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20)화 (20/164)

20화. 

적막한 공간에 들어선 노인의 황금색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봤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어 먼지 한 톨 묻어나 있지 않은 곳을 본 노인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고얀 놈…… 아비를 두고 그리 떠나니 속이 다 시원하더냐!”

딸을 품은 아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본 노인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진하게 묻은 목소리로 탓하듯 말했다.

“미안하구나.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말한들 늦었지만…….”

나이 차이가 있는 남매가 머문 그림을 볼 땐 한숨이 섞이기는 하였지만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근심걱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림을 본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놈은 마차 사고로 생을 달리했고 늦둥이는 전쟁에 참전해 부모보다 먼저 떠나 버렸다.

자식 둘을 가슴에 묻은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투명한 액체가 엉겨 붙었다. 지금이라도 아빠라고 부르며 아장아장 걸어오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한번 붙으면 콩떡처럼 떨어지지 않던 조그만 딸과 동생을 자식처럼 키운 아들을 떠올린 노인의 눈동자엔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바빠서 제대로 돌봐 주지 못했는데…….”

늦둥이를 낳았지만 일이 너무 바빠 딸을 돌봐 주지 못했다. 그런 딸을 아비뻘인 제 오라비가 번듯하게 키워냈다. 마법사가 아닌 기사로.

마법사 집안이건만 기사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딸을 탓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림을 보던 노인은 주인을 잃은 소파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혔다.

똑똑똑-

“할아버지, 이곳에 계신 거 다 알고 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지 말거라.”

익숙한 목소리에 노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밖에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중요하게 보고할 게 있어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중요하지 않으면 엉덩이가 불날 줄 알거라. 냉큼 들어와 보고해.”

얼른 해치우고자 한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보인 이는 그림의 주인공과 똑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했지만, 노인은 딱히 표현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들이 저를 닮은 손자를 남기고 죽어서 제가 죽을 때까지 제 아들이 어떻게 나이 들어갈지 볼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할아버지, 동부에 웬 어린아이 하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합니다.”

“다니엘, 그게 무슨 말이더냐. 아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니, 이동 마법을 잘못해서 그리된 게 아니고?”

마법사 집안답게 아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마법 실수로 여긴 노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별것도 아닌 일로 오랜만에 아들과 딸을 만나는 데 방해한 손자 놈의 엉덩이에 불을 붙여 줄 생각이었다.

“듣기로는 대신관이 예언한 파멸의 아이가 아닌가 싶다는 말이 오가는 중입니다.”

“대신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가 아직도 존재하나 보군. 한데 그놈은 아이를 어떻게 했다더냐.”

“그놈은…… 크흠, 판테르 공작님께서 그 아이를 딸로 호적에 올렸다고 합니다.”

“그놈이 밖에서 아이를 낳아서 데려온 게 아니더냐! 그렇지 않고서야 남의 아이를 호적에 올릴 리가…….”

“아퀼라 공작부인께서도 동의했다고 합니다.”

“뭐? 아퀼라 공작부인은…… 판테르 공작과 3년간 교류가 없다고 들었는데.”

부녀간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제국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어미도 모르는 아이를 제 동생으로 호적에 올린 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또 다른 보고서가 여기 있는데 그 아이는 세 살쯤 되는 여자아이이며, 은발에 금안을 지녔다고 합니다.”

은발에 금안이라는 말에 노인은 움찔했다. 그의 집안 직계 자손들은 전부 은발에 금안을 타고났다.

“그리고 또 뭐 다른 보고서는 없더냐.”

“있습니다. 그 아이 이름을 세라피나라고 지었다고 합니…….”

쿠웅-

이름을 듣는 순간 노인은 옆에 놓인 지팡이를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다니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놈은 역시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어. 후우, 오죽했으면 유진도 이곳에 오질 않고 있더냐.”

유일한 외손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외갓집에 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면회 형식으로 외손자가 다니는 아카데미로 가서 얼굴만 보고 오곤 해다.

“그건 할아버지께서 판테르 공작님을 싫어하셔서…… 아! 다른 보고서가 있는데…….”

할아버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자 화제를 돌려보려던 다니엘은 아직 제가 보지 못한 첨부된 종이를 보더니 그대로 굳었다. 그러고는 기름칠이 되지 않은 경첩처럼 삐걱거리는 목을 움직여 벽에 걸린 액자를 봤다.

