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언제는 대놓고 물욕을 보여서 좋다고, 호박까지 오다가 주웠다며 줬으면서.
“그래두 아빠가 준 게 젤 이뽀.”
“크흠. 하긴 내가 준 게 좀 예쁘긴 하지. 노란색이잖니. 어쨌든 회의는 이것으로 끝! 이만 가 보게나.”
자리에서 일어난 아빠가 카를로스 품에 있는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고는 내 얼굴에 사정없이 비비적거렸다.
“역시 이 볼이 있어야 안정이 된단 말씀이야. 라피,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잘까?”
“어제도 잤자나여.”
“그럼 오늘도 같이 자자꾸나. 아빠가 혼자 자려니 너무 외로워서.”
아까부터 자꾸만 측은한 말로 유혹하는 아빠였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야 하나 싶을 때 씨엘이 내 품으로 폴짝 뛰어올라 들어왔다. 내 품에 안겨 비비적대는 씨엘을 쓰다듬은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씨엘이랑 가치 자요.”
“그, 그래. 가, 같이 자자꾸나. 하지만 고양이는 침대가 아니라 바구니에 재우도록 하는 게 낫겠구나. 인간과 동물과의 경계는 그어야 하니.”
그럴싸한 아빠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빠가 일하기 전까지 놀아 줬다. 예전엔 나를 그냥 내버려 두고 일만 하더니 이젠 짬을 내서 놀아 달라고 칭얼거렸다.
정원에서 아빠와 놀고 방으로 들어오니 제니가 방긋 웃으며 맞이해 줬다.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보낸 책은 여기 둘게요.”
“니에.”
할아버지가 내가 읽을 만한 책이라며 초보 마법서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챙겨 주셨다. 덕분에 나는 방에서 마법서와 사반나 제국어 책을 보며 스스로 공부했다.
“후아암, 졸려.”
“우리 아가씨, 낮잠 주무실 시간이네요. 자리 펴 드릴게요.”
정신없이 공부하는 모습을 매우 뿌듯한 표정으로 본 제니는 침대에 나를 눕혔다. 연방 하품을 한 나는 품 안으로 파고드는 씨엘을 안고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몸이 나른해질 정도로 상당히 오래 잔 것 같은 나는 부스스 일어났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려던 나는 순간 그 상태로 멈췄다. 옆에 있어야 할 씨엘이 책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도톰한 분홍 젤리 발바닥에 침을 묻히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보고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너무 귀여워서 깨물고 싶을 정도였다. 도도한 표정으로 책을 노려보던 씨엘은 매우 자연스럽게 책을 넘겼다.
과연 저 책의 내용을 씨엘이 보고 이해를 하는 건가. 한데 씨엘은 한쪽 면을 다 보고 옆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진짜 책을 읽는 고양이 같았다.
한동안 그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을 때 씨엘이 뭔가 불안한지 책에서 시선을 떼었다. 그러더니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냥.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책상에서 뛰어내린 씨엘이 내게 달려와 안겨들었다. 그런 씨엘의 털을 쓰다듬은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갔다.
스펜타 대륙의 역사.
이건 내가 이따가 읽으려고 책상 위에 올려 둔 책이었다. 펼치지도 않은 책인데 씨엘이 이걸 넘기면서 읽고 있는 듯한 모습을 봤던 나는 씨엘에게 말했다.
“씨엘, 혹시 글씨 아라?”
냐옹?
“씨엘, 나랑 가치 곰부할래?”
긁을 읽는지 아니면 읽는 듯한 포즈만 취한 건지 모르겠지만 분홍젤리 발바닥에 침 묻히며 책장을 넘기는 포즈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의자에 앉은 나는 곧장 책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씨엘의 고개가 덩달아 끄덕였다. 할아버지 집에서 가져온 책을 읽고 있을 때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머나, 진짜 우리 아가씨 글도 읽으실 줄 아나 보군요. 전 설마했거든요. 어떻게 세 살인 아가씨가 글을 읽겠냐고 했는데 사실일 줄이야.”
아가페가 뭔가를 가지고 와서 책상 앞에 놓았다.
“요고 머에여?”
“호호! 이건 이번에 새로 만든 에그 타르트인데 드셔 보세요.”
