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세상 귀여운 말랑 콩떡이 제집으로 홀라당 가 버렸다.
“우리 라피가 보고 싶어요.”
이제 집으로 간 지 몇 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벌써 라피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도 라피 덕분에 사위가 이틀이나 머물다 가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면 사위가 상당히 봐준 것입니다.”
라피가 가기 전까지는 얼굴에 혈색이 돌던 부인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라피가 보고 싶어서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 모습을 본 티그리스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라피를 데려오지 말걸.
그랬다면 부인이 이렇게 가슴 아파 할 일은 없을 터였다.
“할머니, 너무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고모부가 돌아갈 때 언제든지 우리 라피를 보러 와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이 제 할머니를 꼭 안아 주며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예전이었으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 올해 일어났다.
본래 티그리스 공작가와 판테르 공작가는 데면데면하다 못해 아예 척을 진 사이였다. 한데 중간에 말랑한 콩떡이 나타나서 두 가문을 쫀득하게 이어붙여 줬다.
“하지만 난 지금 보고 싶은 걸 이 일을 어찌하누.”
이 집 안에 있다면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따가 만난다는 희망이라도 가지고 지낼 것이다. 한데 라피는 완전히 동부로 가 버렸다. 이곳에 왔을 때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소피아, 설마하니 라피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부인의 생각을 제대로 짚은 티그리스 공작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해럴드에게 뭔가를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헐레벌떡 뛰어간 해럴드는 곧장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들고 왔다.
라피의 눈동자 색과 같은 황금색 보자기를 티그리스 공작에게 내밀었다. 보자기를 건네받은 티그리스 공작은 그걸 다시 부인에게 내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직접 풀어 보십시오.”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예쁘게 묶인 매듭을 조심히 풀었다.
“어, 어머나! 세상에나.”
귀엽고 또 귀여운 콩가루가 잔뜩 묻은 말랑한 콩떡 그림이 액자 속에 넣어져 있었다. 활짝 웃는 라피의 수채화 그림을 본 이들의 얼굴에도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걸 언제 그렸는지요?”
“허허허, 우리 라피가 그 짧은 다리로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아십니까. 정말이지 이것저것 하느라 우리 집에서 제일 바빴답니다.”
재롱부리고, 공부해야 했다. 그리고 나이 많은 조카 연애 사업도 도와주고 또 그보다 나이 조금 덜 먹은 조카에게 공부까지 시켜 줘야 했다. 그 정도로 라피의 하루는 매우 바쁘게 돌아갔고,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시간을 냈던 이유가 바로 이 그림이었다.
티그리스 공작에게 눈동자 색을 바꾸는 약을 달라고 조르는 한편 화가 한 명을 섭외해 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라피는 정원에서 일정 시간을 앉아 있었고 화가는 속도를 내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상대는 티그리스 공작의 손녀이자 판테르 공작의 딸이며 아퀼라 공작의 처제였다. 한 공작 가문의 일원이어도 어마어마하건만 라피는 그 셋 모두에 해당되었다.
3대 공작가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인 라피의 눈동자가 빨리 안 그리면 으앙- 하고 울어 버린다는 신호를 보냈다.
라피가 울면 어떻게 될지 상상을 한 화가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려야만 했고 드디어 완성할 수 있었다.
말랑 콩떡은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지금이라도 안아 달라고 손을 뻗을 것만 같았다. 그 그림을 받은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언제 울먹였냐는 듯이 품에 꼭 안으며 미소 지었다.
“어떻습니까. 자신이 떠나면 할머니가 너무 적적하고 힘들어할까 봐 일부러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군요.”
“우, 우리 새끼가…… 어쩜 이리도 마음이 곱단 말입니까. 이런 건 제 어미를 안 닮았군요.”
라피를 품은 것처럼 그림을 안은 티그리스 공작부인이 헬레나와 함께 퇴장하자 마리아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말하게나.”
마리아로 말할 것 같으면 세라피나의 유모의 딸이었다. 해서 이번에 라피가 오자 일부러 시녀로 붙여 준 것이다.
“긴가민가해서 확실히 뭐라 단언하지 못하겠지만 오래전에 어머니께서 해 주신 말씀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세라피나 님께 특별한 목걸이가 있노라고요.”
“음? 아, 그래. 전설 속에 존재하는 목걸이지. 아마 세라피나와 함께 무덤 속에서 잠들어 있을걸세.”
