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들의 말랑한 최강 귀요미 (12)화 (12/164)

12화. 

내가 인사하자 사람들이 움찔하더니 잔뜩 굳은 표정을 풀었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놈의 연약한 다리는 제대로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그대로 콩 하고 테이블과 이마가 닿으려고 할 때 뒤에서 판테르 공작이 낚아챘다. 

다행히 테이블과 진한 키스를 하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니에. 갠차나여.”

오스카가 달려오더니 판테르 공작의 손에서 나를 빼 들어 요리조리 살펴본 후에야 겨우 안심하고 테이블에 앉혔다. 그곳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때 벤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 오늘도 기저귀 하셨어요?”

“앙대, 비미리란 마리야!”

여자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만천하에 떠벌리는 눈치 없는 벤스를 보고 있노라니 왜 결혼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살짝 씰룩이며 벤스를 볼 때 사람들 앞에 차가 놓였다. 내 앞에는 알록달록한 캐러멜이 한가득 담긴 그릇이 놓였다. 

하지만 왠지 분위기가 묵직해져 있었던 터라 캐러멜을 보고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이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판테르 공작이 카를로스를 보며 물었다.

“그래, 뭔가 건진 게 있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희 정보부는 해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에 대한 단서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라피가 진짜 하늘에서 키워졌다가 떨어지기라도 했단 건가.”

“일반 사람과 같은 피와 살이 있는 아가씨입니다. 그렇다고 파멸의 아이는 더더욱 아닙니다. 신전 쪽에 줄이 닿아 있는 이를 들춰 봤는데 공작님 말씀대로 여론전이었습니다.”

신을 믿는 이들이 적어지자 당연히 그만큼 기부금도 줄어들었다. 일정 금액은 귀족들과 황실이 보전해 준다고 하더라도 일반 신도들의 고혈이 묻은 기부금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일부러 신도를 모으고 그들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몇 해 전에 구원의 아이와 파멸의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예언을 퍼트렸다. 

그러자 파멸의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두려움에 너도 할 것 없이 신전으로 몰려들어 기도하고 기부금을 내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황궁에서 거둔 구원의 아이는 뭐지?”

갑자기 구원의 아이가 태어났다면서 신전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를 자신들이 데리고 있는 게 아니라 황실에 넘겨 줬다. 그걸 본 판테르 공작은 황실과 신전이 손잡은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다.

“선천적으로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관들이 구원의 아이라고 여론전을 하며 민심을 모아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황실과 함께.”

카를로스의 말을 들은 판테르 공작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캐러멜을 먹지도 못하고 노려보고 있는 나를 봤다. 

“그렇다면 라피는 파멸의 아이가 아니었군. 그건 좀 아쉬운데. 파멸의 아이가 되어서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줬으면 했거든.”

뒷감당은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라는 말을 흐린 목소리로 말한 판테르 공작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절로 기분이 좋은 나는 따스함에 녹은 캐러멜처럼 헤벌쭉 웃었다.

“공작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잠시 판테르 공작과 놀아 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뭐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내린 판테르 공작의 물음에 남자는 목젖이 울렸다. 그냥 봐도 잔뜩 긴장한 상태인 듯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저 아이는 세라피나라는 이름을 공작님께 얻었습니다. 하면, 아이를 판테르 공작가의 호적에 올리려 하심입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캐러멜을 노려보고 있다가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판테르 공작가의 호적이라니, 생각하지 못 한 일이었다. 

난 베네딕트 황가의 자손인데, 뭐 그 전엔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중학생이었지만. 

남자의 말에 판테르 공작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줬다. 그 손길에 내 얼굴은 다시 헤벌쭉해졌다. 지조 없이 웃음을 흘리는 나를 본 벤스는 손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와 달라는 신호였지만 나는 그를 애써 무시하며 알록달록한 캐러멜을 주물럭거렸다.

“자네,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그건 공작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건만.”

“하지만 판테르 공작가라면 거기에 맞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더불어 인생의 무게를 지탱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어린 시절의 공작부인의 모습일세.”

“단순히 모습만 닮아서 누군가가 마법으로 아기를 공작님 눈앞에 던져서 일부러 기르게 한 후…….”

순간 음모론과 찬성론이 맞부딪쳤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모르는 이들이 말로 치고받는 모습을 유심히 보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낵아 오빠의 가족?”

단순히 마력을 되찾아 마법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며 이곳에서의 생존을 생각했다.

한데 이들은 나를 이 집안의 양녀로 삼을지 아니면 그냥 첩자로 여길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 논란의 핵심이 되어 버린 나는 그들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두 눈을 깜빡이면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볼 뿐이었다. 잠시 말하는 것에 뜸을 들이던 판테르 공작이 나를 보며 말했다.

“만약 내가 이 아이를 입양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네에? 갑자기 그 무슨 황당한 말인지. 

이곳으로 떨어진 지 한 달이 좀 넘은 상황이었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판테르 공작 앞에서만 필살 애교를 부리며 목숨 부지했다. 한데 갑자기 입양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판테르 공작의 말에 나는 절대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도 퍽 곤란했다. 

“그건 공작님의 집안사이지 않습니까. 저는 딱히 찬반을 논할 입장은 아닙니다.”

카를로스가 먼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미소를 지어 줬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작님께서 세라피나 아가씨를 내친다고 하더라도 제가 데려다가 잘 먹이고 키울 테니까요.”

이른바 키잡인가. 키워서 잡아먹기? 아니면 키워서 미래의 아들과 결혼시키기? 

