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너무 억울하고 분한 판테르 공작의 반응에 오스카는 고개를 좌우로 저을 뿐이었다. 비싼 통신구를 사수했다는 것에 만족해할 뿐이었다.
“이러다가 우리 미래의 며느님을 티그리스 공작님에게 빼앗기는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처음 볼 때부터 침을 흘리시던데.”
“후우, 당장! 거기 갈 준비 하게나. 라피를 데려와야겠어.”
“네, 당연하지요. 그러니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하신 후에요.”
벤스가 서류를 제 머리 높이까지 쌓아서 앞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판테르 공작이 쳐낼 것이라고 여겼지만 의외로 순순하게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확인했다.
오스카는 장작이 된 책상을 시종들을 불러 치우게 한 후 다시 새것으로 놓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예비용으로 만들어 둔 책상이 몇 개 더 있었다.
미친 듯한 속도로 일을 처리한 판테르 공작은 오스카를 보더니 다시 통신구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티그리스 공작저에 연락을 할까요?”
“아니, 아퀼라 공작저로 연락하게. 라피 문제 때문에 그러니 얼른 연락받으라고.”
그냥 연락하면 에리카가 안 받을 것 같아서 라피 때문이라고 하자 곧장 답이 왔다.
[아버지, 무슨 일인가요? 티그리스 공작저에 간 라피한테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통신구를 통해 연락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판테르 공작은 제 딸을 보며 한 마디 했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다.”
[그게 무슨 일인가요? 어디 다치기라도 했습니까.]
“그건 아니고, 라피가 이곳으로 오려고 하지 않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요! 어째서요! 평소에 아버지가 저 안 볼 때 라피 구박하면서 우리 인절미 볼을 찌그러뜨렸습니까.]
아빠 바라기인 라피였다. 판테르 공작의 가슴이 제일 좋다며 찹쌀떡처럼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티그리스 공작저에서 오지 않으려 한다는 말에 에리카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안 볼 때 아이를 학대한 게 아니냐고 두 눈 까뒤집고 보는 큰딸을 보며 판테르 공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티그리스 공작저엔 가족들이 많아서 좋다고 여길 오는 날이 지났는데도 안 오는구나.”
[아…….]
그때야 라피가 안 오려고 한 이유를 알게 된 에리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못 가 본 나들이를 간다고…….”
[뭐라고요? 아니 그걸 왜 티그리스 공작가 사람들이랑 간답니까. 저도 라피랑 못 가 봤는데.]
둘은 역시 부녀지간이었다. 같은 것에 열 받은 모습에 뒤에 서 있던 오스카는 피식 웃었고, 벤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 혼자 가서 라피를 데려오고 싶은데 안 오려고 할 것 같구나. 그래서 말인데…….”
[가요! 저도 가겠습니다. 이 기회에 티그리스 공작저 구경이나 하지요. 남편 끌고 내일 집으로 갈게요. 준비해 주세요.]
부녀는 죽이 잘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라피가 없어서 판테르 공작저에 오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에리카였다. 한데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자 안절부절못하는 중 진실을 알게 되자 당장 올 준비부터 했다.
아퀼라 공작저와 티그리스 공작저 사이엔 워프 게이트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티그리스 공작저에 가려면 어쩔 수 없이 판테르 공작저에 가야만 했다.
[저도 우리 라피의 언니라고요. 게다가 형부도 있는데. 감히 쪽수로 밀어붙였다 이 말인가요? 그럼 우린 양보다 질로 가요. 아버지!]
“알겠다. 그러니 내일 그놈 끌고 오려무나. 한데 콜린은 잘 있더냐?”
생전 처음으로 제 아들의 안부를 묻는 판테르 공작을 본 에리카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자신이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새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퀼라 공작저에 와서 알뜰살뜰하게 챙겨 주며 보살펴 줬었다.
[콜린은 두고 갈게요. 우린 라피를 데려오기 위해 전쟁 중이니까요.]
뭔가 유혈사태를 벌일 것 같은 에리카를 본 판테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신을 끊었다. 처음으로 통신구로 딸과 연락해 본 판테르 공작은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심장이 조금 간질간질해진 느낌에 판테르 공작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게 라피 덕택이겠지. 만약 구운 찹쌀떡이 이곳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떻게 되긴요. 있으나 마나한 사이가 되는 거지요. 역시 우리 미래의 며느님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게 하는군요.”
