가 다 막아 줄 수 있…….”
아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성질 급한 마법사가 마나를 주입했고 곧장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 눈을 한 번 깜빡했을 뿐인데 판테르 공작저의 모습은 사라졌고 대신 처음 보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요기가 언냐네 지비에여?”
“네, 저도 처음인데 맞을 겁니다.”
카이가 빙그레 웃으며 마중 나온 사람을 보고는 묵례했다.
“안냐세여. 우리 언냐 동생 라삐에여. 세 짤이구여.”
“처음 뵙겠습니다. 판테르 아가씨, 아퀼라 공작저의 집사 아놀드라고 합니다. 허허, 어쩜 이리도 판테르 공작부인을 닮으셨습니까.”
나를 본 아놀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런 아놀드의 주변을 살핀 나는 눈에 익은 사람이 없자 고개를 갸웃했다.
“언냐는여?”
“에리카 님과 도련님은 영지 일로 출타 중입니다. 그리고 공작님께서는 연무장에 계시답니다.”
일부러 놀라게 해 주려고 여기에 언제 온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언니는 공사다망한 듯했다.
“구럼 혐부한테 갈래여. 혐부는 낵아 요기 오는 거 아라여?”
“판테르 아가씨께서 신신당부하셔서 아직 소식을 전해 드리지 않았습니다.”
“헤헤, 노래켜 줄 고에여.”
내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주변에 있던 이들 역시 방긋 미소 지었다. 아무리 내가 여기 온다고 해도 한 번도 보지 않은 아이인데 내 말대로 이 집 가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니 어찌 보면 대단한 집안 같았다.
“카이, 저 걸어갈래여.”
나름 판테르 공작가의 여식이 되었는데 계속 외간 남자에게 안겨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판테르 공작가의 위엄을 팍팍 실은 나는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아놀드에게 물었다.
“혐부가 잇는 데로 안내해 주세여.”
“네! 그리하겠습니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은 아놀드가 앞장서자 나도 곧장 그 뒤를 촐랑촐랑 따라갔다. 내 뒤에 선 카이는 계속 심장이 좋지 않은지 왼쪽 가슴을 문질러댔다. 그리고 마중 나와 있던 이들 역시 뭘 잘못 먹었는지 연방 입을 틀어막으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왜 내가 가는 곳마다 없던 병이 생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중에 형부에게 좋은 약을 선물해 주라고 해야 하나.
아놀드를 따라 아장아장 걷던 중 연무장 입구에서 잠시 멈칫했다.
“판테르 아가씨께서 가주님과 에리카 님을 뵈러 오셨습니다. 그러니 길을 열어 주시지요.”
아놀드의 말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의 시선이 나와 카이에게 닿았다.
“안냐세여. 라삐에여. 요긴 카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가씨는 들어가실 수 있지만, 뒤에 계신 분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정중하게 말하는 기사를 본 나는 카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카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각 가문마다 훈련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그렇기에 검술에 문외한인 나는 들어가도 괜찮지만 카이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안 대는데. 카이는 나랑 가치 왓눈데…… 아빠가 가치 가라고 햇눈데.”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말하자 기사들은 순간 헛바람을 들이켜며 움찔했다. 그들을 올려다보며 정말로 안 되냐며 눈을 깜빡이자 서로 시선을 마주봤다. 어떻게 할지 자신들끼리 눈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 그렇다면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으로 하십시오.”
“정말여? 고마뜹니다. 헤헤.”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고맙다는 표현을 하며 가방 속에 넣어 온 사탕 두 개를 꺼내서 기사의 손에 올려줬다.
“요거 디따 마시써여. 나중에 먹고 꼭 치카치카 해여.”
“크윽, 가, 감사합니다.”
사탕을 소중히 쥔 기사를 지나쳐 아퀼라 공작가의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그냥 봐도 수십 명은 되어 보임직한 기사들이 하나같이 대련하며 단련했다. 판테르 공작저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에 나는 아놀드에게 보고하지 말라고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아놀드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선 카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씩 웃었다.
“우와, 멋찌다.”
우락부락한 근육하며 탄탄한 모습만 봐도 1등 신랑감이 분명했다. 한동안 대련하는 모습을 구경할 때 형부가 느릿하게 나서며 말했다.
“전원 자세를 잡게나. 오늘은 특별히 내가 훈련을 직접 감독할 것이니.”
형부의 말에 기사들의 얼굴은 순간 핼쑥해졌다. 하지만 형부는 가차 없었다.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친 이들을 전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땀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데 잠시 후 여기저기에서 앓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약해 빠져서 어찌 아퀼라의 기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하늘을 나는 독수리 깃털이라도 닿을 수 있겠는가.”
매섭게 외치는 형부가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다. 순간 흠칫한 나는 뒤로 물러섰고, 그와 동시에 훈련 중인 몇몇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여자애가 있어서 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꿰뚫려 죽을 것 같을 때 나는 뽀짝뽀짝 달려가며 외쳤다.
“혐부우우우우!”
“음?”
내 부름에 형부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언제 살벌하게 말했냐는 듯이 표정이 풀어졌다.
“우리 귀여운 인절미, 아니 처제!”
두 팔을 벌린 형부에게 달려가던 중 중심이 흐트러져 넘어졌다.
철퍼덕-
그대로 앞으로 다이빙한 나는 바닥에 찰싹 붙었다. 아픈 것은 둘째치고, 쪽팔림에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러자 형부가 달려와 나를 일으켜 세우며 흙을 털어냈다.
“우리 처제, 괜찮아?”
놀란 형부의 물음에 나는 손을 쭉 내밀었다.
“아포, 요기 아포, 호호 해 주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