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똥멍청이라고 말하자 에이든이 엄청 자존심 상한 듯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로판 경력 n년, 나에겐 남의 연애 정도는 어느 정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날 에이든을 앞에 두고 연애란 무엇인가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다.
처음엔 듣는 척도 하지 않더니 어느 순간에 수첩을 든 채 메모를 하고 있었다. 발음이 자꾸 샜지만, 강의 듣는 데 문제는 없어 보이는 듯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뒤돌아섰을 때를 알아보라고? 자고로 여자는 앞에서 표현을 안 해도 뒤돌아서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구로치!”
“그럼 몸을 숨기고 살펴봐야겠군.”
“웅!”
“그리고 여자도 그렇지만 남자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과 결혼해야 햄볶는다고? 그놈의 햄을 계속 볶다가 타들어 가겠군.”
“때끼! 어룬이 말하눈데 구로케 말하묜 앙대지!”
에이든이 적은 메모장을 보고는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쫙 그었다.
“근데 꼬맹이 주제에, 아니 고모가 글을 알아?”
내가 줄을 그어 주며 여기가 포인트라고 말해 주자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냥 이 글자가 마음에 들어서 밑줄 쳤다고 해야 하나.
“헹, 형은 모르는구나. 고모가 고대어도 할 줄 안다는 거. 나 요즘 선생님한테 혼 안 나잖아. 그거 고모가 가르쳐 준 거야.”
“뭐? 고모가 고대어를 안다고? 말도 안 돼.”
그래. 나도 로판 법칙이 이 동네에도 포함되어서 고대어가 한글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단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졸리다고 말하자 곧장 제이든이 나를 안아 올렸다. 제이든과 함께 밖으로 나가면서 에이든을 보며 말했다.
“구롬 낼 보자. 조카드라.”
* * *
잠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 옆에서 잤다. 그걸 할머니가 좋아하시니까. 완벽하게 예쁘고 귀여운 척하는 손녀가 된 나는 재롱떨며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 라피, 할머니랑 오래오래 같이 살자꾸나.”
“니에, 군데 하무니 요거 빌료주세여.”
할머니의 손수건이었다. 할머니가 수놓는 것을 좋아하셔서 아픈 와중에도 틈틈이 손수건에 수를 놓은 게 포개져 있었다.
“어휴, 우리 손녀가 원한다면 빌려주다 뿐이겠느냐. 그냥 다 가져다가 쓰렴.”
할머니가 준 손수건 중 가장 넓은 것을 가지고 나온 나는 그걸로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어제 할아버지에게 받은 것 중 하나를 먹은 후 주변의 연못가에 비춰 봤다.
“우와, 싱기해.”
금안이 적안으로 변했다. 눈동자 색을 변하게 하는 약을 먹은 나는 곧장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뒤에 붙은 사람들을 다 떼어 두고, 혼자 들어온 여자를 몰래 지켜봤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 흑요석을 박아 놓은 듯한 눈동자는 여지없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에이든의 방 쪽을 애가 타들어 가는 눈빛으로 보는 여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좋으면 가서 말 한 마디라도 해 볼 것이지, 짝사랑하는 듯한 여자를 보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두다다다- 달린 나는 자연스럽게 발이 엉켜 바닥에 넘어졌다.
찰푸덕-
아이씨, 생각 외로 아픈데.
넘어져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대신 앞에 있는 여자를 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여자는 ‘어머!’ 하더니 달려와 나를 얼른 일으켜 줬다.
“세상에나. 아가, 어디 안 다쳤니? 아프지는 않고?”
나를 좌우 위아래로 살핀 여자는 옷에 묻은 흙을 조심히 털었다.
“갠차나여.”
“참 용감한 아이구나. 많이 아플 건데.”
나를 매우 장하다는 표정으로 본 여자는 주변을 살폈다. 나를 봐주는 사람이 없자, 그녀의 눈엔 약간의 초조함이 담겼다. 하지만 이럴 줄 알고 일부러 사람들을 멀리 떼어놓고 온 나였다.
“같이 온 어른은 없니?”
“업쪄여. 오쪼다보니 요기에 와써여.”
“저런, 길을 잃었나 보구나. 언니가 엄마랑 아빠 찾아줄까?”
“우웅, 엄마 업쪄, 아빠두 업쪄…….”
엄마는 없는 거 확실하고 아빠도 여기 없으니까 없는 것이 맞았다. 부모가 여기에 안 계시다는 뜻이었지만 조실부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자는 나를 꼭 끌어안고 등을 다독여 줬다.
“그렇다면 여기 고용인의 핏줄인가. 널 잃어버리고 찾느라 고생하겠구나. 언니가 너랑 같이 온 사람 찾아 줄게.”
