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판테르 공작저에서 지낸 지 한 달이 지났고, 나는 몰라보게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이것이야말로 아동 확대범들의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더불어 자꾸만 내 볼과 손을 만지려는 사람이 많아서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곤 했다.
“만디디 마여. 아포.”
“에구구구, 우리 아가씨 아프셨어요? 죄송해요. 그럼 닿기만 할게요. 제발요.”
이젠 어디 소속인지도 모를 고용인들이 나를 볼 때마다 손을 내밀기에 바빴다. 덕분에 내 볼은 항상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되었다. 이러다가 볼이 찹쌀떡처럼 축 늘어질 것 같자 곧장 그곳을 탈출했다. 하지만 이내 다른 이들에게 잡혀서 방으로 되돌아왔다.
“우리 아가씨, 제가 청소할 때 외출하면 된다고 했어요? 안 된다고 했어요?”
“히잉, 하디만 요기 답답페여.”
답답함을 토로하며 고개를 한쪽으로 획 돌려 숙이자 혼낼 것 같던 제니의 표정이 풀렸다.
“그렇게 답답하셨어요? 그럼 우리 정원으로 나갈까요?”
“웅웅, 조아여!”
한 달 내내 방에만 있었더니 몸에 곰팡이가 필 것 같았던 나는 즉시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크로스백에 이것저것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제니의 손을 잡고 합법적으로 방을 나설 수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모습 좀 봐. 너무 귀엽지 않아?”
“그것보다 아가씨 엉덩이 좀 봐. 걸을 때마다 씰룩쌜룩 움직여서 한 번만 토닥여 보고 싶을 지경이야.”
이것 보셔! 내 엉덩이는 함부로 손댈 수 없거든.
내가 걸어갈 때마다 옆으로 물러섰던 이들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말했다.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이 전부 들렸던 나는 모르는 척하며 도도한 아가씨처럼 걸었다.
그래봤자 내 걸음이 황녀처럼 고고하게 변하지는 않았다. 내가 걸을 때마다 다들 심장에 지병이 있는지 왼쪽 가슴을 부여잡고 벽을 짚기만 할 뿐이었다.
“어머나, 우리 세라피나 아가씨, 안녕하세요.”
마침 맞은편에서 오던 시녀장 이레나의 물음에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안냐세여.”
두 손을 배에 올린 채 고개 숙여 인사하자 이레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가씨, 어딜 가시나요?”
“제니랑 바께 나가여.”
“그렇군요. 요즘 날씨가 좋으니 정원으로 가셔도 불편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니, 세라피나 아가씨를 잘 모시게나.”
“네, 염려하지 마세요.”
제니에게 당부를 한 이레나는 내 볼을 살짝 누르더니 비볐다. 따스한 기운이 스미자 나도 모르게 방긋 웃었다.
“이레냐, 가치 나가여.”
“오, 저도 아가씨의 나들이에 초대해 주시는 건가요? 기뻐요. 한데 이 일을 어쩌죠. 제가 지금은 바빠서 같이 못갈 것 같아요. 나중에 같이 가요.”
“웅, 구롬 다메 가치가여.”
이레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자 그녀는 내게 살짝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와 헤어진 나는 제니와 함께 일전에 판테르 공작이랑 같이 왔던 곳에 도착했다. 그땐 판테르 공작에게 안겨서 갔는데 이번엔 내 발로 가다 보니 조금 지쳐 버렸다.
나무 그늘에 앉자마자 그대로 푹 퍼진 채로 주변을 살폈다. 그땐 꽃이 별로 피지 않았는데 오늘은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꼬치 마나.”
“네, 꽃이 정말 많네요. 화관 만들어 드릴까요?”
“니에!”
제니가 콧노래를 부르며 꽃을 꺾을 때 나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신비한 힘을 지녔다는 보석은 탈색이 된 이후로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대체 뭘까. 이럴 줄 알았으면 오빠한테 자세히 물어볼걸.’
오빠의 선물이기에 제대로 묻지 않고 받기만 한 게 약간 후회되었다. 일반 보석 같긴 하면서도 뭔지 모를 신비한 힘이 있다는 목걸이를 물끄러미 봤다.
‘이게 힘을 지니고 있다면 다시 그 힘을 채웠을 때 나를 베네딕트 제국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 건가.’
그곳에 가면 나는 뭘 해야 하는 것인가.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만약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곳을 버리고 가야 하는 건가. 그곳에 오빠가 있다는 법도 없는데.
다시 도돌이표를 찍은 생각을 하던 내게 제니가 다가오더니 막 만든 화관을 씌워 줬다.
“어머나, 너무나 예뻐요.”
“나 이뽀여?”
“네, 세상에서 최고로 예뻐요.”
사심 한 점 없이 웃는 제니를 보던 나는 그녀의 두 손을 봤다. 아마도 줄기에 가시가 있는 줄 모르고 꺾다가 생채기가 난 듯 붉은 실선이 생겨 있었다.
“요기 아포여?”
“네? 안 아파요. 조금 따끔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 눈엔 아파 보였다. 그렇기에 난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입김을 불어줬다.
“호, 호오오…… 아푼 고, 아푼 고 다 나라가라.”
“어머나, 우리 아가씨가 호호 불어 주셔서 하나도 안 아파요. 이것 봐요.”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하며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제니를 본 나는 방긋 웃었다.
“아푸묜 또 마래여. 낵아 호호 해 주믄 나을 쑤 이써여.”
“어쩜, 우리 아가씨는 상냥하시기도 해라.”
내 머리카락이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로 쓰다듬어 준 제니를 위해 친히 팔짝팔짝 뛰어 줬다. 저번엔 금색 나비가 많았는데 이번엔 금색 나비가 아닌 다른 나비가 팔랑였다. 하얀색 나비를 잡기 위해 두 손을 활짝 폈다가 오므렸지만 잡히지는 않았다.
