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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22)화 (22/164)

22화. 

형부와 아빠 그리고 티그리스 공작의 말을 가만히 듣는 것만으로도 참 재미있자 나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 이른바 3대가 모인 상황이 흥미롭기만 했다. 언니도 내 심정과 마찬가지인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반나의 5대 공작 중에 무려 셋이나 있었는데 말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 같기만 했다. 

“아가,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 할아비가 보석을 산으로 쌓아 줄 테니까.”

“아버님, 아이를 보석으로 유혹하지 마십시오. 안 좋은 버릇 듭니다.”

“우리 손녀는 안 좋은 버릇 좀 들어도 괜찮네. 유진을 보게나. 아주 꽉 막혀서 보고 있는 내가 다 답답할 지경이야.”

이곳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진 이야기를 한 티그리스 공작은 내 볼을 주물렀다. 

“유진과는 연락하고 지내셨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내 딸이 낳은 아들이니까. 비록 마법사의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해서 안타까웠지만.”

“사람마다 다 자기 갈 길은 정해져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머님도 마법사 집안에서 태어나 기사가 된 것을 보면…….”

“자넨 좀 닥치고 있게나!”

형부의 말에 아빠와 티그리스 공작이 처음으로 합을 맞춰 말을 했다. 그러자 형부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반나 제국의 최고 기사라고 할 수 있는 아빠가 당장이라도 포를 떠 버릴 것 같이 보고 있으니까. 티그리스 공작 역시 금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닿기만 해도 불이 날 것처럼 붉게 변했다.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나가게나.”

“저도 어른…… 이지만 나이가 적어서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처제를 데리고서요. 두 분 어르신이 싸우는데, 처제의 교육상 좋지 않으니까요.”

그럴싸한 이유를 댄 형부가 나를 티그리스 공작의 품에서 빼앗아 들었다. 

“처제, 얼른 할아버지랑 아버지에게 인사해야지.”

“니에, 뺘뺘, 다메바여.”

황당한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보며 손을 흔들어 준 나는 형부의 품에 안겨 언니와 함께 나왔다. 응접실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를 보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려 세 개 가문의 보좌관들이 두 눈에 힘을 주고 어떻게 되었냐는 듯이 바라봤다.

“들어가는 즉시 축 사망이니 자살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문을 열어 줌세.”

형부의 말에 앞에 있는 이들의 고개는 좌우로 흔들렸다. 잠깐의 고요함 뒤로 엄청난 열기가 응접실 안쪽에서 느껴졌다. 진짜 그냥 들어갔다가는 통구이가 될 것만 같았다. 

“이제 우리 뭐 할까, 처제.”

“우웅, 후아암!”

생각해 보니 오늘 낮잠을 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하품을 하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긴장이 풀린 나는 형부의 품에서 축 늘어졌다. 그러자 언니가 나를 보더니 형부의 품에서 강제로 떼어냈다.

“언니 방 구경해 볼래?”

“니에.”

나는 언니 품에 안겨서 처음으로 그녀의 방을 구경했다. 순수하고 청결해 보이는 하얀색과 발랄한 핑크로 도배가 된 방엔 앉는 것도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요기가 언냐 방이에여?”

“응, 언니가 아퀼라 공작저에 가기 전까지 쓰던 방이야. 어때? 새어머니가 꾸며 주셨던 방인데.”

“이뽀여.”

정말 예뻤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도 좋아할 만한 방이었다. 방을 둘러보던 나는 다시 한번 하품했다. 졸음을 이겨 보려고 했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았다. 

“언냐, 라삐 졸려여.”

고개가 저절로 꾸벅여지며 언니의 어깨에 기댔다. 

“졸려? 그럼 오늘은 언니랑 같이 잘까? 언니도 여기 갑자기 오느라 좀 피곤하거든.”

“우웅, 라삐랑 가치 자여, 후아암!”

