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날카롭게 찌르는 판테르 공작의 말에 에리카는 어깨를 으쓱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푸른 눈동자에 에리카는 대놓고 말했다.
“맞아요.”
순순히 실토했다. 남의 집안을 염탐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어쨌든 피로 이어진 가족이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남의 집안은 아니었다.
“그럼 굳이 돌려 말하지 않으마. 너도 알고 왔을 거니까. 우리 집안에 세라피나를 닮은 아이가 뚝 떨어졌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도 같은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요.”
“그래.”
이렇게 얼굴 보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도 오랜만이건만 두 사람 사이에 차가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보좌관들은 가시 바닥에 선 것처럼 불편해서 얼른 이곳을 뜨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 어떻게 새어머니 이름을 출신 성분도 알지 못하는 아이에게 줄 수 있습니까. 당장 철회하세요.”
“너도 직접 보면 그런 말 못 할 것이다. 참고로 네 아들보다 어린 아이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요!”
“아이 앞에서 지금처럼 소리 지르지 마라. 안 그래도 아이가 가끔 경기를 일으키니까.”
“아니 지금 친자식 앞에서 핏줄도 아닌 아이를 걱정하는 건가요. 아버지도 참 많이 변하셨네요. 애들은 절대 봐주지도 않아 놓고는.”
어렸을 때부터 에리카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란 인간은 일만 할 뿐이었다. 그러자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가 미쳐 버렸고,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말하면 죽여 버릴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유모조차도 자신이 맞는 모습을 보고도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쫓겨나면 당장 입에 풀칠할 수 없으니까. 보고도 못 본 척했던 유모는 어머니가 이혼당하고 나갈 때 바로 내쫓겼다.
그럴 정도로 옛일로 악에 받친 에리카는 제 앞에서 아버지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두둔하자 더 화가 뻗쳤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했던 것처럼 그 아이에게 똑같이 해 주길 바라는 것이더냐.”
“그건…….”
판테르 공작의 말에 에리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아이는 무슨 죄가 있어서 자신과 같은 취급을 해 달라고 하겠는가. 나직하게 한숨만 푹푹 내쉴 때 제니가 사색이 되어 뛰어나왔다.
“가, 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세라피나 아가씨가 안 보입니다.”
변비로 고생한 제니는 갑자기 신호가 오자 딸랑이를 들고 놀고 있는 라피를 보고 안심한 후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신호만 왔을 뿐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끙끙대며 온몸의 진기까지 다 끌어모아서 겨우 볼일을 보고 나왔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라피가 보이지 않았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나 싶어 방과 주변을 이 잡듯 뒤졌지만 없었다.
아직 이 저택의 지리도 모르는 아이였다. 판테르 공작에게 귀한 이름까지 받은 아이가 보이지 않자 비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급히 주변 사람들에게 찾아 달라고 말하며 밖으로 뛰어나온 제니는 판테르 공작에게 이실직고했다.
“뭐라? 라피가 안 보인다고?”
“네, 볼일 보고 나왔더니 아가씨께서…… 흑,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을 것 같군. 저기 오고 있으니.”
판테르 공작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본 제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원으로 간다던 제롬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두툼한 찹쌀떡 한 덩어리를 든 채.
* * *
나뭇가지에 걸린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는 남자를 보며 눈을 흘겼다. 그러자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피식 웃었다.
“뜨거운 열에 인절미 떡이 축 늘어진 것 같군.”
“나, 똑아니다모. 라삐다모.”
하필 이 세계에 찹쌀이 존재할 게 무어란 말인가. 늘어진 떡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걸린 옷이 떨어지지 않았다.
“뿌우…….”
나를 보고만 있고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은 남자를 보며 볼에 공기를 잔뜩 집어넣었다. 볼 빵빵한 상태로 나 화났으니 얼른 도와 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엇! 인절미가 구운 것처럼 부풀어 오르니 정말 귀엽네.”
