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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34)화 (34/164)

34화. 

검은색 동물을 품은 채 말하는 라피를 본 에리카는 제롬의 가슴을 쳐대며 제 옷을 꽉 쥐었다. 

귀엽다. 치명적인 귀여움에 에리카는 순간 딸을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제롬의 얼굴을 보고 겨우 정신 차릴 수 있었다. 

“잠시 이리 뒀으면 하는군. 부인이 밖에 나와서 잠든 게 오랜만이라 깨우고 싶지 않네.”

라피가 오기 전까지는 바깥 활동은커녕 방에서만 지내던 사람이었다. 기적적으로 낳은 늦둥이 딸이 죽은 후 쓰러져 몸져누웠다. 그랬던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제 딸을 닮은 아이를 보자마자 얼른 나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 결과가 이리 나왔다. 나들이를 갔다 왔고 오늘은 정원에서 손녀와 증손자와 함께 잠이 들었다. 너무나 평온해 보여서 차마 깨울 수 없었던 티그리스 공작이 판테르 공작에게 부탁했다. 

“어머님을 이런 모습으로 처음 뵙게 되는군요.”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부인은 세라피나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판테르 공작저에 가 보고 싶어 했지만 내가 막아서…….” 

처음엔 딸이 제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식 딸린 판테르 공작에게 간다는 말에 연을 끊었다. 다음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은 물론 부인에게도 그곳에 갈 수 없게 으름장을 놓았다. 

딸이 죽고 나서 후회했지만, 부모 두고 먼저 가 버린 자식이 미워서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자식 앞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존심 따윈 필요가 없는 법이지요. 그걸 경험을 해 봐야 아니 참 아이러니하지만요.”

곤히 잠든 딸을 본 판테르 공작이 고분고분하게 말하자 티그리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가 깨어나면 만날 수 있게 해 줄 테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한데 라피가 안고 있는 저 동물은 뭡니까.”

딸의 품에서 꼼지락대며 잠들어 있는, 경계심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까만 동물이 신경에 거슬렸다. 

“저번에 나들이 갔다가 라피가 주웠네. 다니엘이 족보 있는 놈으로 데리고 오겠다고도 했는데 기어코 저놈을 키울 거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줬네.”

“그렇군요. 흐음…….”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판테르 공작은 딸의 품에 안긴 동물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겉보기엔 새끼 고양인데 마치 발톱을 숨기고 있는 표범 같았다. 

“계속 여기 있을 거 아니면 이만 안으로 들어가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면 라피가 자다가 경기 일으킬 것 같으니.”

판테르 공작의 사늘한 눈동자를 본 티그리그 공작은 부인이 중간에 깨지 않도록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제가 얼마나 부드러운 눈빛으로 봤는데 그러십니까. 안 그러냐. 에리카, 그리고 사위?”

“네, 우리 아버지 눈빛은 우유 넣은 커피처럼 부드럽습니다. 제롬, 안 그런가요?”

“물론이지요. 저를 볼 때마다 뜨겁게 타오를 정도로 따사롭지요. 크흠! 얼른 자리 이동하시지요. 우리가 떠들다가 처제랑 티그리그 공작부인께서 깨실 것 같으니.”

서서히 예열된 판테르 공작의 시선에 제롬이 헛기침을 하며 반대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때야 어르신들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움직이다가 응접실로 들어가자 차가 나왔다. 

“실물로는 처음 뵙겠습니다. 고모부님, 그리고 아퀼라 공작 내외분! 다니엘 티그리스라고 합니다. 여긴 제 처인 헬레나 티그리스입니다.”

직접 다과를 들고 온 다니엘과 헬레나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며 테이블에 차와 과일을 놓았다. 

“그래, 실물로는 처음 보는군. 일전에 우리 딸과 통신하고 있을 때 중간에 나타나서 데리고 나갔었지.”

“기억하시는군요. 그때 나들이가 계획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데려갔답니다.”

판테르 공작은 딸과의 통신을 방해한 다니엘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 다니엘은 괜히 식은땀이 흘렀다. 

“우리 라피 아가씨 덕분에 그간 너무 행복했습니다. 라피 아가씨께서 오신 후로 할머님도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계시고요.”

“그런가. 그건 다행이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네. 애초에 아버님과 일주일간 있기로 약속했으니.”

