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름과 나이를 들은 제니와 벤스는 순간 움찔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판테르 공작은 바람 소리도 내지 않고 나가 버렸다.
“베, 벤스 님……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요.”
“글쎄, 우리 무뚝뚝한 공작님이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게 매력이긴 하지만 이번엔 나조차도 놀랍군.”
주치의가 다녀간 후 안정을 찾은 듯 제 얼굴색이 돌아온 아이를 본 벤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판테르 공작령에서 금지한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을 아이에게 내려 줬다.
“아마도 가주님께서는 부인을 잊지 못하고 계시나 보군요. 전 다 잊으신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나. 우리 공작님이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최소한 사랑이란 감정은 아는 분이라네.”
3년 전에 그분이 돌아가셨다. 판테르 공작의 유일한 천사이자 이 공작령의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복중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아이도.
그때 당시 판테르 공작성은 완벽하게 뒤집혔고 덤으로 황궁도 뒤집혔다. 판테르 공작이 황궁을 뒤집어엎으며 협박까지 곁들였던 것을 떠올린 벤스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 감은 상태에서도 귀찮은지 조그만 손을 흐느적거렸다. 그런 아이, 아니, 이젠 세라피나 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아이 옆에 딸랑이를 놓아 줬다.
“아무래도 아가씨라고 불러야겠는걸.”
“그래야겠죠? 그 이름을 허락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니까요.”
판테르 공작의 어린 두 번째 아내였던 세라피나를 떠올리던 두 사람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대대로 사이가 안 좋은 집안의 여인이라 절대 마음을 주지 않고 제대로 따르지 않았지만 잃고 나서 후회한 이들이었다.
“이제라도 후회할 짓 하면 안 되니까. 그렇죠? 아가씨.”
앞으로 세라피나로 불릴 아이의 은빛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만지며 벤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세라피나의 눈가에 이슬이 살며시 맺히며 조그만 입술을 오물거렸다.
“우웅, 마마 보구시퍼…….”
* * *
나 안 쫓겨나는 건가? 컵도 깨뜨렸는데.
판테르 공작이 내미는 손이 무심결에 나를 때리는 아비랑 겹쳐 보여 바짝 엎드려 빌었다. 그러다가 기억이 뚝 끊겼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모르겠지만 깨어나자마자 제니가 유독 살갑게 웃으며 나를 챙겨 줬다.
“아가씨, 하루 만에 깨어나셨답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나요?”
끄덕끄덕-
쫓겨날까 봐 눈치를 본 나는 제니가 주는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먹었다. 그 결과 소화가 되지 않은 나머지 그대로 토하고 말았다.
이래서 눈칫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데.
“우에에엑!”
맛있는 음식이 소화도 되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오자 주치의가 후다닥 달려왔다. 토했더니 기운이 빠진 나는 축 처진 상태로 주치의를 맞이했다. 내 상태를 살피던 주치의는 제니에게 약을 건네주며 말했다.
“원래 아이들은 자주 토하고 아프니까 곁에서 잘 돌보게나. 아가, 아직도 속이 안 좋니?”
도리도리-
“아프거나 상태가 안 좋으면 바로 말하려무나.”
끄덕끄덕-
체질적으로 의사가 싫었던 나는 제니의 치맛자락을 꽉 잡고 얼굴을 반쯤 숨긴 채 고갯짓만 했다. 그런 나를 굉장히 불쌍한 시선으로 보던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이 아이의 이름은 뭔가?”
“어제 가주님께서 이름을 부여해 주셨답니다. 세라피나예요.”
그 이름을 들은 주치의의 두 눈이 깜빡이더니 찢어질 듯 커졌다.
“세, 세라피…… 그, 그렇군요. 세라피나 아가씨, 제 이름은 엘리오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제 이름을 밝힌 엘리오를 보며 나도 모르게 제니를 올려다봤다.
내 이름이 세라피나라고? 말도 안 돼.
여기에서도 세라피나라니, 이 무슨 해괴한 운명이란 말인가. 수많은 이름 중에 십팔 년간 호적에 적혀 있지만, 오빠와 황후 외엔 제대로 불린 적 없는 이름이라니.