내려 줄 생각은커녕 부푼 내 볼을 콕콕 찌르며 말하는 남자를 째려봤다. 한동안 잡고 늘리고 누르던 남자는 내 볼이 살짝 따끔할 때쯤에 멈췄다.
“이런, 너무 가지고 놀았나. 볼이 빨갛게 변했어. 미안해.”
그때야 볼에서 손을 뗀 남자가 사과하며 나를 내려 줬다. 볼을 대 준 대가로 겨우 바닥에 닿을 수 있었던 나는 바로 남자에게 붙잡혔다.
“내려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지.”
내 볼을 주물럭댄 주제에 내려 준 인사를 하라고 하자 아니꼬웠다. 하지만 공손하게 두 손을 배꼽에 대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고마뜹니다.”
“어휴, 인사도 잘하는 것 봐. 우리 인절미, 아니지.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라삐에요. 라삐!”
“라피? 내 이름은 제롬이란다.”
“쩨로?”
“아니 제롬!”
여전히 발음이 부정확한 나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런 나를 번쩍 안아 올린 제롬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런 인절미 같은 딸 하나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어휴, 우리 라피 너무 귀엽구나.”
언제부터 내가 제롬의 우리 라피가 된 것인가. 못마땅한 듯 쳐다봤지만, 제롬은 내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누구의 아이지? 아빠가 어디 계시니?”
“업쪄여.”
“아, 아빠가 안 계시구나. 그럼 엄마는?”
“업쪄여.”
“미안해. 괜한 걸 물었구나. 내가 라피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실례했는걸.”
엄마 아빠가 없다는 말에 제롬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줬다. 따스한 기운이 듬뿍 느껴지는 쓰다듬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쓰다듬어 주는 걸 좋아하니?”
“니에, 조아여. 쑤다둠 좋아, 따뜨테.”
낯선 타인이 분명했지만, 제롬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편안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제롬의 가슴에 얼굴을 찰싹 갖다 붙였다. 하지만 판테르 공작만큼의 가슴은 아니었다. 약간 실망하며 얼굴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런, 아비 품이 그리도 그리운 거야?”
“아녀.”
“아닌데, 맞는 것 같은데. 부모님도 안 계시니까…… 으음, 내가 사는 집으로 올래? 내 딸 하자.”
“시러여.”
제롬의 말에 거절하면서 얼굴까지 같이 흔들었다. 덕분에 그의 가슴에 찰싹 붙여서 비비적대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나한테도 라피만 한 아들이 있단다. 아니다. 라피보다 크려나. 어쨌든 내 아들이랑 오빠 동생 하면 딱 좋을 것 같아. 딸 낳으려다가 실패했거든.”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는 제롬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갠차나여. 담에 나으믄데여.”
“한데 부인이 낳기 싫다고 해서, 하하. 내가 너한테 별말을 다 하는구나. 오늘 처음 만났는데. 한데 이상하게 네가 낯설지 않아. 마치 한 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고개를 젓지는 않았다. 그저 얌전하게 제롬의 가슴에 찰싹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내 또래의 아들이 있다더니 아이를 안는 손이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냥 내 딸 하자. 응? 내가 부인을 설득할게.”
“시러여. 내가 왜 아찌 따리 대눈데여!”
아무리 낯설지는 않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의 자식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벤스의 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그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리는 게 더 나았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나 상처받는데.”
“글애두 시른거슨 시러여.”
애초부터 미련을 가지지 못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나를 본 제롬은 실망하기는커녕 더 좋다는 듯 웃기만 했다.
“한데 여긴 판테르 공작저인데 엄마, 아빠도 없는 네가 여긴 어떻게 온 거니. 혹시 개구멍? 내 딸 되어 주면 내가 모든 공격을 다 막아 줄 수 있는데.”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제롬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내게 자신의 딸이 되면 어떻게 해 주겠다느니 하며 공약을 내걸기 시작했다.