전설은 그저 전설이라고 여긴 티그리스 공작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죽은 딸을 생각하니 가슴이 옥죄듯 통증이 느껴졌다. 제 딸이 그것도 늦둥이 딸이 죽었는데 몇 년 지났다고 괜찮아질 리가 없었다.
“물방울 모양의 진보라색 보석인데 다이아몬드라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맞아. 그랬지.”
티그리스 공작이 직접 전설로 내려오는 바이올렛이라고 불리는 보라색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세라피나의 목에 걸어 줬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몸에서 떼지 말라고 했었다.
“한데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그 목걸이가 라피 아가씨의 목에 걸려 있었습니다. 비록 보라색은 아니었지만요.”
옷에 가려져서 평소엔 보이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라피를 직접 씻겼기에 그 목걸이를 볼 수 있었다. 보라색이 아닌 빛을 잃은 물방울 모양의 회색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목걸이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모조품일 수도 있지 않느냐. 사위가 만들어 준 게 아닐까 싶은데.”
“그건 아닙니다. 회색 다이아몬드란 건 존재하지 않고요. 그리고 혹시 몰라 판테르 공작님께 말씀드렸더니 아가씨께서 떨어질 때부터 목에 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말에 순간 혼란스러워진 티그리스 공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마리아, 지금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인 무엇인가.”
티그리스 공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니엘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항상 싱글벙글 웃는 평소와 다른 다니엘의 진중한 물음에 마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 목걸이에 대한 전설이 위기에 처한 단 한 사람을 살려 준다는 것 아닙니까.”
“맞다. 바이올렛에 깃든 신기한 힘은 위기에 처한 주인이나 그 주인이 지정한 존재를 살려 주지. 그러고 나서는 그 빛이 사라졌다가 힘이 차오르면…….”
거기까지 말한 티그리스 공작은 순간 말을 멈췄다. 티그리스 소속의 마법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모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임신 중이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른들 이야기에 절대 끼어들면 안 된다지만 에이든이 참지 못하고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그럼 형이랑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고모할머니가 복중 고모를 살리려고 목걸이의 힘을 사용했다는 거야?”
“그래, 한데 이 세계에서는 명이 다했기에 다른 세계로 보내서 살린 후에…….”
에이든과 제이든이 서서히 뭔가 퍼즐을 맞춰 가기 시작했다.
“그 세계에서 고모에게 위기가 닥치자 목걸이가 힘을 발휘해 아비 품으로 돌려보낸 건가?”
“허, 허, 허. 우리가 생각하고도 너무 완벽하게 들어맞아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이 일을 어쩌지.”
“말도 안 되는데 말이 될 것 같아. 만약 고모가 제대로 태어났으면 세 살이었을 거야. 오! 맙소사!”
두 증손자의 말에 티그리그 공작의 안색은 서서히 창백해지더니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제 딸을 닮은 아이였다. 게다가 정감이 느껴졌다. 아이를 곁에 둘수록 그리우면서도 편했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저 인연이라서 그런 건가 싶었다. 비록 라피가 세라피나의 배를 타고 태어난 게 아니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데 에이든과 제이든이 말한 가설대로라면 라피는 진짜 세라피나와 판테르 공작의 딸이자 제 손녀였다.
“친자 확인하는 약품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걸로…….”
“그만! 다니엘, 너무 멀리 갔구나. 친자라는 결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세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음이야. 그냥 우린 여기에서 멈추는 게 나을 것 같구나.”
티그리스 공작이 손을 뻗어 생각을 멈추게 했다. 연거푸 심호흡한 티그리스 공작은 우선 앞에 놓인 문제부터 천천히 해결하기로 생각하며 외쳤다.
“모나코 후작 놈 데려오게.”
그 한 마디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모나코 후작이 불려들어 왔다. 마틸다와 에이든은 내일이라도 곧 결혼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데 에이든이 바람을 피워서 돌연 파혼을 선언하고 사비나와 붙어 버려서 마음이 상한 모나코 후작이었다.
“저희 딸은 쓰다 버리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한데 어찌하여 결혼을 약속해 놓고 뒤돌아설 수 있단 말입니까.”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듯 모나코 후작이 감히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외쳤다. 그 모습을 본 티그리스 공작이 앞으로 몸을 쓱 내밀며 말했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왜 우리 에이든이 자네 딸과 파혼했는지 아나.”
“그건 잘 모릅니다. 단순히 마음이 변해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닌데, 자네 딸이 감히 우리 말랑 콩떡을 밀어내서 철푸덕 넘어진 바람에 무려 1센티가 폭 쪼그라들었다 이 말일세.”