“뭔데 그리 사색이 된 것이더냐.”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그 아이 그림이온데…….”

다니엘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보다는 노인의 손이 빨랐다.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낚아챈 노인의 두 눈이 미세하게 바르르 떨렸다. 은발에 금안을 지닌 아이 그림을 본 노인은 입술을 다물었다.

“대체 이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콩떡이다.”

“네?”

“그냥 봐도 콩가루 털린 말랑 콩떡이군.”

말랑 콩떡은 다니엘의 나이 어린 고모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저보다 어린 고모를 돌보는 일에 한 손을 거들었던 다니엘은 그림 속 아이의 모습과 제 어린 고모가 똑같자 할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당장 셀레스 백작을 부르거라. 그곳으로 가 봐야 할 것 같으니 간단하게 짐을 꾸려야겠어. 소피아에겐 비밀로 하려무나.”

“네? 하지만 판테르 공작님이 반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내가 언제 그놈 눈치 보면서 살았더냐. 내가 내 딸이 살았던 곳에 간다는데, 내 외손자의 집에 간다는데 누가 나를 막아!”

막무가내인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액자를 한 번 더 보고는 그 길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했다. 대신관이 파멸의 아이라고 예언을 했다면 황궁과 신전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얼른 환복하고 있을 때 그의 방으로 셀레스 백작 및 몇몇 보좌관이 들어왔다.

“다니엘 님께 들었습니다. 판테르 공작저에 가신다고요.”

“그래. 하늘에서 아이가 떨어졌다는데 우리 어린 세라피나와 똑 닮았어.”

“그러하시군요. 그렇다면 저희도 거들겠습니다. 티그리스 공작님!”

다들 흉흉하게 마나를 끌어 올리는 모습에 북부의 지배자 티그리스 공작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확인만 하러 가는 걸세. 그놈이 머리에 칼 맞지 않은 이상은 남의 아이를 호적에 올릴 리가 없으니 말일세.”

지금 싸우러 가도 절대 뒤처지지 않은 보좌관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본 그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지, 우리 말랑 콩떡이 보러.”

* * *

드라코 공작과 신관 알렉스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판테르 공작이, 아니, 아빠가 언니와 형부를 불렀는지 내가 도착했을 때 같이 있었다. 

“털리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군요. 감히 우리 처제를 끌고 가려고 하다니.”

황실과 신전을 극도로 혐오하는 듯한 형부의 말이 아빠의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마도 아버지가 미리 준비할 것 같아서 작당하고서 당일에 온다고 연락한 듯합니다.”

언니의 말에 아빠가 나를 꼭 안았다. 나를 데리러 그놈들이 온다고 절대 도망치게 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앞서서 조질 거라고 말한 아빠는 나를 제법 따스한 눈빛으로 봤다. 

“도착합니다.”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워프 게이트가 번쩍하자마자 다수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일로 찾아와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오. 판테르 공작.”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면 미안할 짓을 하지 않는 게 예의 아닌가. 드라코 공작.”

아빠와 산적 같은 드라코 공작과의 신경전이 펼쳐졌다.

“이곳에 아퀼라 공작님도 계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알렉스 신관도 오는데 내가 못 올 이유는 없지 않은가. 여긴 내 가족의 집인데.”

알렉스 신관과 형부와의 신경전도 만만치 않았다. 

“그 아이가 파멸의 아이인가.”

“아니, 내 딸이네만.”

“파멸의 아이를 딸로 입양하다니 자네는 제정신인가!”

“내가 제정신이었으면 지금 황제가 황궁에 편히 앉아서 남이 해 준 밥을 처먹고 있지는 않을 것 같네만.”

우와, 아빠 세다. 

아빠의 일침에 드라코 공작은 검은 눈동자를 찌푸리며 나를 봤다. 그의 시선에 나는 예의바르게 말했다.

“안냐세여. 라삐라고 해여. 세 짤이에요.”

내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드라코 공작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 내가 인사를 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조기 아조씨눈 에으가 업나바여, 낵아 인사하눈데 안 바다조써여, 글구…… 손님인뎅 왜 소니 가벼워여?”