“그놈의 미래의 며느님 소리는 그만하지. 결혼이나 하고 말하든가. 그리고 난 절대로 자네 집에 우리 라피는 안 보낼 거니 그리 알게나.”
못 박듯이 절대 크리스토퍼 후작가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판테르 공작은 빠른 속도로 일을 해치웠다. 그러고는 곧장 티그리스 공작저에 갈 준비를 했다.
인정은 못 받았지만 그래도 법적으로는 사위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많이 안겨 주고 딱 하나만 받아 와도 남는 장사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겼다.
가지고 갈 물품을 바리바리 쌌고, 다음 날 에리카가 제롬을 데리고 왔다.
“티그리스 공작가와 전쟁이라면서요.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으음, 이번엔 무조건 탈환해야만 하네.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위험해!”
“이를 말씀입니까. 당연하지요. 우리 귀여운 처제를 약속 기일이 끝나도록 안 돌려보내다니. 인절미 볼을 얼마나 만지고 싶었는데.”
분명 콜린도 라피 또래였다. 한데 볼을 잡을 때마다 쫀득쫀득 차지게 달라붙는 촉감이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라피의 볼을 손에 넣을 것이라고 장담한 제롬을 본 판테르 공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거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되겠니?”
“아버지, 상태가 저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상대가 여섯이니까 우리도 절반은 채우고 가야지 않겠습니까.”
에리카의 말에 일리가 있기에 미덥지 못했지만, 제롬과 함께 워프 게이트에 올라섰다. 미리 그곳에 갈 것이라고 연락을 해 뒀던 터라 워프 게이트는 쉽게 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변이 바뀌었다. 흐릿한 배경이 선명해졌고 처음으로 티그리스 공작저에 도착한 판테르 공작이 묵례했다.
“오랜만입니다. 아버님.”
“이곳에서는 처음이군.”
정말 처음으로 처가댁에 오게 된 판테르 공작이었다. 세라피나와 결혼한 후 이곳과 워프 게이트를 설정했었다. 하지만 그녀가 티그리스 공작가와 교류하지 않아 유명무실하게만 남아 있었다. 부인을 위해 만든 워프 게이트를 딸 때문에 처음 사용한 판테르 공작은 슬쩍 주변을 봤다.
“처음엔 자네만 온다고 들었는데 줄줄이 데리고 왔군.”
“안녕하십니까. 티그리스 공작님.”
“안녕하세요. 티그리스 공작님.”
제롬과 에리카의 인사를 받은 티그리스 공작은 고개만 한 차례 끄덕였다. 라피의 일에 한해서는 기본적으로 3대 공작이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 라피는 어디 있습니까. 설마 제가 온다는 말을 듣고 몰래 빼돌린 것은 아니겠지요?”
“우릴 뭐로 보는 건가. 아이는 지금 정원에 있네.”
“당장 그곳으로 가지요.”
짐을 풀기도 전에 판테르 공작은 마음이 매우 급했다. 지금이라도 어린 딸을 데리고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기에 처음 온 곳을 구경하기는커녕 얼른 목적지를 정해 가고자 했다.
“그래도 아비라고 딸이 그리도 보고 싶었나 보군.”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 딸이니까요. 아무리 딸이 못난 일을 하든 제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해도 딸은 딸이니까요.”
판테르 공작의 말을 들은 티그리스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저는 이제라도 더는 후회할 짓 하지 않을 겁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할 겁니다. 제 마음을 숨기는 것 따위는 못난 짓이라는 것을 알았거든요.”
“그렇군. 자네만이라도 더는 후회 없는 삶을 살게.”
두 공작의 말을 듣던 제롬과 에리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남우세스러워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애정 표현 따윈 해 본 적 없는 제롬이었다. 한데 그게 돌아가시고 나서야 후회가 되었다.
너무 늦은 후회를 품은 제롬은 하얀 국화 속에서 잠든 아버지에게 가서 그때야 말할 수 있었다. 비록 대답은 들을 수 없었지만, 처음으로 아버지의 표정에 미소가 그려진 것 같았다.