“네, 네? 말랑 콩떡이요?”
“그래, 말랑 콩떡! 우리 라피, 내 손녀를 밀쳤단 말일세! 대체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감히 내 손녀이자 우리 사위인 판테르 공작의 여식을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
“닥치게!”
그날 모나코 후작은 티그리스 공작에 입 뻥끗할 틈도 없이 달달 볶였다. 그리고 말랑한 콩떡을 찌그러뜨린 죄로 엄청난 양의 보상금을 토해내야만 했다. 그걸 본 이들은 픽 웃었다.
“우리 라피한테 이걸 주면 햄을 많이 볶을 건데.”
* * *
분명 하루만 있다가 가기로 했는데 하루가 더 늘어나 버렸다. 갑자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빠를 매우 애절하게 붙잡았다.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면서 그간 못 해 준 거 다 해 준다면서 말이다. 덕분에 처음 간 처가댁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아빠의 얼굴엔 광택이 났다.
그렇게 이틀 만에 겨우 돌아오려는 찰나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찌나 슬퍼하던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라피를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집으로 찾아오십시오.”
아빠의 한 마디에 그때야 나는 판테르 공작저에 올 수 있었다. 판테르 공작저에 오자마자 다들 나와서 맞이해 주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티그리스 공작저에 가셔서 안 오시면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 지금이라도 더 잘해 드리면 되지.”
“티그리스 공작저에서는 대체 무엇으로 우리 아가씨를 붙잡고 있었던 거지? 저 찹쌀떡 볼을 만져 보지는 못해도 눈에라도 넣어야 기분이 쫀득해진단 말이야.”
내가 지나갈 때마다 고용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빙의해서 지냈던 베네딕트 황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라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곳에서 빌붙어 살려면 적응해야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도 하니까.
방에만 있다 보니까 지루해진 나는 제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말했다.
“바께 나가소 노라요. 우리.”
“그럴까요?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건물 안에만 계셨으니까 오늘은 밖에 나가서 실컷 놀아요.”
활짝 웃은 제니의 손을 잡은 나는 씨엘을 데리고 정원으로 갔다.
이곳에 오면 유독 한가해진 세 살짜리 어린아이답게 그늘에 앉아 푹 늘어졌다. 잠이 솔솔 들려는 찰나에 갑자기 등장한 아빠한테 납치를 당했다.
오늘 분명히 보좌관들과 회의가 있다고 했는데, 다 끝나고 오신 건가 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오판이었다. 처음으로 판테르 공작가의 보좌관들과 만날 때처럼 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앞에 여러 종류의 캐러멜을 산처럼 쌓아 둔 채.
새콤달콤한 과일맛 캐러멜에 흠뻑 빠져들 때 벤스가 방긋 웃었다. 예전처럼 미래의 며느님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능글거리는 표정의 벤스가 먼저 안부를 물었다.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잘 지내다가 오셨습니까.”
“니에, 잘 지내써요.”
잘 지내긴 했다. 콩가루 털릴 정도로 바빴을 뿐이지만.
“하부지랑 하무니 그리고 오빠랑 새언냐, 또오…… 조카드리 두리나 이써요.”
“다들 잘해 주셨습니까.”
“니에, 군데 배 빵빵한데 자꾸 머겨서 힘드러써요.”
옆에 소화제를 둔 채 음식으로 산을 쌓았다. 그걸 다 먹지도 못한다고 했는데도 음식은 줄어들지 않았다. 특히 옆에 계신 할머니가 툭하면 말랐다며 더 먹이라고 할아버지에게 성화를 부렸다.
“흐음, 얼굴에 살이 좀 붙은 것 같긴 하군요. 더 보기 좋습니다. 하하. 그리고 또 무슨 일은 없으셨는지요?”
“우웅, 조카드리 자꾸 놀자고 해서 기차나써요.”
“조카요?”
“에이랑 제이요.”
내 말에 벤스는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내겐 팔자에도 없는 삼촌뻘 되는 조카들이 생겼어요.
그곳에서 있었던 일 중 몇 가지를 말해 주자 의자에 착석해 있던 이들의 귀가 이쪽으로 향했다.
마틸다 이야기가 나올 땐 방귀를 뀐 듯 뿌드득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눈빛이 매서워졌다.
“죽일까?”
“티그리스 공작가의 가신 집안이잖소.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대겠는가.”
“그럼 발을 대는 것으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