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진정제를 먹고 한결 편히 숨을 쉬며 자는 아이를 본 판테르 공작은 무심결에 숨겨 두고 혼자만 되뇌고 싶었던 이름을 주고 말았다.
아이에게 이름을 준 후 왜 그랬을까 골똘히 생각해 봤다. 손만 내밀었을 뿐인데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듯 바들바들 떨며 비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다.
“아마도 제가 보기엔 이런 경우 아빠가 학대범일 확률이 높습니다. 엄마가 그럴 경우도 있지만.”
조금 늦게 따라 나온 벤스가 턱을 쓸어 만지며 말했다. 제 자식에겐 무심했을지언정 손찌검은 한 적 없었던 판테르 공작이었다. 물론 대련을 핑계로 아이들을 몇 차례 굴린 것은 제외하도록 하자.
“아니 어떻게 저 구운 찹쌀떡 같은 애를 때릴 수 있는 거지.”
판테르 공작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찹쌀떡은 눌러도 탄성 때문에 튀어나온다고 하더라도 아이는 진짜 찹쌀떡이 아니지 않은가. 가슴에만 묻어 둔 채로 가끔 꺼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릿저릿 아프게 하는 여인을 닮은 아이를 때리다니.
“한 주먹 거리도 안 돼서 때릴 곳도 없어 보이는데.”
판테르 공작이 벤스를 노려보며 말하자 그는 절대 자신이 때린 게 아니라며 고개를 격렬하게 저었다.
“저 아이의 부모가 대체 누구일까. 진짜 하늘이 낳아서 뚝 떨어뜨려 놓은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방으로 들어가는 내내 혼잣말을 하던 판테르 공작은 다음 날 보좌관들이 몰려왔다는 오스카의 전언을 들었다.
아침부터 보좌관들이 제 발로 쳐들어왔다. 그들이 왜 왔는지 대충 짐작이 된 판테르 공작은 회의실로 들어갔다.
묵직한 기운이 스민 곳에 앉자마자 판테르 공작의 왼팔이라 불리는 맥스가 조용히 운을 뗐다.
“하늘에서 떨어진 출신조차 모르는 아이에게 그분의 이름을 내리셨다고요.”
딱딱한 목소리엔 상당히 못마땅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살짝 고개 숙인 채 있는 맥스의 붉은 눈동자엔 불만이 어렸다.
“내가 아이에게 이름 하나 지어 주지 못하는 건가.”
팔짱을 낀 판테르 공작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댄 채 좌중을 훑어봤다.
“이름은 지어 줄 수 있다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입니다. 하물며 지금 정보부 쪽에서 아이에 대해 알아보고 있는데…….”
“닮았네.”
그 한마디가 누구를 뜻하는지 알 것 같기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침묵 후 맥스가 무거운 입술을 떼어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한들…….”
“하는 말이 똑같았어.”
“무슨 말씀이신지?”
“나와 그녀만이 아는 말…… 똑같이 하더군.”
순간 좌중은 찬물이 가라앉은 듯 고요해졌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때 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씀이 진짜라면 그분께서도 어린 시절에 그따위로 귀여우셨던 건가요? 아주 애간장이 살살 녹고 심장이 쿵쿵 떨어질 것 같던데.”
벤스의 말에 판테르 공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면 아이가 그분의 환생체라도 된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키워서 잡…… 읍!”
애초에 돌려 말할 생각이 없었던 벤스의 입을 오스카가 틀어막았다. 더 했다가는 심의윤리에 직격탄으로 맞아 강제로 인생을 삭제당할 것 같았다. 벤스의 남은 인생을 지켜 준 오스카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렇다면 그 아이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분의 이름까지 주신 마당에 내쫓진 않으실 터이고.”
판테르 공작가의 오랜 보좌관 중 한 명인 아치 클리블이 조심히 물었다. 그러자 판테르 공작이 테이블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건 좀 더 두고 볼 생각이네. 어차피 나는 그 아이가 진짜 파멸의 아이이든 구원의 아이이든 상관없으니까. 평범해도 되지만 파멸의 아이면 더 좋을 것 같군.”
“만약 그 아이가 파멸의 아이라면 황실에서 가만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날카롭게 문제점을 지적한 맥스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구원의 아이를 이미 확보한 황실에서 파멸의 아이가 이곳에 있다고 하면 온갖 이유를 갖다 대며 내놓으라고 할 것이다.
그런 족속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판테르 공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몄다.
“그렇다면 더더욱 밖으로 내칠 수는 없지. 황실에서 데려가 봤자 죽이기밖에 더 하겠는가.”
후환의 싹은 어렸을 때 잘라내는 게 옳았다. 하지만 판테르 공작은 황실과 신전에서 원하는 대로 해 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황실과 신전의 눈치를 보고, 시키는 대로 따라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이미 3년 전에 당한 것으로 충분하네만.”
“으음.”
아직도 3년 전 일만 떠올리면 다들 울분이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이라도 황제 목을 따 버릴까요?”
역모에 준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카이 가브리엘 백작이 단검으로 손톱 정리를 하며 말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판테르 공작의 비밀 친위대 대장인 그가 싱긋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황제를 못 죽여서 가만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황제를 죽이면 이 나라에 혼란이 와서 그냥 상징성으로 놔둔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자신의 치세를 널리 알리고 있겠지만.
“그럼 황제는 누굴 시키려고?”
“황태자를 올린 후에 공작님께서 조종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귀찮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카이가 피식 웃었다. 지금이라도 황도인 사하라 정도는 접수할 힘이 있었다. 단지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은 판테르 공작가였다.
“공작님께서는 잔챙이 천 마리 죽이는 것보다 대가리 하나를 죽이는 것을 즐기시지 않습니까.”