“풉! 라피, 잘했어. 그래, 애들 눈에도 그리 보일 정도면 정말 예의 없는 아저씨가 분명하단다.”

인사했는데 받아주지 않아 예의도 없는데 남의 집에 올 때 빈손으로 온 드라코 공작을 찍어 말했다. 그러자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간 드라코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우왕, 조기 아조씨 얼구리 가으리 되어나바여. 이뿌게 물드러써여.”

“어린아이 말 하나에 그리 감정을 드러낼 줄이야. 곱게 가을 단풍이 들었군그래. 이 와중에도 우리 딸이 한 인사를 받아주지 않다니 어디 가서 대인배라고 하지 말게나.”

“허튼소리, 됐고 그 아이 내놓게. 어차피 자네 친자도 아니지 않은가.”

“내 딸이라고 분명히 말했네.”

“내 처제입니다만.”

“내 동생입니다.”

세 사람이 드라코 공작을 씹어 먹을 듯이 보며 한 마디씩 했다. 그러자 드라코 공작은 이를 꽉 깨물었다.

“대신관님의 예언에 따라…….”

“예언 좋아하는군. 앞으로 성전이 있을 시엔 귀족들 동원하지 말고 거기 뒤에 있는 성기사나 데리고 가게나. 성전이면 당연히 신전에서 솔선수범해야지.”

알렉스 신관의 말에 형부가 팔짱 낀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알렉스 신관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전대 아퀼라 가주님께서 전사하신 것으로 악감정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번엔 그리하시면 안 됩니다. 저 아이는 파멸의 아이가 분명합니다.”

“증거는?”

“이단 심판을 하면 나올 겁니다.”

“그 이단 심판을 받으면 자네도 마족으로 변신할 수 있다네. 그러니 그만 닥치게.”

됐으니까 이만 가라는 듯 형부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성기사까지 끌고 온 이들은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여긴 내 영역이니 이만 썩 꺼지게나. 빈손으로 온 주제에 참 말이 많군. 폐하가 자넬 보낼 때 빈손으로 보낸 거 보니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군.”

“판테르 공작, 난 장난하러 여기 온 게 아니네만.”

“그럼 싸울 텐데? 참고로 말일세. 난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치사한 짓을 해서라도 여기에서 자네 목을 따 버릴 수도 있다네.”

아빠가 위협적으로 말하자 드라코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같이 따라온 기사들도 검을 붙잡은 상태였다. 하지만 감히 꺼내지 못했다. 판테르 공작가의 기사들이 둘러싸고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긴장감이 흐를 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상당히 우중충한 차림을 한 남자는 격한 숨을 몰아쉬더니 아빠에게 말했다.

“고,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다른 분께서 오시겠다고 연락 왔습니다.”

“다른 분 누구?”

“북부…….”

그 한마디에 아빠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네들 죽기 싫으면 비키게. 우리 집에 또 손님이 오실 모양이니.”

워프 게이트에 다른 사람이 도착할 예정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드라코 공작들이 마지못해 자리를 비웠다. 그와 동시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는 사람들 중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본 아빠가 묵례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이들도 전원 묵례를 했다. 드라코 공작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다들 여기 와 있었군. 한데 여기에 자네들은 왜 왔는가.”

정체 모를 사람의 물음에 드라코 공작이 두 손을 꽉 주먹 쥐며 말했다.

“파멸의 아이를 데려가기 위해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러니 티그리스 공작님도 폐하의 명을 받드는 데 도와주십시오.”

엥? 저분도 공작이었어?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티그리스 공작을 봤다. 은발에 호박색 눈동자를 한 남자의 옆에 있던 사람이 뭐라고 소곤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귓속말을 들은 티그리스 공작이 드라코 공작에게 말했다. 

“저 아이가 파멸의 아이라고?”

“네, 대신관님의 예언에 의하면 파멸의 아이가 분명합니다. 게다가 사람의 태를 타고 나오지도 않았는데 판테르 공작이 딸로 입양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티그리스 공작이 제일 높은지 드라코 공작도 한 수 접어 주는 듯했다. 그의 말을 들은 티그리스 공작은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내 새끼일세.”

“네?”

티그리스 공작의 말에 드라코 공작이 놀란 듯 되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오로지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네 할아비다.”

왓? 아임 유어 그랜 빠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