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라피가 막 잠들기 전에 한 말에 한껏 밝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훌쩍이며 품에 파고드는 라피를 품은 소피아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말없이 조그만 등을 다독였다.
“어미가 없으니 얼마나 서럽고 아팠을꼬.”
아이에게 어미와 아비는 절대적이었다. 한데 어미가 없는 아이는 겉으로는 활달해 보여도 마음이 약해질 때 저도 모르게 말을 하곤 했다.
“밝게 웃어서 고모님을 그리워하시는지 몰랐어요.”
“자식은 늙어도 부모가 보고 싶기 마련이지. 부모 역시 아이가 늙어도 언제나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불안하고 말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부모 자식이었다. 그렇기에 과거가 어찌 되었든 부모가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판테르 공작저엔 사위만 있는 것입니까.”
“네, 하지만 판테르 공작한테 유진과 라피에게 어미를 만들어 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나직하게 한숨 쉬었다. 아이에게 새어미를 만들어 주라고 재혼을 권할 수조차 없는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꼼지락대는 라피를 품었다.
“그건 그렇지만, 후우…….”
“부인, 소피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딸은 지키지 못했지만 내 손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니까요.”
“네, 꼭 우리 라피만큼은 지켜 주세요. 어미 없이 크는 것도 상처받을 것인데…… 그리고 앞으로 사위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사위가 우리 라피를 미워하면 어떻게 합니까.”
딸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아무리 집안과 연을 끊고 나갔다고 해도 그곳엔 꼭 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티그리스 공작이 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그곳에 가면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가지 못했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판테르 공작의 얼굴을 보고 사위라고 불러 본 적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불안했다. 어미 없는 아이를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피를 데려오려고 내가 사위놈…… 크흠, 사위한테 사정하고 데려왔으니까. 사위도 아비라고 라피를 어디에도 안 보내려고 하더군요.”
“그럼 다행이네요. 한데,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우리 집에서 키우면 안 되려나요.”
“아마 사위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겠군요. 겨우 일주일 허락 받아 데려왔으니까요. 하지만 한 번 보내 줬으니 두 번째는 쉬울 겁니다. 그러니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티그리스 공작 부부의 대화를 들은 헬레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제껏 할머님이 저리 길게 말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기껏 말해 봤자 단답형이었는데 라피를 보자마자 그간 하지 못한 말을 한 번에 토해내듯 하셨다.
“할머님, 이제 약 드시고 좀 쉬시지요. 아가씨는 당분간 이곳에 계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밖에서 대기 중인 주치의에게 약을 받아 온 헬레나의 말에 티그리스 공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의 시중을 받아 겨우 약을 먹은 티그리스 공작부인은 천사처럼 잠든 아이를 봤다.
“아푼고, 아푼고 다 나라가라아아…… 하무니 아푸지 마여.”
잠꼬대인 게 분명한데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했다.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에, 쑤다둠 해 주는 거 조아, 따뜨테.”
“오냐, 이 할미가 얼른 건강해져서 매일 쓰다듬어 주마. 이번엔 꼭 우리 새끼 지켜 주마.”
티그리스 공작을 닮은 은발에 입맞춤한 소피아는 세상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자식이 죽은 이후로 저리 편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티그리스 공작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지자 헬레나도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쩜 저리도 예쁘실까요. 세라피나 아가씨보다 더 귀여운 것 같아요.”
“오죽이나 할까. 계속 이곳에 라피 아가씨가 계셨으면 좋겠어요.”
주변에 있던 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라피가 이곳에 있어 주길 바랐다. 단지 아이 한 명이 왔을 뿐인데 슬픔에 잠긴 곳이 이내 맑게 갠 것 같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곳에 고모의 아이가 왔…… 어래? 고모가 환생한 건가요?”
티그리스 공작 부부의 손자이자 다음 대의 티그리스 공작이 될 다니엘의 황금색 눈동자엔 익숙한 모습이 비쳤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늦둥이 고모와 함께 큰 다니엘은 라피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보고서에 그려진 그림을 봤지만, 실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세라피나의 딸이다. 그러니 그런 줄 알고 있거라.”
“할아버지,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고모가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데요. 세상에나, 완전히 똑같아요.”
제게 안아 달라고 떼를 쓰던 어린 고모가 떠오른 다니엘은 제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자는 아이를 보니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이 스몄다.