듣기만 해도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트레이 뚜껑을 열자 그 안엔 에그 타르트가 다소곳하게 놓여 있었다.
“우와! 마싯겠다. 잘 머글게여.”
아가페에게 인사를 한 나는 에그 타르트를 한 입 물었다. 순간 부드러운 감촉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맛이 어때요?”
“마시써요. 징짜로! 헤헤.”
“그럼 많이 드세요. 후후, 판테르 공작가 핏줄은 죄다 디저트를 별로 안 드셔서 슬펐는데 우리 아가씨가 좋아해 주셔서 정말 힘이 나요.”
이곳에 취업했지만, 자신이 만든 것을 좋아해 주지 않아 자괴감에 빠졌다고 말하는 아가페는 내가 먹을 때마다 좋아했다.
“씨엘도 머글래?”
냐옹.
에그 타르트를 신기하듯 보며 발로 톡톡 건드리는 씨엘을 보며 하나 건네줬다.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막 한 입 먹으려는 찰나에 아가페가 빼앗았다.
“고양이는 이런 거 먹으면 안 돼요.”
꺄옹!
먹을 것을 빼앗겨서인지 씨엘이 유독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아가페를 쏘아보는 듯했다.
“냥이는 요런 거 머그면 안 대여?”
“네, 안 됩니다. 고양이는 고양이답게 육류나 간혹 과일을 먹는 게 나아요.”
캬르릉.
아가페의 손에 들린 에그 타르트를 본 씨엘이 앞발을 허우적거렸다. 얼른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엄포를 놓은 씨엘을 아가페는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
“씨엘이 머꼬 시퍼하는데 그래도 안 대여?”
“이런 거 많이 먹으면 고양이가 훅 갈 수도 있답니다. 호호호, 그러니까 아무리 고양이가 먹고 싶다고 안달해도 주면 안 돼요.”
고양이를 키운다는 아가페가 내게 집사의 길은 험난하다며 이것저것 알려 줬다. 난 그냥 이것저것 먹여서 잘 키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키우기 넘 힘들거 가타여.”
“그래서 애완동물은 함부로 키우는 거 아니랍니다. 당장은 귀엽고 예뻐서 키운다지만 나중에 덩치가 커지고 늙고 병들면 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거든요.”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키우지 말라고 조언을 해 준 아가페는 내 입에 에그 타르트를 물려 주고는 바로 퇴장했다. 그런 나를 씨엘이 처량한 시선으로 봤다. 얼른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듯한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안 댄대. 씨엘, 요거 머그면 주글 수도 있대.”
냐옹, 냥…….
귀가 한껏 축 처진 씨엘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서 한 입 줄까 싶어 내밀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그걸 낚아챘다.
“흐음, 생각외로 괜찮은 디저트구나.”
아빠였다. 아빠가 씨엘에게 줄 뻔한 마지막 에그 타르트를 한 입에 꿀꺽했다. 그러자 씨엘이 울분에 찬 시선으로 노려봤지만, 아빠에겐 어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요긴 무슨 일로 오셧써여?”
“무슨 일로 오긴, 우리 딸 보러 왔지. 곧 저녁이니까.”
그때야 나는 햇볕이 옅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씨엘과 공부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나는 아빠와 같이 식사했고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빵빵한 가슴의 탄성을 느끼면서.
그렇게 하루가 멀다고, 아빠랑 자던 나는 마법사가 찾아와서 내려놓은 아퀼라 공작저와 연결된 통신구 앞에 섰다.
“언냐! 저 와써여.”
[오! 우리 라피, 여전히 귀엽구나.]
언니가 통신구 안에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여긴 언제 올 거니? 언니는 우리 라피가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라피는 언니가 보기 싫은 거야?]
“아빠랑 가치 자고 머꼬, 또 곰부하느라 바빠여.”
[공부는 여기서도 할 수 있단다. 그러니까 언니 집으로 오렴. 제롬도 처제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인절미만 먹고 있어.]
그놈의 찹쌀 씨를 말려 버려야 하나.
언니와 짤막한 통신을 마친 나는 씨엘을 제니에게 맡기고 아빠에게 달려갔다. 할 일이 많은 아빠는 사인하면서도 나를 안아 올려 다리에 놓았다.