“그 편이 잔챙이를 빨리 제압할 수 있으니까.”
“원하시면 말씀하십시오. 황제 목은 언제든지 따 드리겠습니다.”
“난 자네 가문을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진 않으니 동부에 있게나.”
오래전에 은혜를 입어 대대로 판테르 공작가의 보좌관이 된 가브리엘 백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현 가브리엘 백작의 조상은 보좌관이 되면서 은혜만 갚으면 판테르 공작가를 떠나겠노라고 선언했었다. 그게 벌써 100년 전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아이 신병을 우선 확보만 한 상태에서…….”
“세라피나다.”
그간 이 안에서 거론되지 않았던 이름이 나오자 말을 하던 아치의 입이 다물렸다.
“앞으로 아이를 보면 세라피나라고 부르게. 외형은 그녀와 똑 닮았으니 금방 알아챌걸세. 이 집 안에 그런 모습을 지닌 사람은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내가 데리고 있을 예정이네. 그 후의 일은 카를로스가 정보를 물어오면 결정하도록 하겠네.”
“네.”
세라피나라는 이름의 무게를 아는 이들은 판테르 공작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 집안의 유일한 활력소이자 따뜻함이었다. 그리고 판테르 공작부인 중 가장 존경받는 여인이었다.
“그럼 회의는 이만하고 모두 각자 위치로 가게나. 피곤하군.”
판테르 공작이 손을 휘젓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문이 열리며 엘리오가 들어왔다.
“이곳에 가주님이 계신다고 하여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
“아이의 상태, 아니, 세라피나 아가씨의 상태에 이상이 생기면 보고하라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엘리오의 말에 판테르 공작의 몸이 서서히 의자와 작별하기 시작했다.
“경기라도 일으키든가.”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낯선 환경 때문인지 먹은 것을 전부 토하셨습니다만 곧 괜찮아졌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나가 보라는 판테르 공작의 시선에 엘리오는 보고를 마치고 그대로 뒤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아이가 그리 약해빠져서야.”
“가주님, 원래 아이들은 몸이 약합니다만. 아가씨와 도련님 빼고요.”
판테르 공작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남매는 다른 아이에 비해 발육이 빨랐다. 그런 점을 콕 짚어 말한 오스카를 보며 판테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빨리 자란 탓인지 에리카가 일찍 시집가지 않았겠나.”
열일곱 살이 되자마자 첫째 에리카가 덜컥 시집을 가 버렸다. 이곳이 너무 답답하고 싫다고 말하면서. 시집을 간 후 안정이 된 에리카는 자주 이곳에 놀러 오곤 했었다.
당시만 해도 세라피나가 이곳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자 발길을 끊어 버렸다.
“아가씨께서는 제 짝을 찾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핏줄조차도 판테르 공작의 곁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들 역시 그걸 보고 배웠는지 쉽사리 곁을 주지 않아 친구도 극소수였다.
“둘째는?”
“지금 아카데미에서 공부 중이시니 방학이 되어야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군. 세라피나는 지금 뭐 하나.”
“제니가 세라피나 아가씨와 놀 거라고 아가씨와 도련님이 사용하셨던 장난감을 모두 가져오라고 했다더군요.”
아이니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판테르 공작은 잠시 일을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아이를 한 번 봐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 판테르 공작의 뒤를 오스카가 따라붙었다.
방에서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보석 퍼즐 맞추기를 하는 세라피나를 본 판테르 공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이가 주변을 살피더니 보석 조각을 옷에 집어넣었다.
데굴데굴 굴러 나오자 못내 실망한 표정을 짓던 아이는 뭔가 깊은 생각이라도 한 듯 멍하니 보석 조각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본 판테르 공작은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한마디 하기가 무섭게 아이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태연한 척 아이는 보석 조각을 한 움큼 쥔 채 걸어왔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걸음이 불안한 나머지 판테르 공작도 움찔하며 언제든지 앞으로 뛰어갈 수 있게 몸을 긴장시켰다.
발라당 넘어지지 않고 겨우 판테르 공작 앞에 선 아이는 헤벌쭉 웃더니 보석을 내밀었다. 딸랑이도 주려고 했으니 이것도 준다는 뜻인가. 잠시 아이의 행동을 해석하려던 판테르 공작은 이내 발음도 제대로 되지 않은 아이의 말에 멈칫했다.
“이뿐 오빠, 나랑 가치 노올자여.”
굳은 판테르 공작의 모습을 본 오스카가 아이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지적을 했다.
“아가씨, 가주님을 그리 부르시면 안 된답니다.”
“구롬 오또케 부러야 해여?”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고민에 빠진 아이를 보던 오스카는 순간 떨어질 뻔한 심장을 재빨리 잡았다. 잘못하면 심장이 떨어져 회생 불가능이 될 뻔한 오스카는 헛기침했다.
“이분은 예쁜 오빠가 아니라 예쁜 할아버지랍니다.”
에리카가 아이를 낳았으니 법적으로도 할아버지가 맞긴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판테르 공작은 사늘한 눈빛으로 사정없이 오스카를 쏘아봤다.
“오스카, 세상을 너무 오래 산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는가.”
“천만에요. 오늘도 소신에겐 열두 가지 할 일이 있어서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답니다.”
요즘 벤스와 자주 만난다고 하더니 능청이 묻은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집사를 바꾸고 싶었지만, 오스카가 누구인가. 분명 찹쌀떡보다 더 진득하게 들러붙을 게 분명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오스카의 소매를 아이가 잡고 흔들자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새하얀 찹쌀떡이 해죽 웃으며 말했다.
“그르다 내뇬에 공짜 맘마 머글 수 이써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