헬레나의 말에 판테르 공작은 단칼에 잘라 말했다. 약속한 일주일 지났으니 데려가려고 왔다는 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응접실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사위, 그러지 말고 라피를 잠시만 더 데리고 있으면 안 되겠는가. 부인이 저리 좋아하는데 떼어놓으면 다시 몸져누울 것 같네만.”

“그건 안타깝긴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평생 라피를 이곳에 두자는 말로 들립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었던 제롬과 에리카는 차를 마시며 귀를 열었다. 

“정말 어떻게 안 되겠는가.”

“네, 어떻게 안 되겠습니다. 처음에 아버님이 분명히 약속은 잘 지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을 하고 라피를 이곳에 데려왔던 티그리스 공작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차가 아닌 술을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아직 대낮인데 벌써 낮술을 마시느냐는 시선으로 판테르 공작이 봤다.

잠시 후 술과 잔을 해럴드가 가지고 와서 묵례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해럴드는 조심히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순간 알싸하지만 달콤한 향이 주위를 감돌았다.

“앗! 할아버지, 이거…… 그거 아닙니까?”

술 향을 맡은 다니엘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러자 티그리스 공작의 고개가 한 차례 위아래로 흔들렸다.

“수십 년 전 황궁 창고에서 잠들어 있는 술을 이야기를 잘해서 받아온 것이라네.”

“그게 아니라 속된 말로 협박해서 삥 뜯은 것이겠죠.”

“삥이라니! 난 그저 황궁 창고에서 빛도 못 보고 굴러다니는 게 안쓰러워서 선황제한테 말해서 가져온 것이건만.”

“제가 그때 봤습니다만. 선황제 멱살 잡고 흔들지만 않았지 거의 강탈하다시피 하고 가져오신 거잖아요.”

다니엘의 말만 들어도 티그리스 공작의 성격은 안 봐도 뻔히 보였다. 선황제마저도 무서워하기는커녕 잡고 흔든 모양새에 제롬은 픽, 웃음을 터트리며 와인을 봤다.

이백 년 전에 만들어진 미네스트로.

이 세상에 몇 병 남아 있지 않은 와인 중 하나로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미네스트로군요. 상당히 구하기 힘드셨을 건데.”

와인을 본 제롬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셔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탐낸다는 와인이었다. 

“구하기 힘들긴, 선황제한테 말하니 알아서 갖다 줬네만. 흐음, 사위님은 왜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건가.”

미네스트로를 노려보기만 한 판테르 공작을 본 티그리스 공작이 슬쩍 물었다. 

“전 술 끊었습니다.”

“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리카가 판테르 공작을 보며 물었다. 아퀼라 공작저에 가기 전까지 제 아버지는 항상 와인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론 그 후로도 가끔 술을 과하게 마신다고 새어머니가 걱정하곤 했었다. 그 정도로 술을 자주 마셨던 애주가인 아버지가 술을 끊었다는 말에 에리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떠난 후부터 마시지 않는다.”

판테르 공작의 한마디에 응접실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미네스트로를 맛볼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있던 제롬은 고개를 숙였다.

술을 마시게 해서 회유해 보려고 했던 티그리스 공작은 제 부족한 생각을 탓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아뇨. 아무것도, 그냥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그때 아버지께 했던 말 전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향기에 취한 것이더냐.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금주까지 할 정도로 괴로워했을 아버지의 손을 조심히 잡은 에리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에리카의 어깨를 다독여 주는 판테르 공작이 다른 의미로 부러운 티그리스 공작이었다. 

“우리 세라피나와 결혼할 남자한테 예물로 보낼 생각이었다네.”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판테르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게 주십시오.”

세라피나의 무덤가에 뿌려 주기라도 하려나 싶었던 티그리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멱살을 아니 황제 옷깃을 살짝 터치하고 받아낸 미네스트로를 판테르 공작에게 줬다. 그걸 받은 판테르 공작은 빈 잔에 따랐다.

“자네, 금주했다면서.”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주신 선물이니 바로 마셔 봐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오랜만에 저도 한잔하고 싶군요.”

티그리스 공작의 잔에도 미네스트로를 따랐다. 루비를 으깨 놓은 듯한 색깔과 감미로운 향기가 주변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버님, 저는요?”