그런 제롬을 뒤에서 지켜봤었던 에리카는 남편의 손을 꼭 붙잡아 줬다. 그 모습을 보고 절대 후회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막상 아버지를 본 에리카는 악담을 퍼부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쏟아냈지만, 아버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죽은 아내를 보며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처음엔 너무나 화가 나서 소리쳤지만 돌아오고 나서야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것에 후회했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와 다시 교류하게 되었지만, 그때 일을 사과하지 못한 에리카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가 상처 하나쯤은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연을 끊다시피 살았지만, 다시 그녀를 닮은 아이로 인해 이어졌다. 가슴 속에 품은 상처조차 덮어 버릴 정도로 쫀득함을 지닌 아이가 너무 보고 싶은 에리카는 판테르 공작보다 먼저 앞서 걸었다.
“당장 내 동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게. 참고로 난 우리 라피의 친언니일세!”
그래. 양보다는 질이다.
자신이 그냥 언니도 아니고 친언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말한 에리카는 티그리스 공작저의 고용인들을 봤다.
“아버지, 뭐 하세요. 얼른 라피 데리러 가야지요. 언제까지 꾸물거릴 겁니까.”
“당연하지 않느냐. 아버님, 우리 딸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부녀가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말하며 앞으로 나갔다.
“우리 귀여운 처제를 당장 데리고 가요. 처제 없는 처가댁은 콩고물 털린 인절미 같으니까요.”
제롬까지 얼른 라피를 데려가려는 모습에 티그리스 공작은 피식 웃었다.
“역시 우리 손녀는 여기든 저기든 찰떡 같은 존재로군.”
세 사람이 고용인을 앞세워 제집을 휘젓기 전에 티그리스 공작이 앞장서서 걸었다.
“우리 라피, 잘 먹고 잘 잤습니까?”
“당연하지. 매우 잘 먹고 잘 자네. 보면 깜짝 놀랄걸세.”
정원으로 가는 내내 판테르 공작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티그리스 공작은 짜증내지 않고 대답했다. 아주 오래전 늦둥이 딸을 낳았을 때도 어딘가에 출장을 다녀오면 항상 딸의 안부를 먼저 묻곤 했었다.
“라피는 뭐 하고 놀았습니까. 우리 아이는 보석 달린 장난감을 좋아하는데.”
“정원에서 굴러다니기도 하고, 때론 내 증손자들이랑 같이 공부도 하고 그런다네. 한데 자네도 알고 있나? 우리 라피가 글쎄 고대어도 술술 읽더군.”
“네? 정말입니까? 역시 누구 딸인지 몰라도 참 똑똑하군요. 아직 글도 안 배웠는데 고대어를 알다니.”
“그렇지? 누구 손녀인지 몰라도 참 똑똑해. 오히려 우리 증손자들이 제 고모 따라다니면서 배우고 있다네. 허허!”
“우리 구운 찹쌀떡이 세라피나를 많이 닮았나 봅니다.”
“허허, 그건 인정하겠네. 우리 세라피나가 그냥 콩떡이라면 라피는 콩가루가 탈탈 털릴 정도로 뽈뽈대며 달리는 말랑한 콩떡이라네.”
딸바보와 손녀바보 둘이 합쳐지자 묘하게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듣던 에리카와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하며 걷던 중 다들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발을 멈췄다.
정원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검은색 동물을 품은 라피가 티그리스 공작부인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잠들어 있었다. 그 양옆엔 에이든과 제이든이 자리를 틀고 있었는데 책을 보고 있다가 잠든 것 같았다.
네 사람 모두 잠이 든 상태였고, 그 모습을 본 고용인들은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급히 고개 숙였다.
“음냐…… 조카드라, 재롱 부려바아아…….”
제 할머니 품에 안겨 잠꼬대를 하는 라피를 본 이들은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에서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라피가 잠꼬대를 할 정도면 장성한 조카들이 조금은 고생한 것 같았다.
자는 중에도 헤죽 웃으며 말하는 라피는 입술을 오므렸다가 폈다.
“나 쉬야 안 해쏘. 아빵, 사탕 주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