“다니엘, 지금은 소피아와 라피가 쉬어야 하니까 나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얼른.”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도 눈치 없이 계속 라피를 눈에 담은 다니엘을 잡아당긴 헬레나였다. 밖으로 세 사람이 나오자 앞에서 기다린 에이든과 제이든이 서서 멀뚱멀뚱 보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뚝뚝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스무 살과 열여덟 살의 증손자를 본 티그리스 공작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정원 한구석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티그리스 공작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안에 있는 아이는 내 딸인 세라피나가 낳은 딸이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
“너무 길구나.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 증조할아버지라고 하니 더 나이 들어 보이잖느냐.”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에이든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칠십대이니 증조부라고 불러도 어울리겠지만 마음만은 이팔청춘이고 싶은 티그리스 공작이었다.
“크흠, 할아버지, 고모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첫째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서 세라피나가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내 딸이 낳은 내 손녀이다. 그런 줄 알고 있거라. 저 아이는 내 딸이 보내준 선물이니까.”
“하지만…….”
“에이든, 제이든! 저 아이는 내 딸의 딸, 즉 너희에겐 5촌 고모님이 되시는 분이다. 앞으로 고모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모시도록.”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이든과 제이든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두 증손자를 본 티그리스 공작의 시선이 다니엘과 헬레나에게 닿았다.
“헨델의 말에 의하면 우리 라피에게 바람 속성이 느껴진다고 하더구나.”
“할아버지, 아무리 셀레스 백작이 그리 말했다고 하더라도 마법을 익히는 것은 힘들지 않을까요?”
“아이도 마법사가 되고 싶어 했다. 판테르 공작은 싫어했지만. 어쨌든 그리 알고, 너희도 고모를 대함에 예를 다해 행동하거라.”
초장부터 항렬을 정리한 티그리스 공작은 뒤돌아서 걸어가며 한 마디 덧붙였다.
“여기에서 라피가 울기만 하면 너희가 쫓겨날 줄 알거라. 마지막으로 조만간 실베스터 공주가 오기로 했으니 그리 알고. 그럼 이만 가 보마.”
그 한마디의 무게는 상당했다. 티그리스 공작의 성정에 진짜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사랑하는 딸이 적대 관계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자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겠는가.
“호호호, 전 티 파티 준비하느라 바쁘니 세 남자끼리 잘 논의해 보세요. 어휴, 우리 아가씨한테 읽어 줄 동화책도 골라야겠네.”
헬레나마저도 바쁘다고 빠지자 티그리스 성을 지닌 세 남자만 남겨졌다.
“아버지, 진짜로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아이를 고모할머니의 아이로 인정하는 건가요?”
“응, 할아버지의 명령이니까. 어린 고모의 모습 그대로 빼다 박아 놨더구나. 나에겐 어차피 나이 어린 동생이지만 너희에겐 고모니까 알아서 잘하려무나.”
제이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 다니엘이 자리를 뜨자 두 형제만 남겨졌다.
“이 나이에 새파랗게 어린 세 살짜리를 고모로 모셔야 한다고? 말도 안 돼!”
“그렇게 말이 안 되면 할아버지한테 따지든가. 왜 그렇게 정력이 왕성하셔서 늦둥이 고모 할머니를 낳으셨냐고. 아니면 모르는 척하면 되잖아.”
우르르 콰아앙-
에이든은 당분간 마법 공부를 핑계로 방에서 나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형의 말에 제이든도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비도 내리지 않는데 말이다.
한 차례 벼락이 친 이후 잠잠해졌고, 놀란 마음을 추스른 이들은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녁 식사부터 동원령이 내려져 끌려가야만 했다.
* * *
평소에 각자 식사를 해결했던 티그리스 공작 가족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식사 시간에 오지 않으면 따로 음식을 주지 않을 거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생전 처음 본 이들이 들어섰다.
“안녕, 내 이름은 다니엘이란다. 네 사촌 오빠야.”
“안냐세여. 라삐에여.”
할머니 품에서 곤히 자고 일어난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사촌 오빠 다니엘의 소개에 방긋 웃었다. 그러자 다니엘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두 손을 불끈 쥐더니 나를 안아 올려 볼을 꼬집었다.
“세상에나. 정말 쫀득하게 달라붙는구나. 하아, 너무 좋아. 진짜 말랑 콩떡이로구나.”
내 볼을 만지다 못해 이젠 제 볼을 갖다 붙이며 비비적대기까지 했다.
아빠는 찹쌀떡, 형부는 인절미라고 하더니 이 집에서는 콩떡이 되고 말았다. 이러다가 온갖 떡이 나오는 건 아닌가 싶다.
