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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9)화 (19/164)

19화. 

난 단지 오렌지가 좋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한데 그 한 마디에 나는 이 집안의 장남인 유진의 의견을 쏙 빼고 판테르 공작가의 딸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주변인들이 나를 볼 때마다 고개를 사정없이 푹푹 숙였다.

황녀였을 때도 황제에게 대우받지 못하자 고용인들도 전부 나를 무시했다. 그 시절에도 볼 수 없었던 일이 앞에 일어났다. 

내가 방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고용인들이 죄다 양옆으로 갈라지듯 섰다. 

절대 적응하지 못할 모습에 나는 어색함을 지운 채 방긋방긋 웃어 줬다. 말은 자주 해야 는다지만 일일이 인사할 정도로 그들의 수가 한정적이지 않았다.

“언냐랑 혐부는 온제 만나 쑤 이써여?”

제니의 손을 잡고 걸으며 물었다. 얼마 전에 이틀 정도 이곳에서 머물다가 급한 일이 있다며 훌쩍 떠난 에리카와 제롬이었다. 분명 다시 올 거라고 말했건만 그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으음, 아마 금방 다시 오실 수 있을 거예요. 이런 쫀득쫀득한 찹쌀떡 볼을 만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거든요.”

전날 볼을 만지작거린 제롬에게서 나를 받아 든 에리카가 내 볼을 조물조물 만졌다. 유일하게 안 만졌을 때가 판테르 공작이 내민 서류에 내 지장을 찍을 때뿐이었다.

마치 신체포기각서에 사인하는 느낌이랄까.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집안은 전부 전 부인에게 미친 것 같았다. 단순히 닮기만 했는데도 다들 나를 우쭈쭈쭈 못 해 줘서 안달이었다. 심지어는 에리카마저도 나를 제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에 언니가 우리 라피가 쓸 만한 선물을 많이 가져올게.’

‘전 구론고 피료 업써여. 언냐만 이쓰면 대여.’

언제나 그러하듯 눈치는 기본이고 아부는 선택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에리카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 볼에 제 볼을 대고 문질러댔다.

‘어휴,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누가 보면 어린아이 몸에 성인이 쏙 들어가 있는 줄 알겠어.’

순간 멈칫한 나는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몸에 성인이 들어간 게 아니라 원래 성인인데 몸이 어려진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입적이 되었든 안 되었든 쫓겨날 것 같았다.

단순히 웃은 것뿐이었지만 에리카는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에리카의 볼에 계속 비벼졌더니 얼굴에 열감이 느껴졌다.

‘역시 우리 라피 볼이 최고야.’

‘그렇죠? 역시 우리 인절미 처제가 최고라니까요. 그런 김에 저도 볼을…….’

‘안 돼요! 형부가 처제 몸에 자꾸 손대면! 대신 제가 만지고 감상평 정도는 말해 줄게요.’

손을 내민 제롬은 에리카의 말에 표정이 변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놓친 시무룩한 강아지 같은 표정이랄까.

‘너무해요. 나도 우리 인절미 볼때기 만져 보고 싶은데…… 콜린이랑은 감촉이 다르다고요.’

‘됐고, 라피는 내게 주고 이만들 가 봐. 언제까지 여기에서 라피 볼만 만지작거리느라고 시간을 보낼 것이더냐.’

보다 못한 판테르 공작이 에리카의 품에서 나를 쏙 빼냈다. 그러고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얼른 가라는 듯 손짓했다.

‘어린아이는 오랫동안 못 보면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다고 하던데…… 처제가 잊지 못할 정도로 자주 올게. 알겠지?’

‘됐고 썩 꺼지게나. 자네는 집안에 할 일이 그리도 없나. 쯧쯧쯧.’

‘제겐 매우 유능한 보좌관이 있답니다. 집안 가주의 일을 대신 할 수도 있을 정도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롬의 말에 판테르 공작은 뒤에 서 있는 제 보좌관들을 봤다. 순간 찔끔한 이들은 헛기침하며 먼 산을 봤다. 

‘자네, 뭐 하나. 얼른 워프 게이트를 작동시켜야지.’

