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긴 오디? 나는 누규?”
눈을 뜨고 본 세상은 낯설었다. 너무 놀라 빳빳하게 굳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주변을 살피며 지난일을 돌아보았다.
나는 첫 번째 삶에서 친부에게 학대를 받다가 열다섯 살에 죽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책 빙의를 하게 되었다. 황제에게 죽는 조연인 황녀에게 빙의해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마법사가 되어 이복 오빠인 황태자 란슬롯의 편에 서서 싸웠고 끝내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원작의 해피엔딩 후에 나는 성인식 날 전 약혼자의 칼에 맞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이 일그러졌고 그 속으로 빨려들었다. 눈을 떴을 땐 하늘에서 떨어지는 중이었다.
순간 놀라 잠시 울음을 터뜨리기가 무섭게 엉덩이로 무언가를 깔아뭉갠 충격에 얼른 눈을 뜨고 일어났다. 나를 보는 시선에 뒷걸음질하다가 물컹한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두 손을 허우적댔다. 그리고 보았다. 짧고 통통한 손과 다리를 말이다.
“아, 앙대눈데…… 앙대에에에.”
몸뚱이를 살피던 나는 충격받아 그대로 쓰러졌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거였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도 그대로인 몸뚱이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나가 완전히 고갈되면 대부분 죽지만 수천만 분의 1의 확률로 어려진다는 말이 있었다. 한데 내가 직접 경험하게 될 줄이야.
한숨을 푹 내쉴 때 낯선 기척이 느껴졌다.
“어머! 깨어났군요.”
“…….”
“아직 정신이 없으려나.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발의 여인이 미소 지으며 말하다가 곧장 자리끼를 따라 줬다.
“조심히, 조심히…….”
나를 일으킨 여인은 등을 받쳐 주며 물컵을 입에 대 주었다. 잔뜩 목이 말랐던 나는 그 물을 조금씩 마셨다.
쮸읍, 쯉쯉-
생각 외로 물이 입으로 많이 넘어가지 않았다.
“옳지, 옳지, 잘 마셨어요. 이제 좀 괜찮아졌나요?”
겨우 물 한 번 마신 것 가지고 이런 칭찬을 들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고마뜹니다.”
“어이쿠! 인사 잘하시는 것 봐. 너무 귀여워서 어쩌지. 아! 우선은 보고를 먼저 해야 하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 볼을 톡톡 건드리다가 살짝 꼬집은 여자는 제 이름도 안 알려 주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나는 좌절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이불 위로 엎어졌다.
‘아이씨, 이번 생도 망했어!’
한동안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있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봤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사람을 발견하고선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얼른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까만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를 지닌 젊은 남자의 집요한 시선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한 후 오빠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얼른 몸을 일으킨 후 꼼지락대는 작은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 안냐세여…….”
“…….”
인사를 했지만, 상대방으로부터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얼어붙은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나를 쪼아댔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오빠랑 비슷한 인상이라서 그러나.
“그렇게 사납게 보시면 아이가 놀라 경기를 일으킨답니다.”
“이제껏 그런 적은 없었다.”
곁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나를 뚫어지게 보는 이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버석하게 메마른 목소리에 저절로 어깨가 위축되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다가 이불에 발이 걸려 발라당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는 게 취미인가 보군.”
“본래 아기는 중심을 잘 잡지 못합니다만.”
나를 보고 있는 남자 옆에 선 파란 머리 남자가 말하더니 손을 들어 흔들어 줬다.
버둥버둥대며 겨우 몸을 앞으로 뒤집은 나는 헥헥 숨을 몰아쉬며 앞을 봤다.
꼬르르륵-
때마침 눈치 없는 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흑발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아내여…….”
생각해 보니 성인식에 드레스를 입기 위해 굶었었다. 그래서인지 빈 속에 공기만 가득 찬 배가 요동을 치자 얼굴을 붉힌 나는 얼른 사과했다.
“배가 고픈 게 왜 미안한지 모르겠군. 당장 저 아이에게 먹을 걸 주게. 심문은 그 후에 하도록 하지.”