아이에게 졸음을 쫓는 것은 세상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본능에 순응해야지. 졸리면 자고 싸고 싶으면 싸는 게 아이들의 본능이었다. 이에 나는 본능을 억지로 이겨내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만사 귀찮아진 나는 언니 품에 안겨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 *

라피가 에리카와 함께 잠이 들자 제롬이 이불을 덮어 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지만 라피가 나간 후 응접실은 후끈 달아오르다 못해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차가 식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남은 두 사람 사이엔 한참이나 대화가 없었다. 티그리스 공작은 곧장 마나를 이용해 차를 데워서 마셨다. 

“저 아이를 딸로 입적한 이유가 뭔가.”

처음부터 물어봤어야 할 이유를 지금 묻는 티그리스 공작이었다. 그의 물음에 판테르 공작은 식어빠진 차를 마시며 대답했다.

“이번만큼은 지켜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세라피나 닮아서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한 것은 아니고?”

“제가 미쳐도 그럴 일 없습니다. 곱게 키우고 지켜서 눈물 흘리지 않게 할 것입니다. 제가 죽는 날까지 그녀에게 받은 행복을 아이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판테르 공작의 말에 티그리스 공작은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죄인이었다. 둘 다 세라피나를 지켜 주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때 많은 이가 상처를 받아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다들 어린 라피를 보며 세라피나에게 제대로 해 주지 못한 사랑을 주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주고 싶어 했다. 

“하아, 그것 참…….”

티그리스 공작이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손을 떼자 은발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비록 티그리스 공작님의 핏줄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 아이를 세라피나가 낳은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는 우리 딸이 낳은 아이가 맞네. 그러니 그런 줄로 알고 있게나.”

라피의 혈통에 관련된 문제는 이것으로 해결이 되었다. 티그리스 공작마저도 라피를 딸이 낳은 아이라고 말했으니 황실과 신전 측에서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서 말인데 그 아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고 싶네.”

“그건 안 됩니다.”

“그 아이는 마법사로서 자질이 있어.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데려가서 공부할 수 있게 하겠네.”

“아비인 제가 허락하지 못합니다. 하루 이틀 공부한다고 마법사가 되진 않으니까요.”

수십 년을 공부해도 마법사가 될지 안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판테르 공작은 딸을 티그리스 공작에서 넘겨 주고 싶지 않았다.

“내 보좌관이 한 말 못 들었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네.”

“마법사를 거저 합니까. 기사가 수십 년간 검을 휘두르듯 아이도 방에 박혀 공부만 할 건데. 라피에겐 원하는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습니다.”

아이가 기사가 되고 싶다면 기사 교육을 해 줄 것이다. 아니면 그냥 평생 놀고먹길 원하면 그리해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거절했다. 

침울했던 분위기에서 갑자기 라피의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졌다. 무조건 마법사를 외치는 티그리스 공작의 공격을 막아선 판테르 공작은 고개만 흔들었다.

“좋네. 그럼 그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하고, 우리 집으로도 보내야 할걸세. 그래야 황실과 신전 놈들도 내 딸이 낳은 아이라고 믿을 테니.”

“그건 안 됩니…….”

“사위, 진짜 안 되는 건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호칭에 판테르 공작은 테이블 아래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세라피나와 결혼할 때도 티그리스 공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껏 사위로 인정도 해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오늘이 티그리스 공작이 판테르 공작저에 처음 온 날이었다.

그 정도로 연을 끊고 살았는데 아이 문제가 엮이자 처음으로 티그리스 공작이 사위라고 부른 것이다. 진작 불러 줬으면 세라피나가 생전에 조금은 마음 편히 지내며 웃었을 것인데.

판테르 공작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위라고 안 불러도 됩니다. 그럼 처음으로 이곳에 오셨으니 쉬다가 가시지요. 전 바빠서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판테르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혼자 남은 티그리스 공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이곳이 그리도 좋았더냐. 남자를 얼굴만 보고 고르지 말라고 했었는데.”

