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 세계에서 살기 위해서는 눈치란 것을 키워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빠의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서 말했다.
“그런 것이더냐. 아빠가 오해했구나.”
응. 오해한 거 아니에요.
여기가 떠들썩하고 편해서 일부러 가는 것을 미룬 것도 이유지만, 나는 아빠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역시 누구 손녀인지 몰라도 큰 그림을 그리는구나.”
“헤헤, 나 하부지 손녀이자 우리 아빠 따리구여, 언냐 동생이에여.”
할아버지가 매우 흐뭇한 표정을 지었지만 술을 마시던 형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처제, 나는?”
“라삐 혐부!”
“그렇지? 나는 처제의 유일무이한 형부지! 그러니까 이리 와. 처제, 형부가 맛난 거 먹여 줄게.”
아빠 가슴에 찰싹 붙은 나는 슬쩍 시선을 위로 올렸다. 아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형부에게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빠눈 요기 빵빵해소 조아여.”
가슴을 콕콕 찌르며 말하자 다들 박장대소를 했다. 하지만 형부는 자신의 가슴도 만만치 않다고 말하며 셔츠를 풀려다가 언니에게 저지당했다.
“우리 라피는 귀엽기도 하지. 한데 여기 있는 동안 아빠는 안 보고 싶었니?”
“우웅? 꿈에소 아빠랑 노랏눈데여.”
“그래, 아빠가 엄청 보고 싶어서 매일 꿈에서 나타났구나. 아빠 꿈속에서는 우리 딸 둘이랑 아들놈이 나들이 가서 잘 뛰어놀더구나.”
“헤헤, 꿈에소 나드리 가써여?”
“응, 우리 나중에 가족이 다 모이면 나들이 가자꾸나. 비록 처음은 아니더라도.”
아빠의 말에 나는 순간 움찔했다. 처음으로 같이 나들이 가지 않은 것을 굉장히 서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도 서운하구나. 우리 라피랑 같이 놀러 가고 싶었는데. 라피, 아퀼라 공작저에 오렴. 라피만 한 조카도 있단다.”
“거기도 조카이써여? 조카눈 이제 시른데.”
“왜?”
“실타고 해두 자꾸만 따라다녀서 기차나여.”
“풉!”
내 말에 다니엘과 헬레나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이곳에 있는 동안 두 조카들에게 내가 얼마나 시달렸는지 잘 아는 산 증인이니까.
“우리 아가씨, 에이든과 제이든이 그렇게나 귀찮았어요?”
“니에, 자꾸 따라오고, 가치 곰부하자구 그러구.”
“어머, 그건 아이들이 고모를 좋아해서…….”
“제이가 여자 소개해 달래여. 기차나 주글거가타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하자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팔을 벌렸다. 이 집안과 이 안에서 제일 큰 어르신인 할아버지를 본 나는 눈치껏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건 우리 라피가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런 거란다. 처음엔 귀찮아하더니 말랑 콩떡에 퐁당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해서 그런 거니 한 번만 봐주렴.”
“니에, 나눈 조카보다 어룬이니까 봐주께여.”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라피, 할머니가 옷 갈아입는 동안에 이곳으로 온 것이더냐.”
할머니의 등장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이곳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처음보다는 병색이 사라진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슈아 판테르라고 합니다.”
아빠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할머니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동안 말하지 않고 아빠를 보던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내 사위였군. 어쩜, 우리 딸이 인물 보는 눈은 확실하게 있었어.”
“과찬이십니다.”
“내가 30년만 젊었으면 남편 버리고 선택하…… 크흠, 어쨌든 잘 왔네. 여기 온 김에 푹 쉬다가 가게나.”
“죄송합니다. 집을 비우고 와서 곧 돌아가 봐야 합니다.”
아빠의 말을 들은 할머니는 헬레나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마치 갈 땐 가더라도 나는 놓고 가라는 뉘앙스가 풍겼다.
“여보, 난 라피가 없으면 못 사는데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사위가 라피를 데려가야 한다고 하니 보내줘야지.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안 그러느냐. 라피.”
