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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21)화 (21/164)

21화. 

티그리스 공작의 말이 이해되지 않은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나타나서 할아버지라니? 순간 분위기가 싸하게 식었지만, 아빠만은 열이 오른 듯 입술 한쪽이 씰룩였다.

“아버님, 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

“나도 알고 있네. 그러니까 내 손주이지 않은가. 아무리 봐도 우리 세라피나의 판박이로군.”

아빠의 말에 대답하는 티그리스 공작을 본 나는 그때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나와 닮았다는 판테르 공작부인의 아버지라는 것을 말이다. 어쩐지 나랑 외형이 비슷하더라니. 

한데 듣기로는 티그리스 공작가는 판테르 공작가와 척을 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판테르 공작부인이 이곳에 올 때 집안과 연을 끊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는 것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판테르 공작저에 온 것인가.

모든 상황을 알게 된 나는 아빠와 티그리스 공작님 사이에 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티그리스 공작님, 저 아이는 파멸의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명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라코 공작이 정중하게 말했지만, 티그리스 공작은 여전히 나를 보며 대답했다.

“파멸의 아이였으면 지금 자네 얼굴을 뭉개고도 남았을걸세. 안 그러느냐. 아가.”

나를 보며 말하자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무엇? 

바로 눈치!

“안냐세요. 라삐에여. 세 짤이구여. 마나소 방가버여.”

아빠의 품에 안긴 채 나름 정중하게 인사하자 티그리스 공작이 미소 지었다. 

“오냐. 난 펠레스 티그리스란다. 만나서 반갑구나. 우리 아가.”

그래. 인사를 하면 당연히 이렇게 답인사를 해야지. 예의 없는 드라코 공작은 이 상황이 어찌 된 건가 싶어 좌우 눈치 보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 드라코 공작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나는 아빠에게 내려 달라고 했다. 

바닥에 겨우 착지한 나는 심호흡 한 번 하고는 티그리스 공작을 향해 방긋 웃으며 뛰어갔다.

두다다닥-

티그리스 공작을 향해 뛰어가자 그가 두 손을 활짝 펼쳤다. 

“하부지!”

“오냐, 오냐! 내 새끼.”

역시 눈치는 있고 봐야 할 필수 아이템이었다. 나를 안은 티그리스 공작은 환하게 웃었다. 

“아가씨, 잠시 손 좀 잡아 볼 수 있을까요?”

티그리스 공작에게 안기자마자 옆에 있던 보좌관이 내게 조심히 손을 내밀었다. 

“아가, 내가 옆에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측정할 게 있어서 그런 것이니.”

두 손을 꽉 말아 쥐자 걱정하지 말라며 다독이는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조심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내 조그만 손을 살짝 잡은 남자로부터 묘한 느낌이 들었다. 거침없이 흘러들어오는 기운이 좀 전에 느꼈던 마나 길을 훅 훑자 나도 모르게 손을 빼 버렸다.

“시러! 이상한 느끼미 드러여.”

그 한마디에 아빠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내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마나 측정한 거네만. 우리 아가한테 뭔가가 느껴진 건가.”

아빠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노려봤지만, 티그리스 공작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옆에 있는 보좌관에게 물었다. 그러자 보좌관이 조심히 말했다.

“마나 길이 상당히 넓게 뚫려 있고,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것으로 봐서는 아가씨께서는 바람 속성일 겁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역시 우리 세라피나 아가씨의 따님이 분명합니다. 바람 속성 마법으로 대성해서 따라올 자가 없을 것입니다.”

보좌관의 말에 티그리스 공작은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지 나를 안은 채 머리에 입맞춤했다.

“자네, 내 보좌관이 한 말 들었지? 이 아이는 우리 집안 피를 매우 진하게 물려받은 게 분명하네. 기사 나부랭이보다는 마법사가 최고지.”

이 동네는 어찌 된 게 사위와 장인끼리 사이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대물림인가. 

“헤에, 나 마봅사 대수 이써여?”

“그럼, 이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마.”

“이햐, 씬난다.”

안 그래도 다시 마나를 쌓고 싶어서 안달난 상태인데 마법사가 도와준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앓던 이가 하나 빠진 듯 시원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도 뒤에서 아빠가 노려봐서 그럴지도.