말하는 것 봐라. 정말 상냥하기도 해라. 요즘엔 애가 넘어지든 말든 귀찮아서 신경 안 쓰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데.
“언니의 이름은 사비나란다. 특별히 비나라고 불러도 돼.”
“삐나? 나눈 라삐!”
“라피?”
“웅, 웅!”
내가 고갯짓을 하자 사비나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통성명까지 한 사이가 된 나는 사비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어머나, 공주님! 그 아인 누구인가요?”
“응? 라피라는데 누구 아이인 줄은 모르겠어. 바로 앞에서 넘어져서 데려왔는데, 부모가 없다고 그러네.”
“하지만 여긴 티그리스 공작저라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을 건데요. 집에 아이 혼자 둘 수 없어 고용인 중에 몰래 데려왔다가 잃어버렸나 봐요.”
“응, 그래서 말인데 몰래 알아봐야 할 것 같아. 괜히 티그리스 공작님 귀에 들어가면 이 아이랑 아이를 데려온 사람이 혼날 수도 있으니까.”
나를 안아 올린 이는 바로 사비나 실베스터 공주였다. 티그리스 공작이 다스리는 북부보다 더 북쪽에 있는 나라의 공주였다. 가끔 이곳으로 외유를 온다는데 어제 도착해서 할아버지가 맞이해 주고 쉴 거처를 마련해 줬다고 들었다.
“그럼 제가 조심히 찾아볼게요. 공주님은 아이를 숨기셔야 할 것 같아요. 괜히 눈에 띄면 안 되니까요.”
“그래야겠지? 라피, 잠시 답답하겠지만 참아 줘. 이걸로 널 덮을 거야.”
사비나가 나를 숄로 칭칭 동여맸다. 그러고는 애완동물을 데려가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여자치고 상당히 힘이 센 편인 것 같다.
“삐나 언냐눈 징짜 공쥬니미에여?”
“응, 공주님이야. 여기보다 더 북쪽, 엄청 추운 나라의 공주란다.”
“동생 이써여?”
“아니, 없는데. 결혼한 오빠 한 명 있어.”
“아빠랑 엄마눈?”
“아바마마만 계셔.”
“구롬 애인 이쪄여?”
호구 조사를 마친 나는 모르는 척 애인 유무를 물어봤다. 그러자 사비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애인은 없지만 사모하는 사람은 있단다. 근데 공주라고 다 사랑이 이뤄지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숄을 풀고 나온 나를 다독여 주며 사비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5년 전에 에이든을 보고 한눈에 반해서 이곳으로 일부러 외유를 온다고.
한데 에이든은 제 마음을 모르고 자신이 올 때마다 다른 여인에게 시선을 준다고 기가 팍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사비나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갠차나여. 언젠가눈 그 아찌가 도라바 줄지도 몰라여.”
“어머나, 어린아이가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나저나 내가 아이 앞에서 무슨 말을 한 거지. 어휴, 창피해라.”
내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전부 드러낸 사비나는 그때야 민망한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얼굴을 붉혔다.
“갠차나여. 나 어리니 아니에여. 나눈 어룬 대꼬니까.”
에이든의 5촌 고모가 된다고 말하지 못한 나는 방긋 웃었다. 그러고는 오전 내내 사비나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 줬다. 내 볼을 만지작대던 사비나는 이번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듯하더니 이내 멋진 올림머리가 되었다. 작은 은 핀으로 찔러서 고정하자 더 귀여워 보인다고 했다.
“이햐, 삐나 언냐 요론것두 할 줄 아라여?”
“응, 나 머리는 잘 만질 수 있어. 예쁘지? 이대로 나가면 아마 라피를 못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거야.”
거울로 내 모습을 계속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지가 확실히 달리 보였다. 상당히 마음에 든 나는 머리를 만져 보며 방긋 웃었다.
“그 머리핀은 라피에게 선물로 줄게. 라피랑 매우 잘 어울려.”
“정말 이뽀. 삐나 언냐, 고마뜹니다.”
때아닌 이미지 변신을 하게 된 나는 사비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그녀가 방긋 웃었다.
“어쩜 이리도 귀엽게 말할까. 근데 너를 데려온 사람이 누구기에…….”
“앗! 조기 이써여. 저 빤리 나가야게써여.”
“누구? 아…….”
창밖으로 내가 손짓하며 말하자 사비나도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마리아가 서 있었다. 이 저택의 모든 시녀를 사비나가 알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고 바로 나갔다.
“라피, 언니가 같이 가 줄게. 혼자 가다가 딴 사람에게 들켜서 여기까지 왔다고 혼나면 안 되니까. 언니가 잘 말해 줄게.”
“아니야여. 갠차나여. 구롬 뺘뺘.”
