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4)화 (14/164)

14화. 

살랑살랑 봄바람이 나부끼는 곳에서 보고서를 읽은 이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아이가 판테르 영지로 뚝 떨어졌다고? 그것도 하늘에서?”

보고서를 읽은 남자는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생김새가 은발에 금안? 이건 어머님 외형인데.”

하얀 종이엔 생각하지도 못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본 남자는 책상을 손으로 두들겼다. 

“공작님, 혹시 그 아이가 신전에서 말하는 파멸의 아이가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옆에 있던 보좌관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걸 믿는 건가. 난 그놈의 신전에서 하는 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일세. 이제껏 그놈들이 하는 짓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네.”

신전하고는 거의 척을 지고 사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심을 모으기 위해서 신전에서 하는 거짓말엔 이젠 질렸기 때문이다. 성전이랍시고 옆 왕국이 이단이라면서 그곳을 쓸어 버리라는 명령이 황실에서 내려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황실과 신전이 서로 짜고친 것이다. 공작가의 사병들을 줄이는 목적과 영토 확장, 그리고 덤으로 신자를 모으기 위해서 다른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이 집안의 선대 가주가 목숨을 잃었다. 

비릿하게 웃은 남자는 종이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봤다. 차라리 이 아이가 파멸의 아이라면 더 좋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신전과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줬으면 했다. 

그 보고서를 받은 후 며칠이 지났고 다른 보고서가 도착했다. 

“아이가 기억상실? 나이는 세 살, 이름을 세라피나라고 지어 주셨…… 아버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판테르 공작은 제 핏줄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 한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이에게 사랑했지만 먼저 하늘로 보내야만 했던 부인의 이름을 줬다는 게 놀라웠다. 

같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데 말이다. 혹시 그 아이를 판테르 공작가의 호적에 입적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판테르 공작님께서 부인의 이름을 아이에게 줄 정도면 엄청난 큰일이 아닙니까.”

“당연히 큰일이지. 지금 동부에서는 세라피나라는 이름을 완전히 금지했으니까.”

판테르 공작부인이 죽자마자 명을 내려 세라피나라는 이름을 짓지도 못하게 했다. 혹 이미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강제로 개명을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정도로 그 이름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싫어한 판테르 공작이었다.

“혹시 판테르 공작님이 밖에서 낳아 온 딸이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버님의 성격상 어머님을 그리워만 하고 사실 게 분명하네.”

“하지만 세라피나라는 이름을 줄 정도로 아이를 귀애할 정도면…… 혹시 공작부인과 닮은 다른 여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건 딱히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군.”

판테르 공작은 아직 젊었다. 게다가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라 지금도 맘만 먹으면 달려들 여자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몰래 다른 여인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혼자라서 다른 여인을 만나 아이를 낳았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었다. 

보고서를 뚫어지게 보고 있던 이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되려나. 

“에리카 님께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않나. 에리카의 친정 일이니까. 비록 그녀가 이곳으로 시집왔다고는 하더라도 판테르 공작가의 핏줄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비록 판테르 공작부인이 돌아가신 후로는 그곳과 아예 인연을 끊다시피 했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싫다고까지 말하며 가지 않았다. 

판테르 공작과 엮어 주려던 따스한 징검다리가 사라져서 3년간 동부엔 절대 가지 않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게나.”

보좌관이 눈치를 보며 나가자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판테르 공작부인이 돌아가셨을 때 에리카는 억지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고는 판테르 공작을 향해 울 자격도 없다고 독설을 퍼부은 후 장례식이 끝나고 곧장 돌아왔다. 

이곳에 와서야 제 품에 안긴 에리카는 눈물을 펑펑 흘렸다. 판테르 공작부인이 제 친모도 아니건만 에리카는 그녀의 죽음에 미안하다는 말만 연거푸 하며 통곡했다. 

“하긴, 그런 것으로 치면 우리도 어머님께 죄인이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다. 그때 아버지만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보고서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에리카 님이 오셨습니다.”