흑발의 남자가 그나마 한 점 인정은 남았는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을 한 후 돌아서서 발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파란 머리 남자가 나를 보고는 방긋 웃으며 다가와 내 볼을 꾹꾹 눌렀다.
“어쩜, 애들은 이리도 피부가 탱탱하지. 정말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군. 아가야, 내 이름은…….”
“벤스 크리스토퍼, 닥치고 따라오게. 거기에서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벤스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남긴 그는 곧장 흑발의 남자를 따라 나갔다. 나가는 내내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참 집요해 보였다.
“벤스 님께서 마음에 들었나 봐요. 평소에도 저런 표정이긴 했지만요. 아, 제 이름은 제니랍니다. 주방에 말해 뒀으니 곧 수프를 가져올 거예요.”
금발의 말괄량이 같은 제니는 나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그러고는 수프가 올 때까지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끄아앙, 시러.”
“싫어도 씻으셔야 해요.”
갑자기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잠옷을 훌러덩 벗기더니 다짜고짜 욕실로 안고 갔다. 당황한 나는 제니를 밀어내며 두 팔을 파닥였지만, 그저 의미 없는 움직일 뿐이었다.
쉽게 나를 제압한 제니는 욕조에 앉힌 후 온갖 입욕제를 풀어 뭉뚝한 팔다리를 씻겼다. 황녀로 지낸 시절에도 목욕은 혼자 했는데.
“어머, 얌전하기도 하셔라. 따뜻한 물에 앉으니까 기분 좋으시죠.”
도리도리-
고개를 가로젓자 제니가 미소 지으며 내 몸을 살짝 뒤로 눕혀 샴푸질을 했다.
“어휴, 귀여워라. 이 일을 어쩜 좋아.”
혼자 좋아한 제니는 나를 뽀독뽀독할 정도로 깨끗하게 씻긴 후에 수건으로 돌돌 감싸 욕실을 나왔다.
따뜻한 물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자 바들바들 떨려서 제니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추버.”
“추우세요? 옷 입혀 드릴게요.”
물기를 닦아낸 내 몸에 옷이 입혀졌다.
“예전에 아가씨께서 입던 옷이라던데 어쩜 이리도 잘 어울릴까요. 안 버리길 다행이네요.”
아가씨? 그렇다면 이 집 안에 아기가 또 있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하자 제니가 내 머리를 말려 곱게 빗어 머리끈으로 묶어 줬다.
“이것도 아가씨가 사용하던 물건이랍니다. 당장 새로 살 수가 없어서 아가씨가 쓰던 거 가져온 거예요.”
“아가쒸?”
“네, 아가씨요. 가주님께는 따님이 계시거든요. 지금은 출가하셨지만요.”
“그짓말…….”
결혼한 딸이 있는 아빠로 보이지 않았다. 아까 본 얼굴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잡아도 이십대 초중반이었다.
“거짓말 아니에요. 출가한 아가씨와 멋진 도련님이 있답니다. 뭐 이건 다 아는 사실이라 비밀로 할 것도 아니니, 크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제니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 줬다.
우선 이 집 가주이자 아까 본 냉미남은 1녀 1남의 아빠인 조슈아 판테르 공작, 올해 스물한 살인 딸 에리카, 그리고 열세 살의 아들 유진이 있단다.
덕분에 이 집안 호구 조사가 끝났지만 나는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판테르 공작? 판테르라니…….’
말이 통하기에 이곳도 내가 사는 나라가 속한 대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얼른 마나를 찾고 몸이 본래대로 돌아가면 오빠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한데 내가 알고 있는 컨티넨 대륙에 판테르 공작가는 없었다.
‘그렇다면 여긴 신진 귀족이거나 귀족을 사칭한 자인가.’
신진 귀족이 남작이나 자작도 아니고 바로 공작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황제가 엄청나게 총애하는 자식이 아니고서는.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생각에 잠긴 나를 본 제니가 두 손을 뻗어 내 볼을 어루만졌다.
“흐읏…… 어쩜 좋아. 감촉이 너무 좋아요. 차지게 막 달라붙어.”