“무슨 일로 온 것이더냐. 금세 이 아비가 보고 싶었던 거니.”
사인하는 손목 스냅이 경쾌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언냐 지베 놀러가고 시퍼여.”
순간 사인하던 손이 멈추며 그 자리에 진한 잉크 자국이 생겼다. 조금만 더 세게 힘을 주면 종이를 뚫을 것 같은 아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에리카가 꼬셨더냐?”
“언냐가 저 보고 시프다고 해써여. 언냐 지베 가면 안 대여?”
“라피는 아빠랑 있는 게 좋아, 언니 집에 가는 게 좋아?”
이건 마치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고 묻는 것 같았다. 유치 찬란한 질문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조아여. 하디만 아빠가 더 조아여.”
“얼마큼?”
아빠의 물음에 나는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둥근 원을 그렸다.
“요만큼 빼고 다 조아여.”
“왜 그만큼을 빼는 것이더냐.”
“언냐를 그만큼 조아하니까여.”
언니 미안해. 이건 다 언니 집에 가기 위한 나의 아부니까 나중에 알더라도 이해해 줘.
내 바람대로 아빠의 입술 꼬리가 씰룩였다.
“크흠, 하긴 그만큼…… 음, 그래. 자매끼린데 가끔 만나서 정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
나의 아부에 아빠가 바로 허락을 해 줬다. 허락을 받은 나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에 뽀뽀했다. 아빠와 스킨십하는 게 예전엔 너무나 어색했지만, 요즘은 자주 해서인지 자연스러웠다.
“역시 아빠가 젤 조아여. 구럼 두 밤 자고 갈게여.”
원하는 것을 얻은 나는 곧장 아빠의 다리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던 오스카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 똑, 똑 여러주세여.”
문을 두들기자 바깥에서 문이 열렸고 지키고 있던 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 줬다.
“볼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아가씨.”
“니에! 저 두 밤 자고 언냐 지베 가여. 헤헤.”
내 말을 들은 이들은 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바로 눈높이를 맞춰 말했다.
“혹시 저희가 뭘 잘못한 게 있습니까.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고치겠습니다.”
“아가씨,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었나요?”
“누구야, 우리 아가씨가 못마땅하게 행동한 놈이!”
난 단지 언니 집에 간다고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런고 아니고, 언냐 지베 놀러가여. 언냐가 오라고 해써여.”
“아! 그렇군요. 하긴 에리카 아가씨 집에 한 번은 갔다 오셔야지요. 한.번.은.”
“맞아요. 집 구경은 한 번쯤은 하시는 게 맞아요. 한.번.쯤!”
이 집안 사람이 좋아하는 숫자는 1인 것 같았다. 언니네 집으로 놀러 간다니까 사람들이 전부 한 번에 악센트를 주며 말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 가려면 멀었지만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 봤자 옷과 양치용 물의 정령 덩어리뿐이었다.
“이번엔 오렌지맛 물의 정령이랍니다. 아가씨께서 오렌지를 좋아하신다고 하니 정령사가 오렌지맛이 나게 해 주셨어요.”
이 집구석 어딘가에 있는 정령사를 찾기보다는 제니의 도움을 받아 우선 짐 싸는 데 치중했다. 조그만 크로스백에 사탕과 캐러멜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은 가방에 간식을 꾹꾹 넣고 있을 때 제니가 옷 가방에 넣는 것을 본 나는 소리 질렀다.
“제니, 앙대!”
“음?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매우 태연한 표정을 짓는 제니를 보며 그곳으로 간 나는 그녀가 막 집어넣은 것을 꺼내들었다. 신제품 팬티 기저귀였다.
“요거 아니야. 나 쉬야 안 해여!”
내 말을 들은 제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 넣은 팬티 기저귀를 전부 꺼내며 말했다.
“하긴 아퀼라 공작가도 부자니까 하루에도 열댓 개씩 매트리스를 뿌셔도 될 것 같네요.”
처음에 실례 좀 했다고 전대미문 대륙의 화가로 만든 후 자랑질하는 이들의 사악한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얼른 짐을 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