“그나저나 자네들은 왜 안 가나. 우리 손녀한테 볼일 있나? 할 일 없으면 일찍 들어가서 발 닦고 자게나. 빈손으로 온 것을 보니 손님도 아닌 것 같은데.”

늦게 나타나서 모든 것을 전부 해결한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드라코 공작의 안면이 씰룩였다.

“티그리스 공작님, 그 아이는 대신관님의 예언에…….”

“대신관의 예언을 믿는 놈이 요즘 세상에 누가 있나. 그 예언은 언제든지 조작될 수 있거늘.”

여기가 사이다 맛집이야! 

알렉스 신관의 말까지 개운하게 말아먹은 티그리스 공작은 내 볼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자신의 볼에 대고 비벼댔다. 

“대신관님의 예언은 언제나 맞았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 여기에서 예언 하나 하지. 자네들은 오늘 안으로 이곳에서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걸세.”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알렉스 신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말씀은 지금 신전과 척을 지겠다는 것입니까.”

“응, 그런 것 같네그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형부도 비꼬는 것밖에 못 했는데, 티그리스 공작은 연륜이 높았다. 그냥 대놓고 후려치고 있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할 정도로 티그리스 공작은 상대가 공작이든 신관이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번 일은 대신관님께 직접 보고할 것입니다.”

“응, 그러게나. 그나저나 전국에 있는 마법사 중 절반이 우리 소관인 거 알지? 참고로 판테르 공작가의 마법사도 우리가 키웠지.”

“…….”

“여차하면 담합해서 매우 불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네. 지금부터 해 볼까? 자네들 황도까지 천천히 걸어가 보게나. 거지꼴을 못 면하게 될 것 같은데.”

황도로 돌아가려면 당연히 판테르 공작가 마법사의 마나가 필요했다. 한데 티그리스 공작가 소속인 마법사들이 파업하면 당장 워프 게이트조차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리된다면 맨몸으로 달랑 건너온 이들은 구걸하며 황도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문제라면 내가 듣기로는 동부에는 신전이 하나도 없었다. 몇 년 전에 이미 철수한 상황이라 원조받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동부를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찍소리도 하지 못하게 한 티그리스 공작이 알렉스 신관과 드라코 공작을 보며 대놓고 비웃었다. 

“지금 저희를 협박하는 겁니까.”

“응, 못 믿겠다면 내 직접 황궁에 있는 우리 가문 소속 마법사에게 연락해서 철수하게 하겠네. 어떤가. 이대로 곱게 집에 가고 싶은가, 거지가 되어 집까지 걸어가 볼 텐가.” 

티그리스 공작의 보좌관이 통신구를 꺼내는 모습을 본 드라코 공작은 곧장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오늘이 아니라 영원히 돌아가야 할 것일세. 알지? 나 성질 더러운 거. 또 우리 새끼 건드리려고 하면 그땐 그냥 확 마!”

두 눈을 부라리던 티그리스 공작을 보며 내가 손가락으로 가슴을 쿡쿡 찌르니 금방 표정을 풀었다.

“어휴! 누굴 닮아서 이리 예쁜 것이더냐.”

“우웅, 하부지 달마써여.”

“옳지. 역시 우리 손녀는 똑똑하다니까. 그나저나 자네들 아직 안 갔나? 하여튼 요즘 것들은 느려터져서 써먹을 데가 없어. 때잉, 쯧쯧쯧.”

귀찮다는 듯이 티그리스 공작이 손을 젓자 드라코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드라코 공작을 본 나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하부지, 아까 쪼기 아조씨가 낵아 인사해눈데 안 바다조써여. 에으가 업눈거 가타여.”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단다. 고로 사실적시명예훼손을 하자마자 티그리스 공작의 호박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공작씩이나 되어서 예의가 없어서는. 쯧! 우리 세 살짜리 손녀보다 더 못하군. 어디 가서 나 보더라도 절대 아는 척도 하지 말게나.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야.”

나를 안은 티그리스 공작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빠가 급히 불청객을 보며 말했다.

“잘 가게나. 멀리 안 나가네.”