“어머나, 우리 아가씨 멋져요.”
제니가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자 나는 더욱더 열심히 팔짝 뛰었다. 그걸 보다 못한 지나가던 남자 중 한 명이 조심히 다가와서 나비를 잡아 줬다.
“우아! 멋쪄!”
“크흠, 제가 그리 멋지십니까.”
“웅, 멋쪄여. 군데 요거 이룸이 모야여?”
“이 나비는 하늘 나비라고 합니다. 요기 자세히 보면 날개가 하늘색이랍니다.”
남자의 손아귀에 있는 나비를 자세히 보자 진짜 하얀 날개 안에 하늘색이 보였다.
“이룸도 아네. 똑또케여. 오빠는 요론고 모르던데.”
“크흠, 제가 좀 똑똑합니다. 하하하.”
하늘 나비를 실컷 본 나는 그걸 풀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남자의 손에 잡혀 있던 나비는 벌어진 틈으로 빠져나가 훨훨 날아갔다.
“안농!”
저 멀리 날아가는 하늘 나비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줬다. 그러고는 나비를 잡아 줬던 남자에게 가방을 뒤져 사탕을 하나 줬다.
“나비 자바죠서 고마뜹니다.”
“착하기도 하셔라.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귀한 사탕을 주셔서.”
남자가 손을 내밀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제니가 뭐라고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위험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대신 제니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된 것 같긴 했다.
“아가씨의 머리카락을 조금만 만져 봐도 될까요?”
“니에.”
때리는 게 아니라 만져 본다는 말에 나는 머리를 남자 앞으로 살짝 들이밀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기분이 좋은가요?”
“니에, 저버네 오빠가 쑤다듬 쑤다듬 해져써여. 그때 조아써여. 첨이라서.”
내 말을 들은 남자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라서 그런지 유독 친근하게 느껴졌다.
“제 이름은 카를로스랍니다.”
“까룰러쓰?”
“그냥 카를이라고만 불러 주셔도 됩니다.”
“까를!”
“우리 아가씨, 참 잘하셨어요. 그럼 저랑 어디 좀 같이 갈까요? 제니, 아가씨는 내가 모실 터이니 얼굴 풀게나.”
카를로스라고 밝힌 남자가 뒤돌아서 제니에게 말한 후 나를 안아 올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그의 가슴께를 꽉 잡았다.
어머나, 망측해라.
하지만 이건 살기 위한 발버둥일 뿐이라고 세뇌할 뿐이었다. 판테르 공작보다는 못했지만 벤스보다는 탄탄하고 빵빵한 가슴의 소유자인 카를로스의 가슴에 찰싹 붙어서 근력과 악력을 길렀다.
“우리 오디가여?”
“우리 아가씨의 오빠가 계신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 구로쿠나.”
판테르 공작에게 간다는 말에 나는 안심했다. 근데 이상하게 카를로스를 본 고용인들이 슬금슬금 피했다. 심지어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지 고개를 팍 숙이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치 눈만 마주쳐도 생각하고 있는 것이 탈탈 털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군데 까를은 모해여?”
“저는 정보수집자라고나 할까요.”
정보수집자? 흥신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의 가슴에 대고 얼굴을 가로저었다. 어쩌다 보니 비비적대는 모양새를 연출했지만, 카를로스는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보는 공간에 들어서자 다들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자네가 라피를 안고 있는 건가.”
비비적 비비적-
판테르 공작과 다른 사람이 있는 회의실로 들어온 카를로스가 제 가슴에 비비적대는 내 등을 다독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우연히 정원을 지나쳐 오는데 아가씨가 놀고 계셔서 납치해 왔습니다.”
나를 납치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카를로스였다.
“정원 쪽에서 올 이유는 없을 텐데. 일부러 라피에게 접근하려고 그런 건가.”
“글쎄요. 지금 중요한 것은 아가씨께서 제 가슴을 조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도발을 하는 듯한 카를로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판테르 공작의 눈썹이 씰룩였다.
“라피, 이리 오려무나. 카를로스는 아저씨도 아니고 진짜 할아버지야.”
판테르 공작의 말에 나는 카를로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나를 안는 모양새가 참 안정된 것 같더라니.
“까를, 하부지?”
“어쩌다 보니 우리 아가씨보다 나이 먹은 손자 손녀가 있답니다.”
“헤에, 구로쿠나.”
열여섯 살부터 결혼할 수 있으니 열여섯 살에 애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열여섯 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충분히 가능했다. 나이가 어찌 되는 줄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사십대로 보이는 카를로스는 나를 보더니 빙그레 미소 지었다.
“됐고, 라피는 이리 넘기게.”
판테르 공작이 손을 내밀며 말하자 카를로스는 나를 인수인계했다. 그리고 판테르 공작과 가까운 빈자리에 앉았다. 그걸 봐서는 카를로스가 일반적인 정보수집가는 아닌 듯했다.
이 집안의 절대 권력자의 자리와 가깝다는 것은 그 사람도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벤스가 판테르 공작의 바로 옆자리라는 것은 매우 놀랄 일이었다.
“어이쿠! 미래의 며느님, 오셨습니까.”
벤스의 말에 판테르 공작이 흐린 눈으로 봤다. 그러고는 안고 있는 나를 테이블 위에 떡하니 앉혔다. 순간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자 두 눈을 깜빡였다.
어른들만 있는 자리였던지라 나는 눈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치맛자락을 조그만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상태로 살짝 고개 숙여 말했다.
“안냐세여. 라삐에여. 만나소 방가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