갑자기 선택권이 내게 돌아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애처로운 시선으로 나를 봤다. 그에 비해 아빠는 나를 매우 강렬한 시선으로 봤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때 에이든과 제이든이 씨엘의 목덜미를 잡고 왔다.
“고모, 갈 땐 가더라도 이 녀석은 데리고 가야지. 어찌나 구슬피 우는지…… 음? 누구신지?”
제이든 손에 매달려 덜렁덜렁 흔들린 씨엘이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곧장 내게 달려왔다. 품에 안긴 씨엘을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요기는 우리 아빠, 글구 언냐랑 혐부야. 인사드려.”
내 말에 에이든과 제이든은 곧장 와서 인사했다. 그러고는 나를 봤다.
“고모, 진짜 갈 거야? 좀 있으면 사비나도 올 건데. 사비나가 머리도 예쁘게 꾸며 줄 거야.”
“고모, 나랑 같이 공부하자. 응? 여차하면 내가 재롱이라도 부릴까?”
갑자기 나를 붙드는 인원들이 많아졌다. 남아야 한다는 쪽은 여섯, 지금이라도 얼른 가자는 쪽은 셋! 수적 열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언니가 조카님들을 향해 두 눈을 부라렸다.
“우리 라피 처제는 이번에 우리 집에 갈 차례랍니다. 이렇게 덩치 큰 나이 많은 조카들이 아닌 조그만 조카가 있으니 잘 놀 겁니다.”
“맞아요. 라피는 우리 집에 가야 해요. 그렇죠? 아버지!”
싱긋 웃은 언니가 이번엔 아빠에게 거래를 신청했다. 그러자 아빠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화통한 아버님! 존경합니다. 처제, 이제 우리 집으로 가자.”
아빠가 분명 티그리스 공작저에 오기 전에 아퀼라엔 갈 수 없다고 했는데. 어지간히도 나를 이곳에서 빼내고 싶어 하는 듯했다.
“거기 가묜 마싯눈고 마니 이써여?”
“당연하지. 우리 주방장이 꽤 솜씨가 좋단다. 우리 라피가 좋아하는 게살수프도 잔뜩 해 주고 새우튀김이랑 닭튀김 그리고…….”
언니의 입에서 먹을 것들이 나열되자 저절로 침이 흘렀다. 그러자 헬레나가 얼른 손수건으로 입 주변을 닦아 줬다.
“나 언냐 지베 갈래여. 헤헤!”
“역시 우리 동생, 이리 온! 언니랑 같이 가자.”
“요기서 쫌만 더 이따가, 우웅? 아빠랑 언냐랑 혐부도 가치!”
내 한 마디에 모든 일정이 결정되었다. 하루만 더 있다 가자로 말이다.
덕분에 티그리스 공작저는 미친 듯이 바빠졌다. 다섯 있다는 공작 중 셋이 여기에 모이게 되자 주방이며 여기저기 정신없어졌다.
“세라피나는 고대어를 읽지 못했는데 우리 라피는 술술 잘 읽더군.”
“자고로 쪽에서 나온 물이 쪽보다 더 푸른 법이지요.”
글씨도 배우지 않았는데 고대어를 할 줄 안다는 말에 아빠가 나를 의심하려나 했다. 정체를 숨긴 채 교육받고 잠입한 간첩 같은 존재로 보는 건가 했지만 아빠는 오히려 웃으며 좋아했다.
“역시 우리 동생은 천재였어.”
“그러게요. 역시 우리 인절미 처제가 최고야!”
그들은 단 한 점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나를 온전히 죽은 판테르 공작부인이 보낸 아이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나저나 여보, 술 드셨나요? 금주하신다고 하셨으면서. 술이라니요.”
할머니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이 났다. 그러자 흠칫한 할아버지가 아빠를 보며 말했다.
“사위가 처음으로 왔는데 어찌 차만 마실 수 있단 말입니까. 사위에게 예물로 줄 술을 줬더니, 사위가 다 같이 마시자고 해서…… 크흠흠.”