피식 웃은 아빠가 얼른 우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형부와 언니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드라코 공작님, 알렉스 신관! 알아서 잘 가십시오. 멀리 못 나갑니다. 앗! 아버님, 저희도 같이 가요. 처제, 나랑 같이 놀자.”

드라코 공작과 알렉스 신관 무리가 가든지 말든지 다들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나를 안은 티그리스 공작의 시선이 아빠에게 닿았다. 이건 아마도 닥치고 길 안내하라는 시선인 것 같았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몇 달 보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고개 숙여 저자세로 말하는 것을 처음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옹서는 고부 사이처럼 물과 기름 같은 존재인 건가. 

아빠가 앞장서자 나를 안은 티그리스 공작이 뒤를 따랐다. 그러자 언니와 형부도 따라왔다. 응접실 안이 가족으로 채워지자 고용인이 다과를 내려놓고 보좌관들과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나를 안은 채 소파에 앉은 티그리스 공작이 등을 다독였다.

“어휴, 우리 새끼, 맘마 많이 먹었니?”

“니에. 머꼬, 자고, 노라써여.”

“그래, 아이들은 잘 먹고 자고 노는 게 일이니까. 잘했구나.”

내가 뭔 말만 해도 전부 잘했다고 말한 티그리스 공작이 아빠를 유심히 봤다. 티그리스 공작의 시선을 받은 아빠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아버님께서도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었습니까.”

“이 집에 뭐 볼 게 있다고 감시까지 하겠는가. 소문이 퍼졌더군. 이곳에 은발에 금안을 지닌 아이가 뚝 떨어졌다고.”

내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어차피 많은 사람이 봤으니 비밀로 할 수는 없었을 터이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지금은 드라코 공작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황제와 대신관이 또 기회를 엿볼지도 모르네.”

“네, 하지만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세라피나의…….”

“나도 알고 있네. 알고 있지만, 이 아이를 보니 우리 딸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군. 어쩌다가 늙어빠진 놈한테 홀딱 빠져 가지고.”

“아홉 살 차이밖에 안 납니다!”

“다섯 살짜리를 꼬신 인간이 말이 많군. 내 딸이 자네한테 꼬심만 당하지 않았으면 지금 내 곁에 있었을 건데.”

그 한 마디에 응접실 안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판테르 공작부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나는 알지 못했다. 다들 판테르 공작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라도 되는 듯 입을 다물었다.

“자네도 그렇지만 나도 내 딸을 지켜 주지 못했네.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지켜 주고 싶었네.”

“하지만 라피는 세라피나의 환생이 아닙니다.”

“알고 있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환생을 믿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데 어린 시절 우리 딸을 닮아서 말일세.”

무거운 말이 오가자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아빠가 선물로 준 호박이었다. 

“요거 바다써여. 하부지 누니랑 또까테. 이뻐여.”

“오! 그렇구나. 그나저나 고작 이걸 선물로 받은 것이더냐? 할아비 집에 오면 더 좋고 예쁜 것을 선물로 줄 텐데 말이다.”

호박보다 더 좋고 예쁜 것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침을 질질 흘렸다. 그 모습을 본 형부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내 입을 닦아 줬다.

“안 됩니다. 아이들이 물욕에 빠져들게 해서는.”

“그래서 자네를 짠돌이라고 하는 것이네. 오죽이나 짠돌이었으면 유진한테도 일 년에 용돈으로 1골드만 준단 말인가. 쯧!”

혀를 차는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나는 놀라 아빠를 봤다. 세상에. 그렇게 안 봤는데 이 세상 최고 짠돌이인 듯했다. 아들한테 하루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닌 일 년에 1골드라니. 여기 공작가 맞는 것인가. 

“그게 저의 교육 방식입니다.”

“아! 그랬군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왜 에리카가 제가 치장한 모습을 보고 처음임에도 찰싹 달라붙었는지.”

뭔가 엄청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은 형부는 아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에리카를 꼬시는 게 엄청 쉬웠습니다. 머리 텅 빈 것처럼 화려하게만 꾸미고 있기만 했으면 되었으니까요.”

“자네는 닥치고 가만히 있게나. 이 자리에서 죽고 싶지 않으면.”

“자네나 닥치게나. 이 자리에서 불 꼬챙이가 되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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