볼에 닿은 제니의 손은 음식이 오자 멈췄다. 하얀 크림 수프엔 조각난 빵이 올려져 있었다.
꾸르륵-
수프를 보자 내 배가 줏대 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빈 위장에서 공기가 마구잡이로 춤을 췄다.
“배가 매우 고팠나 보군요.”
제니가 내 목에 뭔가를 걸어 주자 고개를 숙여 봤다.
턱받침-
아니야. 난 이런 거 할 나이 지났단 말이야. 턱받침이 웬 말이야.
턱받침을 잡고 떼어내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은 작은 손으로는 무리였다. 바둥바둥하며 턱받침을 빼려고 하던 나는 대뜸 크림수프 한 숟가락이 다가오자 움직임을 멈췄다.
“나 요고 머거도 대여?”
먹음직스러운 하얀 수프를 보며 묻자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자! 아, 하세요.”
“아아…….”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배고픔에 지쳐 버렸는지 아니면 어려져서인지 내 뇌도 동시에 퇴화가 된 듯했다. 나도 모르게 소금물 만난 조개처럼 입을 쫙 벌리고 있으니 말이다.
“오구, 오구! 우리 아기, 수프도 잘 먹네요. 착하다, 착해.”
이건 본능이다. 어쩔 수 없잖은가. 어린아이는 참을성이 부족하니까. 배고픔에 지친 나는 제니가 먹여 주는 크림수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후아암.”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자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린 채 하품을 하다가 얼른 조그만 손으로 가렸다.
“괜찮아요. 원래 아이는 밥 먹고 자는 게 일이니까요. 가주님이 오셔서 심문하시기 전까지 푹 쉬세요.”
심문이란다. 마음 편히 자라고 하더니 심문하러 온다는 말을 하다니. 대체 자라는 것인가 말라는 것인가. 잔뜩 긴장해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사반나 제국의 동쪽을 다스리는 조슈아 판테르 공작은 오늘도 공사다망했다. 까만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자 주변에 있는 보좌관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커다랗고 긴 손가락이 책상을 두들길 때마다 보좌관들의 가슴도 쿵쾅거렸다. 고요한 중에 들리는 작은 소음에도 보좌관들은 피가 말라 갔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욕을 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해서…… 그 아이가 그 예언의 아이라 이 말인가.”
“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언의 아이는 태어났지 않은가.”
이 대륙을 구원할 아이와 반대로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것이라는 아이 둘이 존재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건 신전 놈들이 여론전 해 보겠다고 허무맹랑한 말을 한 게 분명하네.”
판테르 공작이 그리 말했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아기는 실존했다.
때마침 판테르 공작가에 반기를 든 놈을 쓸어내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살이 뒤룩뒤룩 찐 뒤오바 백작을 어떻게 요리해 줄까 하는 순간에 뭔가가 떨어졌다. 정확히 뒤오바 백작 위로 떨어져 놈은 즉사했다. 한데 아이는 마치 바람의 여신이라도 된 듯 크게 다치지 않고 꼼지락대며 움직였다.
절대 놀라지 않는다는 판테르 공작마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한 존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났다.
한 주먹도 안 될 것 같은 얼굴에 검댕을 묻힌 조그만 아이는 이내 두 팔을 파닥파닥이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하지만 곧장 일어나서 주변을 살핀 아이는 ‘아, 앙대눈데…… 앙대에에에.’ 하곤 세상 다 산 표정을 짓더니 다시 뒤로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본 판테르 공작이 저도 모르게 아이를 붙잡았다. 검댕이 묻은 아이의 몸을 가린 잿더미가 된 옷 위에 제 망토를 덮어 준 판테르 공작이 안아 집에 데려왔다.
“고, 공작 각하!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요.”
아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고는 목에 걸고 있던, 색이 빠진 보석 목걸이뿐이었다. 그렇기에 보좌관이 묻는 말에 판테르 공작은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도 처음 겪은 상황이라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찹쌀떡이다.”
“네?”
“구운 찹쌀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