후비적-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을 하는 제롬의 말을 들으며 조그만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냈다. 그 상태로 앞으로 걸어갔다. 정원을 빠져나온 제롬은 건물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데 판테르 공작저의 고용인들이 제롬을 보고는 한쪽으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현상을 보고 있을 때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는 곳에 오게 되자 비로소 안심이 된 나는 방긋 웃었다. 한데 나를 보는 판테르 공작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 시선을 오롯이 맞이한 제롬이 나를 안은 채 후다닥 달려와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버님, 오랜만입니다.”
“아버니임? 오랜마안?”
비아냥대는 판테르 공작의 말에 제롬이 이 집안의 사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님, 그간 찾아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찾아오지 못해서 내 집을 염탐했군. 그렇다면 안부 묻지 않아도 될 건데, 굳이 마음에 없는 말 하지 않아도 되네만.”
“어휴, 이 정도 일로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이것 봐, 지금 이거 칭찬하는 거 아닌데.
판테르 공작이 싸늘한 시선으로 나직한 목소리로 제롬에게 말했다. 그러자 제롬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마치 오장을 전부 빼 놓고 온 사람처럼. 하하 웃는 제롬을 노려보던 판테르 공작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오려무나. 그놈 가슴이 절벽이라서 네가 안기기엔 적합하지 않을 것이야.”
“아버님, 저 이래 보여도 기사 출신입니다. 지금도 제가 얼마나 날고 기는데요.”
“날고 기어 봤자 막 뒷발 나온 올챙이밖에 더 하겠는가. 라피, 이리 오너라. 네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으니.”
둘의 대화를 듣기에 열중하던 중 판테르 공작이 제롬의 품에서 강제로 나를 떼어놨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나를 안아 올렸다. 안정감이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살기 위해 그의 가슴팍에 철퍼덕 갖다 붙으며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어? 제니 요기 있쏘여? 미아내여. 바께 나가보고 시퍼서…….”
“아, 아니에요. 우리 아가씨가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눈물을 훔치는 제니를 본 나는 우선 그녀에게 사과했다. 내가 사라져서 애간장을 끓이며 찾아다녔을 그녀에게 가방 속에 있는 사탕이라도 하나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 이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그 아인가요.”
날카로운 목소리 톤에 그때야 나는 판테르 공작의 앞에 있는 사람을 봤다. 검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판테르 공작의 여성형을 본 나는 두 눈을 끔뻑였다.
“그래, 맞다. 이 아이가 그 아이다.”
“아무리 새어머니랑 닮았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그분의 이름을 주실 수 있는 겁니까.”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시선에 움찔했다. 그러자 판테르 공작이 내 등을 다독여 줬다.
“그거야 이 아이가 어린 세라피나와 나만이 아는 말을 했었으니까.”
내가 언제?
영문을 알 수 없는 판테르 공작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어린 시절의 새어머니가 하셨던 말을 했다고요? 말도 안 돼요.”
“내가 들었어. 그리고 그때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났으면 이 아이만 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오갔지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 있는 판테르 공작의 판박이가 딸이라는 사실이었다. 시집갔다지만 밉보이면 안 될 존재이기에 나는 그녀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안냐세여. 라삐라고 해여. 만나소 방가버여.”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인사를 받은 에리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에리카, 라피가 인사하는데 그렇게 노려만 보고 계실 겁니까.”
판테르 공작에게 웃으며 말을 하던 제롬이 에리카에게 살짝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그러자 에리카가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집 장녀 에리카야.”
짤막한 말이었지만 나는 해맑은 미소를 뿜어내며 말했다.
“헤에, 이 세상에소 젤 이뿐 아가쒸다.”
예쁜 아가씨라는 말에 에리카는 멈칫했다. 그런 에리카를 보며 나는 판테르 공작에게 얼른 내려 달라고 말했다. 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사탕 하나를 꺼냈다. 에리카에게 아장아장 걸어간 나는 딸기 맛 사탕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이뿐 아가쒸, 사탕 빨묜서 나랑 이야기할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