어안이 벙벙한 나를 본 제니가 방긋 웃으며 안아 올렸다. 그러곤 내 볼에 제 얼굴을 비비적댔다.
“나, 나…… 안 쪼껴나여?”
“쫓겨나긴요. 감히 세라피나라는 이름 앞에 무릎 꿇을 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안 쫓겨난단다. 신난다.
겨우 안심한 나는 아효효효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력을 찾고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 때까지 안전하게 있을 곳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이곳이었다. 나중에 모은 돈 들고 나가서 오빠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연구할 예정이었다.
꼬르르륵-
다 토한 상태에서 안도하자 배가 비어 있다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소화 잘되는 음식으로 드실 수 있게 하게나. 그럼 아가씨,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니에, 안녀히 가세여.”
의사는 얼른 보내고 봐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며 인사했다. 그러자 엘리오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저도 손 흔들며 가다가 문에 부딪쳤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엘리오가 나가자 제니는 곧장 소화 잘되고 맛 좋은 음식을 만들어 달라고 밖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들어왔다.
“아가씨, 식사하고 우리 뭐 하고 놀까요?”
뭔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하는 제니를 본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자끄에여.”
“아가씨랑 같이 놀고 싶었는데. 아가씨랑 도련님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다 가지고 오려고 했거든요.”
응, 난 그런 거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니거든.
고개를 갸웃하며 침대 위로 올라가려다가 딸랑이를 봤다.
그래! 이거야! 분명히 그 아기용 장난감이래도 뭔가 특별할 것이다. 이 딸랑이에 들어가 있는 진주처럼.
“그러믄 낵아 제니랑 노라 주게여.”
“정말요? 역시 우리 아가씨가 최고예요. 얼른 식사하고 우리 놀아요.”
제니가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치울 때 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이름을 받긴 했지만, 이 집안 핏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쫓겨나서 혼자 살 때를 대비해서 돈이 필요했다.
이곳에서 일할 수 없으니 장난감이라도 착복해 보려고 한 나는 식사가 들어오자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런 건 굳이 제니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놈의 손가락은 자꾸만 내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분명 숟가락 가득 담았는데 입에 들어오는 것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손아귀에 잡힌 숟가락이 기울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절반이 쏟아졌다. 그리고 입에 넣을 때 조준을 잘못했는지 입안이 아니라 입술을 수프로 코팅했다.
“에구, 우리 아가씨 다 흘리셨네요. 당분간은 제가 도와줄게요.”
수프를 질질 흘리며 쩝쩝 소리까지 내며 먹는 나를 보다 못한 제니가 내 손에 들린 숟가락을 잡고 먹여 줬다.
“낵아 모 머는 거 아니야요. 요게 잘모탄 고에여.”
“네네, 아가씨 말이 맞아요. 전부 숟가락이 잘못한 거예요. 아가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연장 탓을 한 나를 본 제니가 쿡쿡 웃으며 남은 수프를 먹여 줬다. 먹는 동안에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꼭 일을 쳤다. 옆에 있는 물컵을 건드렸다가 떨어져서 깨졌다.
컵이 깨지자 놀란 나는 제니를 봤다. 제니의 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혼나겠다 싶은 나는 곧장 두 손으로 머리를 잡은 채 바들바들 떨었다.
“자, 자모해써여…… 자모해써여…….”
컵을 깨뜨린 죄를 물어 제니가 나를 때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픈 것 대신 머리를 감싼 따스함이 손에 느껴졌다.
“아가씨, 컵 정도는 깨셔도 됩니다. 아이잖아요. 아니, 어른이어도 컵을 깨도 이리 빌지 않아도 된답니다.”
유독 짠한 눈으로 내려다본 제니는 나를 품에 안아 주더니 등을 다독여 줬다. 그녀의 따스함 때문인지 몰라도 떨림이 어느 정도 가시자 제니가 내 얼굴을 쓸어 만지며 말했다.
“우리 장난감 가지고 놀지 않을래요? 곧 준비할게요.”
그녀의 권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니의 말을 들은 이들이 내 눈앞에 장난감을 산처럼 쌓아 놓고 갔다.
세상 만상에나.
멍하니 장난감을 본 나는 언제 빌면서 떨었냐는 듯이 씩 웃었다.