은근슬쩍 아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할아버지가 조금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아빠는 갑자기 자신을 보는 할머니의 시선에 당당하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먼저 술을 개봉하셨습니다.”
“아니 이것 보게나. 말이야 바른말이지. 분명 자네가 먼저 술을 따르지 않았나.”
꼬르르륵-
뭔가 혼전이 오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내 배꼽시계가 울렸다. 밖에서 할머니와 조카들과 놀아 주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열량을 모두 소모한 것 같았다.
“우리 라피가 배가 고픈 모양이군. 얼른 식사를 차리지 않고 뭐 하는가. 아까 아퀼라 공작부인이 말한 거 들었지? 그대로 차리게. 얼른!”
할아버지의 말에 언니가 말한 메뉴를 떠올린 해럴드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티그리스 공작님, 비록 새어머니가 제 친모는 아닐지라도 제겐 어머니가 되십니다. 한데 아퀼라 공작부인이라니요. 그냥 이름으로 부르세요. 저도 새어머니의 딸이니까요.”
언니의 말이 맞았다. 아빠는 티그리스 공작의 딸과 결혼해서 공작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니 언니에게도 티그리스 공작은 외할아버지가 되는 게 옳았다.
“그렇군. 다 큰 손녀와 손녀사위까지 얻게 된 건가. 허허허!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역시 파티가 제격이지.”
갑자기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정원에 테이블이 깔렸고 집안 식구끼리 파티를 했다.
“우리 라피 처제, 이곳에 있는 동안 몸무게가 늘었구나.”
“때끼! 레이디한테 구론 말 하묜 모써여!”
나를 안아 올린 형부의 말에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여기에도 아동 확대범들이 수두룩하군요. 안 봐도 훤합니다. 라피가 상당히 통통해졌으니까요.”
세 끼 먹은 것도 부족해서 케이크 같은 간식이 시도 때도 없이 내 앞에 놓였다. 그걸 안 먹으려고 했지만 자꾸 먹여 줘서 억지로 먹었던 나는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안 똥똥해여! 라삐 날쒼해여!”
“그래그래. 우리 라피는 날씬한 아가씨야. 그나저나 이 고양이는 뭐니?”
내가 안고 있는 씨엘을 본 언니의 눈이 살짝 흐려졌다.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다.
“나드리 가소 주엇써여.”
“나들이 가서 주웠다고? 하지만 귀엽다고 키우기엔 위험할 수도 있는데, 뭐 우리 라피한테 해코지는 못 하겠지. 그랬다가는 내가 가죽을 벗겨 버릴 테니까.”
언니의 눈이 위험하게 뜨였다. 그러자 씨엘이 내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보들보들한 털을 쓰다듬어 주자 씨엘이 분홍 젤리 발바닥으로 내 가슴을 꾹꾹 눌렀다.
“흐잇! 넘 귀여버. 울 씨엘 조아.”
씨엘을 꼭 보듬던 나는 순간 아빠와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시선에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아빠가 나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
“나는?”
“웅?”
“나는 안 좋아?”
질투? 지금 아빠가 씨엘한테 질투한 건가. 순간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계속 웃으며 아빠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탄탄하고 빵빵한 가슴에 기댄 채 말했다.
“조아여. 아빠 체고!”
“역시 아빠가 최고로 좋지?”
“니에, 아빠 요고 빵빵해서 체고! 조아여!”
역시 남자는 가슴이지. 암!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하자 아빠는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형부는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처제, 나도 상당히 빵빵한데.”
아까 못 벗은 옷을 마저 훌훌 벗어 던질 기세인 형부를 본 언니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볼 때도 아버지보다 당신 가슴이 빈약하니까요. 그러니까 우리 라피한테 빈약한 가슴 내밀지 마세요.”
나름 기사 출신이라고 외친 형부는 아빠에게 안겨 있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한테 찰싹 달라붙은 채 말했다.
“혐부 가숨은 절뵥이라 시러여.”
가슴이 절벽이라고 말하자 형부는 좌절 모드에 돌입했다. 그에 비해 아빠는 매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가슴을 더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