판테르 공작이 근처에 있는 마법사에게 더는 시간을 주지 말고 얼른 할 일을 하라고 압박을 넣었다. 그러자 마법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나를 움직였다.

서서히 워프 게이트에서 빛이 감돌자 나는 에리카와 제롬에게 손을 흔들었다.

‘언냐, 혐부! 뺘뺘!’

‘우리 라피, 잘 먹고 쑥쑥 크고 있으렴. 언니가 빨리 만나러 올게.’

‘처제, 내가 없다고 울거나 하지 말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아무리 바빠도 우리 인절미 처제의 연락은 다 받아 줄 테니까.’

가는 길에서도 주접을 떠는 제롬을 밀어낸 에리카는 내 볼에 입맞춤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언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빠가 혼내면 내게 말하렴. 당장 달려와서 우리 집으로 데려갈 테니까.’

말뿐이라 할지라도 에리카의 말에 나는 괜히 어깨가 위로 올라갔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든든한 아군이 생긴 나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헤벌쭉 웃었다. 

“우리 아가씨,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요. 표정이 조금 음흉해 보인다고 말하면 안 되려나요.”

너무 대놓고 미소를 지은 건가 싶은 나는 제니를 보며 방긋 웃었다. 

방싯방싯-

숨바꼭질할 때 꽃 덤불 속에 숨는답시고 엉덩이만 내민 채 씰룩씰룩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제니는 갑자기 눈에 보이지도 않은 신을 찾았다.

“오, 신이시여. 지금 제 눈앞에 있는 분이 진정 제가 모시고 있는 아가씨가 맞는지요. 아기 신님이 강림하신 것 같아요.”

제니와 주변인이 심장을 부여잡고 벽에 기댔다. 그들의 심장에 타격을 입을 정도로 순수함 그 자체인 내 미소는 오늘도 빛을 발했다. 

“모해여? 나 얼룬 꼿 보고시픈데.”

“앗! 죄송해요. 우리 얼른 꽃 보러 가요.”

벽에서 손을 떼 다시 내 손을 잡은 제니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우리 아가씨, 안녕하세요. 오늘도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네요.”

“세상에나, 빛이 나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겠어요.”

내가 이 집안에 정식으로 입적이 되자마자 그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전엔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기만 했는데 지금은 근처에 지나가면 한 마디씩 하곤 했다.

마치 주인에게 잘 보이려는 고용인의 입장이라서 그러나.

“안농, 제니랑 가치 꼿 보러 가요.”

“그렇군요. 부인께서도 꽃을 정말 좋아하셔서 수련하는 틈틈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곤 하셨는데…….”

“이것 봐, 지금 아가씨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여튼 주책이야. 아가씨! 이 사람 말은 그냥 흘려들으시고 얼른 가 보세요. 예쁜 꽃이 활짝 피었을 겁니다. 부인께서 좋아하는 꽃들이…… 으윽!”

발을 밟힌 이는 아픔을 삭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우리 얼른 가요. 이러다가 건물 안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요.”

손을 뻗어 나를 안아 올린 제니는 그 길로 정원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흐드러지게 핀 꽃을 본 나는 보란 듯이 제니 앞에서 굴러다녔다.

온몸에 흙이 묻고 옷이 풀물이 들었지만, 제니는 그저 내게 잘했다며 뒤에서 손뼉만 칠 뿐이었다.

한동안 보란 듯이 구르고 구른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늘에 앉은 제니가 꾸벅꾸벅 졸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곧장 두 팔을 펼쳐 정신 집중했다. 

“에효효효, 안 모여써.”

마나가 아직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마나 길이 좀 트였다고 해야 하나. 시원한 기운이 몸을 한 번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원에서 제니를 뒤에 두고 두 팔 벌려 노는 척하고 있을 때 오스카가 뛰어와 말했다.

“지금 황실과 신전 측에서 사람이 온다고 합니다.”

* * *

고즈넉하다 못해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한 공간에는 이내 파문이 일어났다.

“대신관님, 급히 보고 드릴 게 있어 왔나이다.”