공작부인으로 불리는 것보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한 에리카였다. 

“안으로.”

짤막한 말에 문이 열리며 위압감이 느껴지면서도 아름다운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판테르 공작의 판박이라고 할 수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에리카의 품엔 작은 아이가 안겨 있었다.

“제롬, 저 다녀왔어요.”

“저 대신 수고 많았습니다. 그나저나 콜린은 꿈나라로군요.”

“네, 꼭 아버지를 보고 잔다고 하더니 잠들었지 뭐예요.”

서류 더미에 깔려 죽을 것 같은 제롬을 대신해 에리카가 아들과 함께 영지를 전부 돌고 왔다. 아이를 데려가서 보통보다 시일이 좀 더 걸렸지만, 제롬은 부인과 아이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몇 주 못 본 사이에 우리 아들이 많이 큰 것 같군요.”

어미 품에 안겨서 잠든 콜린의 머리카락을 쓸어 만져 준 제롬이 누군가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여인이 곧장 잠든 콜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단둘이 남게 되자 에리카는 제롬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간 보고 싶었어요. 제롬은 제가 안 보고 싶었나요?”

“당연히 보고 싶었지요.”

2주간 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가볍게 안은 것으로 해후를 풀었다. 짤막하게 안부를 묻던 중 에리카의 시선에 보고서가 보였다. 

“제롬, 뭘 보고 계셨던 건가요?”

“아, 그게…….”

장인어른의 영지를 살짝 엿봤다고 하면 되려나 싶어 에리카에게 사실 그대로를 읊어 줬다. 제롬의 말을 들은 에리카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마치 판테르 공작의 눈매처럼 변한 에리카는 보고서를 읽어보더니 입술 사이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터졌다.

“그러니까 웬 아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는 건가요?”

“네, 우선은 그렇게 출현했다고 합니다.”

“한데 과거를 기억하지도 못한 아이한테 세라피나라는 이름을 줬다고요?”

“네, 아무래도 아이 외형이 어머님과 닮아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러니 화는 내지 말아 주세요. 아버님께서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비난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롬의 말에 에리카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친정하고 연을 끊고 살다시피 했기에 판테르 공작이 누군가에게 곁을 주든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속 보고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에리카는 제롬을 보며 말했다. 

“저나 아버지나 서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지만 이건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금이라도 판테르 공작저에 가실 생각입니까.”

“네, 내일이라도 갈 겁니다. 하지만 제롬은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인과 사위는 참 불편한 사이였다. 거기다가 판테르 공작은 제롬을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일전에 열일곱 살짜리 어린 딸을 채갔다고 사늘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본인은 열여섯 살에 결혼해 놓고 그런다고 말하지 못한 제롬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에리카 가는 곳엔 제가 가야지요. 만일을 위해 콜린은 이곳에 두고 가는 것으로 해요.”

“같이 가 줘서 고마워요. 제롬.”

제롬의 입술에 에리카가 살짝 입맞춤했다. 스킨십을 자주 하지 않은 부인의 반응으로 봐서는 같이 가 준다는 말에 상당히 좋아하는 듯했다. 

영지 순방을 마치고 막 도착한 에리카를 방으로 에스코트해서 푹 쉴 수 있게 한 제롬은 집사를 불렀다.

“내일 판테르 공작저에 갈 테니까 워프 게이트를 열 준비를 하게나. 그리고 아버님께 드릴 선물도. 아! 어린 여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도 좀 챙기게나.”

“네, 알겠습니다. 가주님.”

판테르 공작부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에리카가 간혹 그곳에 가곤 했었다. 그래서 비싼 돈을 주고 판테르 공작저와 아퀼라 공작저를 잇는 워프 게이트를 설치했던 제롬이었다. 어린 부인이 향수병에 걸리지 않도록. 

내일 판테르 공작저에 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준비할 게 많아졌다. 그렇기에 제롬은 밤늦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아부지!”

다음 날이 되자마자 일어난 콜린이 먼저 아침 인사를 했다. 