“어른끼리 말하는데 자네는 좀 빠지게.”

“아버님! 저도 어른입니다. 처제보다 나이 많은 아들을 낳았다고요.”

“저, 저도 결혼 적령기의 아들 둘이 있습니다만. 크흠흠!”

제롬과 다니엘의 말을 들은 판테르 공작은 어이없다는 듯이 보면서도 술을 나눠 줬다. 

“주도는 아버지가 가르쳐 주시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그걸 가르쳐 주지 않았구나.”

뭔가 가르쳐 줄 틈도 없이 아퀼라 공작가로 가 버린 에리카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러자 헬레나가 방긋 웃으며 빈 잔을 수줍게 내밀었다. 어쩌다 보니 같이 술을 마시게 된 이들은 처음보다는 분위기가 유순해졌다. 

“우리 손녀가 말일세. 하하하, 우리 첫째 증손자 놈이랑 실베스터 공주와 다리를 놔 줬지 뭔가. 그 짧은 다리로 뽈뽈거리며 뛰어다니면서 혼자 바빴지.”

“우리 라피는 못 하는 게 없지요.”

“맞네. 정말 못 하는 게 없어. 몸져누운 제 할머니도 낫게 한 신기한 재주를 지녔지. 그리고 말일세…….”

술 한 잔에 원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티그리스 공작과 판테르 공작은 진짜 장인과 사위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같은 주제로 말이다.

“우리 라피는 제 품에서 자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제 품에 안긴 채로 잠이 들었는데 아이가 제 옷을 잡고 놓지 않더군요. 덕분에 옷을 벗어 두고 올 정도였습니다.”

“크읍! 그렇군. 다음엔 나도 라피와 함께 자고 싶군. 항상 제 할머니와 같이 자니 나는 밤에 같이 잘 수가 없어.”

“두 분이 동침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라피를 사이에 끼워 두고. 한데 우리 라피를 데려가야 해서 그럴 시간이 없는 게 좀 안타깝군요.”

“아니 이것 보게, 사위!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시간을 주게나.”

라피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할 때 제롬은 남은 미네스트로를 어른이되 어른 취급 받지 못한 이들과 나눠 마셨다.

“이거 향이 참 좋군요. 그나저나 우리 처제 인절미 같은 볼은 만져 보셨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차진 말랑 콩떡 같은 촉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나저나 거기에서는 찹쌀떡과 인절미라고 부르나 보군요. 우린 말랑 콩떡인데.”

제롬과 다니엘이 이야기할 때 에리카는 헬레나와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가씨는 동화책 읽어 주는 걸 좋아해요. 한데 보통 아이들과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더군요.”

“당연하지요. 누구 동생인데요.”      

라피를 안주 삼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병이 비게 되었다. 그러자 해럴드가 눈치껏 다른 술을 대령함과 동시에 안주로 말랑한 콩떡과 찹쌀떡을 가져왔다. 

덕분에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서로 얼어붙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금이 쩍쩍 갈라질 정도로 냉한 세 가문이 뭉쳐 있으니 참 보기 좋았다. 

“똑, 똑, 똑.”

응접실 안에 가득한 소음에 묻힐 뻔한 조그만 목소리였다. 하지만 다들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고 문을 바라봤고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두들기며 노크 소리를 말로 한 조그만 찹쌀떡이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라피, 이리 온!”

서로 자신에게 와 달라고 팔을 벌리자 라피는 응접실을 쓱 봤다. 그러고는 두다다닥- 뛰어서 판테르 공작의 품에 안겨들었다.

“이놈! 분명 일주일이라고 했는데 왜 약속을 안 지킨 거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판테르 공작이 말하자 라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라삐가 가기 시러서 그론고 아니에여.”

“그럼 왜 안 온 것이더냐.”

이왕 말하는 거 뻥은 거창해야 제맛이다. 두 볼에 힘을 준 라피는 도륵도륵-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라삐가 안 가면 요기에 아빠가 올 거자나요.”

“어느 누가 제 자식이 밖에서 싸돌아다니는 데 마음 편할 리가 있겠느냐.” 

라피의 온기를 온전히 제 품에 가둔 판테르 공작은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대로 돌아갔으면 했지만 라피의 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빠랑 하부지가 이야기 하묜 참 조을 거 가타서여. 헤헤, 구로면 앙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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