뭔가 섭섭한 표정을 짓는 사비나를 뒤로하고 나는 두다다다- 뛰어나갔다. 그러고는 밖에서 대기 중인 마리아에게 달려갔다.
“어머나, 아가씨 모습이 이게 뭐예요, 정말 예쁘세요.”
“요자의 뵨시는 무제! 조카 겨론시켜 주려고.”
“네? 조카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구론 게 이써여. 구니까 마리아도 비미리에여. 알게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다치지만 않게 해 주세요. 아가씨께서 다치면 슬퍼할 분이 많이 계시니까요.”
“낵아 다치묜 술포? 왜여?”
내가 다치면 왜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껏 나를 때리는 아비와 나를 버린 어미가 있었을 뿐이었다. 나를 때리면서 단 한 번도 눈물 흘린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악에 받친 욕을 하며 때렸다.
“우리 사랑스러운 아가씨가 다치면 저도 마음이 아프답니다. 그러니까 안 다치게 조심해 주세요. 다치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웅, 군데 나 또 쪼기에 또 가바야 해. 구롬 다메 바여.”
“아, 아가씨! 이제 점심 드실 시간인데.”
마리아를 뒤로하고 나는 곧장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눈 색깔을 바꿔 주는 약의 효능은 반나절뿐이었다. 그렇기에 점심이 되기 전까지 모든 볼일을 끝내야만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침 목표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이든을 만나러 왔다는 이유로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모나코 후작 여식인 마틸다였다. 정원을 구경하는 중인 마틸다는 나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 시간에 거지 같은 애가 여길 어떻게 온 거지. 고용인의 아이인가? 에이든 님에게 말해서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군.”
아까 넘어져서 먼지가 달라붙은 내 옷은 살짝 더러운 상태였다. 그걸 보고 거지 같다고 말하는 저 주둥이가 더 거지 같아 보였다.
“나 그지 아니에여.”
“말도 제대로 못하네. 이래서 난 애들이 정말 싫어. 됐으니까 좀 꺼져 줄래? 우리 에이든 님 만나러 갈 때 쓸 꽃 꺾어야 하거든.”
“요기 꼬슨 아줌마가 꺼끄면 앙대여.”
“뭐, 뭐? 너 지금 말 다했어? 아, 아줌마?”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마틸다는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그 시선을 받아넘긴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린 채 걸어가는데 갑자기 넘어졌다.
마틸다가 지나가면서 나를 옆으로 밀어 넘어진 것이다. 하필이면 꽃나무 쪽으로 넘어져서 몸에 생채기가 났다.
“호호, 네 주제를 알렴. 내 아버지는 티그리스 공작님의 최측근이셔. 모나코 후작 영애인 내게 어린애라도 그딴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그치만 아줌마눈 후자기 아니고 따리자나여.”
“부모가 누군지 몰라도 못된 것만 배웠구나. 나중에 내가 네 부모 얼굴 좀 봐야겠어. 어디 감히 눈을 부릅떠!”
“울 아빠랑 하부지 보묜 아줌마가 놀라서 먼저 디질 수도 잇눈데.”
“뭐야? 이 앙큼한 꼬맹이가 감히 지금 나한테 뭐라고 말하는 거야.”
바짝 손톱을 세운 마틸다가 잡으려고 하자 급히 일어난 나는 바로 뛰어갔다. 하이힐을 신은 마틸다는 나를 쫓아오지 못했다. 정신없이 뛸 때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괜찮아? 미안해. 모나코 양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구니까 낵아 말해짜나. 너 연애사옵 구로케하면 망한다고. 이 똥몽춍아! 에효효효.”
첫째 조카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니 때무네 낵아 늘근다. 늘거.”
이 나이대엔 그냥 먹고 놀고 자기만 해도 충분히 잘했다며 칭찬받을 수 있는데. 내가 어쩌다가 나이 많은 조카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일을 하게 되었는지 원.
내 팔자를 내가 꼰 탓에 나이 많은 조카님의 한탄을 들어 줬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기엔 우리 그랜 빠덜 가문의 앞날이 너무나 껌껌했다.
“여자 보눈 눈이 그 모양이묜 어룬 말이라도 드러!”
“미안해, 내가 너무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사귀었나 봐. 이 일을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해야 하나. 후우.”
축 늘어진 목소리와 함께 그의 팔에도 힘이 빠졌다. 자친 잘못하면 떨어질 것 같아 에이든의 옷깃을 꽉 붙잡고 말했다. 누가 보면 멱살 잡았다고 하겠지만.
“오또케하긴, 옛 마레 귀여븐 고모 말 잘 드르면…… 으, 으음, 어…… 아! 구래, 구거야. 자다가도 구운 찹쌀똑, 아니 말랑 콩똑이 생긴대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