“우리 아들, 잘 잤느냐?”

“네.”

올해 네 살인, 저를 똑 닮은 아들을 안은 제롬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그려졌다. 아들을 안은 제롬은 막 깨어나 나온 에리카와 모닝 키스를 나눴다. 

“잘 주무셨습니까.”

“네, 어제 너무 피곤했나 봐요. 저녁도 거르고 계속 자고 말았네요. 오늘 판테르 공작저에 갈 준비를 해야 했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해 놨으니까요.”

제롬은 공작이었지만 안살림을 도맡고 있었다. 그리고 에리카는 아퀼라 공작가의 바깥일을 집중적으로 했다. 절대 안에서 부인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 에리카의 뜻대로 그녀는 활동적인 일을 하며 영지를 다스렸다. 

“우선 식사 먼저 하도록 하지요.”

내려가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콜린을 내려준 제롬은 에리카를 식당으로 에스코트했다. 식사가 끝나고 곧장 판테르 공작저로 갈 준비를 했다.

“판테르 공작저에 미리 연락은 넣었는가.”

“네, 통신구를 통해 그곳 사람과 통신을 했습니다.”

집사의 말에 제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곧장 옷을 갈아입었다. 3년 만에 가는 처가댁이니 치장하는 것은 당연했다.

“제롬, 얼른 나오세요. 집에 가서 무슨 상황인지 얼른 봐야 할 것 같아요.”

에리카의 채근에 제롬은 급히 밖으로 나왔다. 옷매무시를 단정하게 한 제롬은 에리카와 함께 워프 게이트 앞에 섰다. 워프 게이트에는 이미 판테르 공작저에 가져갈 선물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런 것들 안 가져가도 돼요.”

“하지만 3년 만에 가는 처가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에리카를 낳아 주신 아버지니까요. 자! 불평할 시간 없으니 우리 얼른 갑시다.”

외향적인 에리카에 비해 제롬은 가정적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밤늦도록 집사와 고용인이 고른 선물을 직접 선별해 준비한 제롬은 에리카와 워프 게이트에 섰다. 그러자 미리 선발한 기사가 주변을 감싸듯 기립했다. 

“그럼 다녀오겠네. 그동안 콜린과 집안을 잘 부탁하겠네.”

제롬의 말에 보좌관들이 고개 숙인 채 배웅했다. 그들의 인사를 받자마자 앞이 흐릿해지더니 금방 새로운 곳이 눈앞에 나타났다. 3년 만에 온 판테르 공작저는 여전했다.

“오랜만입니다. 에리카 아가씨, 그리고 아퀼라 공작님.”

그들이 올 것이라는 말을 미리 듣고 마중 나온 오스카가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안에서 회의 중이십니다. 곧 나오실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오스카의 말을 들은 제롬은 선물로 가져온 것들을 같이 온 기사들에게 끌어내도록 했다. 그러고 잠시 산책을 다녀온다는 말을 남긴 제롬이 먼저 움직였다.

잠시 후 회의를 끝낸 판테르 공작이 보좌관들과 함께 나타났다. 딸인 에리카와 별 차이가 나지 않은 듯한 외모의 판테르 공작은 에리카의 앞에 섰다.

“3년 만에 왔구나. 한데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우리 집에 오는데 제가 이유까지 말해야 합니까.”

무뚝뚝한 판테르 공작이 3년 만에 하는 말에 에리카 역시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니 약간의 성질이 들어 있는 듯 목소리 톤이 날카로웠다. 

“3년 만에 와서 성질을 부리는 것은 누굴 닮은 것이더냐.”

“아버지요. 아버지도 제가 3년간 안 와도 연락 안 하셨잖아요.”

할 말을 절대 속에 담아 놓지 않은 에리카는 판테르 공작을 보며 말했다. 그런 딸의 시선에 판테르 공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혹시 네 남편 놈이 우리 집을 감시하다가 새 소식을 듣고 온 것이더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