대신관이 기도하는 공간은 상당히 사치스럽다고 해야 하나. 엄청 화려한 그림과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멀 정도로 대신관의 기도 방은 신전의 부를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동부에서 파멸의 아이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예배를 보던 대신관은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얼마 전에 동부에서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합니다.”

신관의 말을 들은 대신관은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스 신관을 보내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왔다. 대신관이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 적갈색 머리카락을 기른 젊은 신관이 들어왔다.

“알렉스 신관, 파멸의 아이가 나타났다는 말이 떠도는군그래.”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텐데요.”

진짜로 그럴 일은 없어야 했다. 애초에 그들의 예언은 기부금을 낼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황실과 짜고 만들어낸 가짜였다. 

“판테르 공작가에서 그 아이의 신병을 확보한 모양일세.”

“흐음, 그렇다면 그 아이를 데려오는 게 어떻습니까. 대신관님의 예언에 의해 아이를 달라고 하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들어 줘야 할 테니까요.”

예전엔 대신관의 말이라고 하면 모두 따라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는 달랐다.

“동부는 3년 전부터 이미 돌아섰네. 웬만해서는 안 따를걸세.”

3년 전 판테르 공작부인이 죽은 후부터 그들은 절대로 신전을 따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동부 쪽 민심마저 등을 돌린 것도 모자라 신전이 전부 철수해야만 했다. 

“다른 공작가에 도움을 요구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힘들걸세. 남부는 판테르 공작의 여식이 있고, 아퀼라 공작도 선대가 죽는 바람에 우리에게 유감이 많을 거네. 그리고 북부 또한 거부할걸세.”

다섯 공작 중 셋이 요지부동이면 다른 공작을 설득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하면 황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어차피 그분도 진실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파멸의 아이가 동부에 나타나서 민심을 어지럽게 한다면 그곳 주민이 신전 쪽으로 마음을 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황제 폐하를 만나 뵈어야겠군.”

급히 마차를 탄 대신관은 곧장 황궁으로 가서 황제와 독대를 신청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자신보다 젊은 황제가 거드름 피우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본 대신관은 맞은편에 앉아 아까 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황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실제로 파멸의 아이는 없지 않소.”

어차피 대신관의 예언은 가짜였다. 그렇기에 그 가짜임을 숨기기 위해 황제는 신성력을 타고난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대신관의 예언을 믿는다는 것을 직접 보여 주기 위해서. 

“하지만 그 아이가 파멸의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 예언이 가짜라는 것을 다른 이들이 알게 됩니다.”

“하면 그 아이를 내놓으라고 해야 하는가.”

“네, 그 아이를 데려와서 파멸의 아이임을 공표하고 죽여야만 합니다.”

“한데 말일세. 판테르 공작은 우리한테 유감이 많은 사람일세. 내가 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걸세.”

아직도 3년 전의 서슬이 퍼런 판테르 공작의 눈빛과 우윳빛 검날이 잊히지 않은 황제였다. 

“폐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둘 다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아이 하나 잡아들여 죽여서 자신들이 영화를 오랫동안 누릴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그렇다면 미리 판테르 공작에게 연락하고…….”

“안 됩니다. 그곳에 가는 당일에 연락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미리 준비하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요.”

대신관의 말을 들은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에 빠졌다. 이 기회에 판테르 공작을 몰락시켜야만 했다. 그 아이가 동부에 떨어졌다는 것을 핑계 삼아서.

“출발 일시는 모레! 당장 준비하게나.”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대신관도 동부로 보낼 신관으로 알렉스를 뽑았다. 그리고 황제는 골수 황제파인 드라코 공작에게 동부로 갈 것을 명했다. 

“……폐하, 임무 완수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오오, 드라코 공작! 자네만큼이나 다른 사람도 이리 믿음직스러우면 얼마나 좋겠는가. 부디 무탈하게 다녀오시게.”

잠시 머뭇거린 드라코 공작이 고개를 숙여 대답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파멸의 아이 하나만 데려오라고 명한 황제는 대신관과 함께 잔잔한 미소를 지을 때 황실 마법사가 왔다. 

“판테르 공작가의 마법사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래, 무어라고 하던가.”

“강냉이 털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사양하지 않을 테니 드루와,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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