“여보, 말랑 콩떡 볼은 제 것이라고요. 더는 안 돼요.”
헬레나가 다니엘의 품에서 나를 빼앗아 안더니 볼을 조물조물 만졌다. 내 볼이 철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탓에 여러 사람의 손이 타자 이내 손자국이 남게 되었다.
“군데 조기 아조씨는 누규?”
아직도 뻣뻣하게 있는 두 남자를 보며 묻자 다니엘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 아들이란다. 에이든, 제이든! 얼른 고모한테 인사해야지 뭐 하느냐.”
다니엘의 부름에 두 아들은 순간 흠칫하더니 나를 보고는 마지못해 입술을 벌렸다.
“에이든이라고 합니다.”
“제이든이라고 해요.”
뜬금없이 나이 어린 고모가 생기자 못마땅해하는 투였다. 그런 두 조카님을 본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식사하자꾸나. 라피는 할머니랑 같이 먹고.”
“니에.”
할머니랑 같이 침대에 앉은 나는 수프를 먹으며 방긋 웃었다. 그러자 할머니도 나를 한 번 먹고 한 숟가락씩 드셨다. 아무래도 내 얼굴이 할머니에게 반찬 대용인 듯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과가 들어왔다. 쫀득한 콩떡을 노려본 나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에이든, 내가 듣기로는 여자를 만난다고 하던데 잘되고 있더냐. 너도 얼른 결혼해야지 않겠느냐. 나도 열여섯 살에 결혼해서 너를 낳았는데 말이다.”
이 나라는 대부분 십대 중후반에 결혼해서 아기를 낳곤 했다. 그렇기에 다니엘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첫째에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알아서 다 한다고 해서 놔뒀더니 아직도 진척이 없으니 내가 이리 말하는 것 아니더냐.”
평범한 집안처럼 자식의 결혼 문제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다니엘이었다.
“여보, 아직 인연을 만나지 못해서 그러나 보죠. 그러니 그냥 두세요. 이놈의 나라는 결혼하는 나이가 너무 빨라서 탈이라니까요. 옆 나라는 스무 살이 넘어야 결혼 적령기라는데.”
다니엘에 비해 헬레나는 신경 쓰지 않은 듯했다. 부부의 성향이 달랐지만 그래서 서로 잘 맞는 듯했다.
첫째 결혼 문제로 분위기가 싸하게 식자 할아버지가 나를 봤다. 이 순간에 내가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원.
눈치가 빨라도 문제였다.
“하무니, 낵아 노래 불러 주까여?”
“오! 우리 손녀, 노래도 부를 줄 알더냐. 꼭 듣고 싶구나.”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나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폈다 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파란 하눌, 파란 하눌 꾸미…….”
아기 염소를 불러 주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잘한다며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춰줬다. 다니엘과 헬레나까지 ‘잘한다.’를 연발하며 환하게 웃었다.
한 곡이 다 끝나자마자 할머니가 내 궁둥이를 다독이며 매우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이게 보통 집안의 반응인데 재롱 한 번 부렸다가 맞았던 나는 순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 다른 노래는 없더냐? 더 듣고 싶은데.”
“우웅, 구롬 하나만 더여.”
“오냐오냐.”
그날 난 이 집의 대 스타가 되었다. 심지어는 고용인들과 마법사, 그리고 기사들까지 별채로 몰려들어 창문으로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한 곡만, 한 곡만 더 하다가 몇 곡을 불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목이 컬컬해서 물을 빨며 나를 멀뚱멀뚱 보는 두 조카님을 보며 방긋 웃었다. 내가 이렇게 분위기 띄우려고 공연까지 했건만 두 조카님이 아무 반응도 없자 괘씸했다.
“낵아 에이랑 제이보다 어룬이랬짜나여.”
“오! 그렇지. 우리 라피가 에이든이랑 제이든보다는 어른이지.”
내 말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에이든과 제이든이 흠칫하며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려 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군데 어룬인 낵아 노래 부루눈데 왜 조카드른 나한테 재롱 안 부려여?”
“컥!”
에이든과 제이든은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켜며 컥컥댔다.
“맛짜나여. 어룬인 낵아 햇쓰니까 이제 조카드리 해야디. 안 구래여?”
“풉! 크크큭, 그래. 우리 라피 말이 맞구나. 하하하!”
순간 다니엘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할아버지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르자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서 두 조카를 보며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카드라 재롱 부려바바. 낵아 바주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