평범해 보이는 곰 인형 눈에 보석이 박혀 있었다. 대박! 역시 이 집안은 스케일이 컸다.
이 눈깔은 갖다 팔면 얼마나 받으려나. 나도 모르게 곰 인형 눈깔을 콕콕 누르며 빼려다가 제니에게 들키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제니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하여튼 누굴 닮았기에 이럴까요. 아가씨랑 도련님도 인형 눈알을 죄다 빼 놓으셨다고 하던데.”
고양이 인형의 수염은 죄다 뽑아 놓고 강아지 인형은 코와 꼬리를 뜯어 놓았다는 제니의 설명에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얼마 전에 퇴직한 유모가 말하기로는 장난감을 하루에 한 번씩 수선했다고 했어요. 그에 비하면 우리 아가씨는 참 얌전하…… 아, 아가씨!”
와르르르-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산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나를 덮쳤다. 장난감 유사 속에 빠진 나는 살기 위해 허우적댔다.
“어퓨어퓨…….”
장난감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해 파닥이는 나를 제니가 발굴해냈다.
“저거 무셔.”
“죄송해요. 장난감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남매가 사용했던 장난감을 전부 가져왔으니 파묻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장난감 유사에서 탈출한 나는 눈으로 이것저것 살펴봤다. 최대한 가볍고 비싼 것을 골라냈다. 보석이 박힌 곰 인형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퍼즐을 끄집어냈다.
“어머, 우리 아가씨, 조각 맞추기 놀이를 하고 싶으신 거예요? 제가 도와줄게요.”
조그만 손가락으로 금으로 만든 판에 있는 보석 조각을 만지작거리자 제니가 다가왔다.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되건만 제니는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내 옆에 찰싹 붙었다.
“이건 제가 알기로는 200피스짜리 퍼즐일 거예요.”
200피스라는 말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이거야. 이거 하나만 있으면 어디 가서도 굶어 죽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많은 것을 들고 갈 수는 없으니 이게 적당했다.
“요고 오또케 하눈 고얌?”
“제가 시범을 보여 줄게요. 잘 보세요.”
알록달록한 보석을 금으로 만든 퍼즐 판 위에 하나씩 놓았다. 퍼즐 판에 맞춰 세공한 다양한 보석 조각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하는 척하면서 하나씩 잃어버렸다고 말한 후 뒤로 착복하면 될 것 같았다.
제니가 퍼즐 맞추는 것을 본 나도 곧장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보석을 들어 올렸다.
“여기예요. 여기.”
“낵아 하끄야요.”
“네, 아직 아가씨한테 어려울 것 같지만 천천히 해 보세요.”
방긋 웃는 제니를 보며 나도 방긋 웃어 줬다. 그러고는 조그만 손가락으로 열심히 보석 조각을 주물럭댔다. 이걸 어디에 숨겨야 하나. 이곳은 내 집이 아니기에 나만의 비밀장소가 없었다.
소매 틈에 넣어서 숨길까 해서 제니 눈치를 보며 얼른 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하지만 헐렁한 소매라서 보석 조각을 다시 뱉어내 버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골똘히 생각할 때 판테르 공작과 다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이답게 모르는 척하면서 보석 맞추기 놀이에 흠뻑 빠진 모습을 연기했다. 보석 조각을 한 움큼 쥔 채 하나씩 금판에 놓고 있는데 판테르 공작이 피식 웃었다.
“아이치고 물욕이 많은 것 같군.”
흠칫-
들킨 건가.
판테르 공작의 목소리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보석 조각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순간 판테르 공작이 움찔했다. 그럴수록 뽀짝뽀짝 걸음을 옮겨 겨우 넘어지지 않고 판테르 공작 앞에 설 수 있었다.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판테르 공작을 보며 방긋방긋 웃어 주며 보석 조각을 내밀었다.
“이뿐 오빠, 나랑 가치 노올자여.”
순간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옆에 서 있는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가씨, 가주님을 그리 부르시면 안 된답니다.”
“구롬 오또케 부러야 해여?”
검지로 입술을 꾹 누른 채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움직이자 남자가 순간 심장을 움켜쥐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분은 예쁜 오빠가 아니라 예쁜 할아버지랍니다.”
순간 판테르 공작의 새파란 두 눈에서 레이저가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