다섯 살짜리 딸이 열네 살의 조슈아 판테르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따끔하게 안 된다고 말했었다. 한데 딸은 집안과 인연을 끊고 이곳으로 오고 말았다. 

“결혼한다고 했을 때 얼굴이나 보러 올 것을…….”

불효막심하게도 늦둥이 딸은 부모를 두고 먼저 한 줌 흙이 되고 말았다.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혼절했던 티그리스 공작의 눈가엔 습기가 머금어졌다. 

“아가, 내 딸아…… 네가 죽어 우리가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할까 봐 그 아이를 보낸 것이더냐.”

연을 끊은 딸이 집에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멀리서나마 소식을 들으며 안도하곤 했던 티그리스 공작의 눈에서는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먼저 저세상으로 갈 줄 알았으면 딸이 원하는 대로 해 줄걸. 딸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지 못한 티그리스 공작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눈물이 더해진 차를 마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딸을 생각할 때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했던 티그리스 공작은 차를 다 마시자마자 언제 울었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와서 말했다.

“우리 손주 집이니 자고 가겠네. 그러니 알아서 준비하게나.”

* * *

한 집안에 공작 셋이 있는 기이한 현상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졌다. 조금은 이른 아침이라 꾸벅꾸벅 졸면서 씻겨지고 치장한 나는 하품을 했다. 

“아가, 이리 오너라.”

세 공작 중 가장 나이 많고 끗발 있는 티그리스 공작의 부름에 제니에게 떨어져 달려갔다.

“하부지, 안녀히 주무셔써여?”

“오냐, 우리 새끼 보려고 푹 자고 일어났단다. 어휴! 어쩜 이리도 예의가 바를까.”

나를 번쩍 안아 올린 티그리스 공작은 볼을 잡고 살살 늘리듯이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형부가 심장을 붙잡고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아침 첫 인절미를 잡지 못하다니. 이렇게 원통할 수가.”

“제롬, 밤의 마지막 인절미는 잡아 봤으니까 적당히 해요.”

형부와 언니를 본 나는 아빠에게 손을 흔들었다. 

“라피, 티그리스 공작님께서 식사하셔야 하니 이리 오…….”

“사위, 내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우리 손녀를 좀 더 데리고 있고 싶네만.”

사위라는 단어에 아빠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가 펴졌다.

“아버님, 걱정하지 마시지요. 제가 보기엔 벽화를 그리면서 오래 사실 것 같습니다.”

나를 두고 쟁탈전을 하는 듯한 두 사람을 보며 우유를 빨았다. 쪼옥, 쪼오옥 소리 나도록 우유를 마실 때 티그리스 공작이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아니?”

“……쩰리 가타여. 마싯겟따.”

어른 손톱만 한 빨간색 돌을 본 나는 순간 두 눈이 확장되었다. 저게 젤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처럼 말하자 티그리스 공작은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껄 웃었다.

“아가, 이것으로 말하면…….”

“안 돼! 라피, 그런 것에 유혹당하면!”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듯이 울렸지만 이미 내 눈은 빨간색 보석에 닿아 있었다.

“루비라는 보석이란다. 먹진 못하지만 먹을 것을 살 수 있단다. 할아비가 급히 오느라 우리 손녀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구나. 그러니 대신 이걸 주마.”

첫 만남에 루비를 주는 티그리스 공작, 아니 이젠 부자 할아버지가 된 그를 보며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 주눈 고에여?”

“선물이란다. 우리 세라피나, 아니다. 애칭이 라피였던가. 라피! 이걸 네게 주마.”

긴장으로 오므려졌던 내 손을 편 할아버지는 루비를 쥐여줬다.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 루비를 쥔 나는 방방 뛰면서 할아버지를 꼭 끌어안으며 외쳤다.

“고마뜹니다. 저 햄보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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