벤스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자 판테르 공작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네는 아이 키우는 것을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으로 아나 보군.”

“조그만 아이 하나 키우지 못할 정도로 제가 가난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판테르 공작과 가까운 자리에 앉은 벤스였다. 그렇다는 것은 상당한 고위직이라는 뜻이기에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기만 하면 잘 큰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직 이 아이는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기저귀를 착용해야만 한단 말일세.”

하지 마!

벤스에 이어 판테르 공작까지 내 마음을 후벼 팠다. 

얼마 전에 기저귀에서 탈출했다. 물론 내가 기저귀에 실례하는 일은 없었다. 그날 깊은 생각하며 이불에 머리를 묻고 힘을 줄 때 하필이면 아랫배와 괄약근에 힘이 들어간 바람에 뿌지직했을 때를 제외하고.

그 이후로 기저귀에 실례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제니는 답답하고 꿉꿉한 기저귀를 벗겨 줬다. 그것 때문에 너무 들떠서인가. 자다가 또 소변을 보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날 나는 뜻하지 않게 세계 지도도 모자라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은 대륙까지 그리고 말았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판테르 공작은 내게 다시 기저귀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 것이라면 괜찮습니다. 제 미래의 며느님이니 제가 데려가서 예쁘고 곱게 키울 테니까요.”

자신은 돈이 많다면서 아이를 전문적으로 길러 주는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라고 공약을 내걸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나는 나직하게 ‘에효효효.’ 소리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자네 집인들 적응할 수 있겠는가. 다시 그곳에 가면 새로 적응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제가 얼마나 아가씨랑 잘 놀아 주는데요. 그렇죠, 세라피나 아가씨.”

갑자기 동의를 구하는 듯한 벤스를 본 나는 두 눈만 깜빡였다.

“이것 보십시오. 차마 공작님 눈치가 보여서 눈을 깜빡이면서 제게 신호를 보낸 것을요.”

벤스는 아무래도 내게 홀딱 빠진 게 분명했다. 

“눈을 껌뻑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세. 어느 누가 눈을 계속 뜨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지금 공작님께서 수 분째 두 눈을 부라리면서 저를 노려보고 계십니다만.”

“그건 자네가 눈 감을 때 나도 같이 감아서 계속 눈을 뜨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일세.”

“역시, 미래의 사돈은 저와 박자가 잘 맞나 보군요.”

이젠 판테르 공작에게 미래의 사돈이라고 칭한 벤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저러다가 몇 대 얻어터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됐고, 라피는 다른 사람한테 맡길지언정 자네한테만큼은 절대로 맡기지 않을 테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나.”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저는 우리 며느님의 기저귀를 갈아 줄 준비까지 다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벤스는 그냥 입 다물어 주는 게 내게 이로운 것 같았다. 서럽고 더러워서 얼른 기저귀를 떼든가 해야지. 밤이 되면 이놈의 방광이 조절되지 않아서 난감할 뿐이었다.

이러다가 키를 뒤집어쓰고 소금 얻으러 다녀야 하는 건가.

굉장히 우울해진 나는 캐러멜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입에 넣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 빙의해서 앞날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나은 상황일 텐데. 예언의 아이가 되어 한 세상을 풍미했을 것 같았다. 

한데 지금의 난 이 세계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했다. 베네딕트 황녀였을 때는 빨리 죽지 않기 위해서 미친 듯이 발버둥 쳐서 미래를 바꿨다. 책에 적히지 않은 해피엔딩 이후에 생긴 일 때문에 이곳으로 떨어지고 말았지만.

‘여기도 책 속 중 하나이지 않을까. 혹시 내가 읽었는데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아직 읽어 본 적 없는 책인가.’

이 세계에 대해 뭐라도 떠올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러나저러나 지금의 난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애에 불과했다. 

한껏 우울한 분위기를 풍길 때 누군가가 일어나서 말했다. 

“저희가 어찌 공작님의 직접 집안일에 나서겠습니까.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도 따르겠습니다.” 

한마디로 가족 구성원의 허락을 받으면 된다는 말에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수결로 하지.”

판테르 공작과, 딸, 아들 중 둘만 손을 들어 주면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세라피나 판테르가 되어 버리는 경이로운 일이 벌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판테르 공작의 딸과 아들의 성미도 장난 아닐 것 같았다.

나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은데 부인과 닮았다는 이유로 호적 메이트로 올리려는 것을 보며 싫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이곳의 절대 권력자를 잘 따라야 조금이라도 목숨 연명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플랜을 짜다가 조물조물하던 캐러멜에서 자꾸만 달콤한 향이 풍겨서 나도 모르게 입에 넣었다. 순간 입 안에서 톡 터진 달콤새콤한 과일 맛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볼에 얹고 말했다.

“디따 마시써!”

순간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내 쪽으로 시선이 몰렸다. 철퍼덕 앉아서 캐러멜을 쪽쪽 빨고 있다가 나를 보는 시선이 거둬지지 않자 얼른 바구니를 팔로 가렸다. 그런데도 그들의 시선이 거둬지지 않자 나는 어쩔 수 없이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먹꼬시퍼서 구래여? 구롬 하나 주께여.”

테이블 위를 아장아장 걸으며 바구니에 담긴 캐러멜을 하나씩 배급하듯 줬다. 그걸 받은 사람들은 웃거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디따 마싯는 고니까 머그세여. 두리 먹따가 두리 주거도 몰라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