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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내 어린 시절의 천사(3) (120/120)

외전 3. 내 어린 시절의 천사(3)

나는 자세를 낮춘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빛을 모아 만든 듯한 고운 손이 옷자락에 묻은 더러움을 털어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만지듯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리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스스럼없는 태도에 당혹감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손길이 낯설지 않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생각에 골똘한 사이, 그가 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조심스레 일으켰다. 부르튼 손등 위로 옷깃이 스치고, 따끔거리는 감촉에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다.

찰나의 찡그림을 기민하게 눈치챈 소년이 내 손을 바라보았다. 거칠거칠한 거스러미, 울긋불긋한 피부. 그 와중에도 동전을 꼭 쥐고 있는 손.

그 순간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 다급히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이내 소년의 단단한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말간 빛이 새어 나오며 부르튼 상처 위를 감쌌다. 그것이 채 무엇인지도 깨닫기 전, 손등의 상처가 감쪽같이 아물었다.

깜짝 놀라 입술을 달싹이는데 손등 위로 투명한 물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눈물을 흘리는 소년이 보였다.

“네가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사라진 상처가 옮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아프게 울었다.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해.”

그가 이젠 완전히 아문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 순간 묘한 안도감이 몸을 휘감았다. 나보다 겨우 반 뼘 정도 클까 싶은 소년인데, 거목에 기댄 것처럼 든든하게 느껴졌다.

왜? 뒤늦게 의문이 들었지만 답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런 호의에 익숙한 사람인가?

글쎄, 잘 모르겠다. 내 삶에 단 한 번도 다정한 호의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어머니, 그리고 헤나 아주머니. 많지는 않아도 분명 내 곁엔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을 온전히 채울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간호해야 했던 아버지. 테이를 돌보기 바쁜 헤나.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이해하지 않으면 가끔 내게로 떨어지는 그 사랑마저도 없는 것이 돼 버릴까 두려웠다. 우선순위 끝에 남은 호의더라도 소중하게 여겼다.

하지만 사실은 늘, 사랑이 고팠다.

나는 무언가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소년의 손을 맞잡았다. 간절하게. 눈앞의 이 소년이라면 열 일을 제치고서라도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줄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확신을 느끼며 소년의 호의를 붙들었다.

“도, 도와줘.”

그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참았던 눈물이 그제야 터져 나왔다. 홀로 닦아내는 게 쓸쓸해 꾸역꾸역 참고 있었던 눈물이었다.

“도와줘. 나, 나를 도와줘……. 제발…….”

“…….”

소년의 눈동자가 커졌다. 연보랏빛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호수의 물결처럼 흔들렸다. 고운 미간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부탁하지 마. 내가 너를 돕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조건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볼을 적시고. 그 누구도 닦아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초라한 눈물이 소년의 손끝에 고였다.

* * *

소년의 이름은 제레미, 하지만 나는 종종 그를 수호천사라 불렀다. 수호천사님, 하고 부를 때마다 소년의 볼이 붉어졌다. 그가 그 호칭을 부끄러워한다는 건 알지만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단언컨대 없었다.

그가 나타난 이후 거짓말처럼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고, 리야 영지도 이내 평화를 찾았으니까.

올리버가 훔쳐 간 돈 역시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후문에 의하면 베스가와 함께 징역을 살게 되었다고.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가문을 손에 넣으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헤나의 품에 안겨 있는 테이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마법처럼 찾아온 평화에는 헤나도 있었다. 올리버가 나간 자리를 헤나가 대신하기로 약속해주었는데, 새로 온 여집사는 올리버보다 백 배는 더 나았다.

테이도 헤나의 품이 좋은 모양이었다. 새근새근 잠이 든 테이에게 굿나잇 키스를 남기고 내 방으로 올라왔다.

벌써 자는 거냐는 헤나의 물음엔 피곤하다는 말을 남기긴 했지만……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조금 뒤면 제레미, 나의 수호천사가 올 시간이니까.

“수호천사님!”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반가움에 손을 마주 잡자 그의 볼이 예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음…… 그냥 제레미라고 불러주면 안 돼?”

“하지만…… 황자님을 어떻게 이름으로 불러요?”

“괜찮아. 너는 그래도 돼, 힐레인.”

처음엔 완강하게 버텼지만 함께 대화하는 날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를 제레미라 부르게 되는 날이 왔다.

열세 살이 좀 넘어서였나? 어찌나 기뻐하던지, 제레미는 나를 안고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때의 제레미 표정은 아직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

제레미와의 만남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매일 같은 시간 방에 들르던 그는 어느 날은 내게 조그만 보석을 안겨주었다. 꼭 쥔 채 이름을 부르면 언제든 꼭 달려오겠다고.

철이 든 이후로는 제레미가 귀찮게 생각할까 봐 자주 사용하지는 못했다. 제레미는 그 점을 무척이나 서운하게 생각했지만 그래도 위급한 일이 있을 땐 반드시 그를 불렀다.

하필이면…… 여자가 된 그 날까지도.

가족이라곤 아버지, 남동생이 끝. 헤나 아주머니가 있긴 했지만 이런 데 대해서는 미처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지식 없이 나는 여자가 되었고, 그날이 나는 내가 죽는 날이라 생각했다.

‘어떡해…… 나 곧 죽나 봐.’

화장실을 나온 나는 내 방 마룻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콕콕 쑤시는 아랫배를 잡고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숨을 못 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냥 곧 죽을 거라 생각하니 자연스레 숨도 옅어졌다.

‘제레미.’

위급하다고 여기자 곧장 제레미가 생각났다. 돌을 움켜쥔 채 다시 한번 더 제레미를 부르자 잠시 후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힐레인!”

바닥에 쓰러진 내게로 그가 다급히 다가왔다. 요즘 부쩍 키가 크기 시작한 제레미는 어렵지 않게 나를 안아 들 수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연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제레미…… 나 죽나 봐.”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제레미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짓는 제레미를 보니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디 아파?”

따뜻한 손이 정상 체온을 유지 중인 이마를 덮었다.

“아랫배가 너무 아파……. 그리고…….”

내가 봤던 충격적인 그 붉은 자국을 제레미에게 설명했다. 부딪히거나 베인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고.

내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제레미가 잠시 후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나를 안고 있던 손이 급격히 뜨거워지고 얼굴 또한 붉게 달아오른 채였다. 나는 딸기처럼 붉어진 그의 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레미?”

이름 한 번 부르는 것으로 제레미는 몹시 놀랐다. 나를 내려준 그가 몹시 난감해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심상치 않은 그의 반응에 나는 눈물을 투둑투둑 떨구었다.

“나 못 고치는 거야……?”

“아니, 아니. 힐레인.”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우선 내 눈물부터 닦아주었다. 평상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뺨에 손끝이 닿는 것만으로도 잘못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란다는 점이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안 죽어. 절대로……. 몸이 안 좋은 건 아니니까…… 그게.”

“……?”

“여성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나는 그…….”

제레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용기를 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겨우 달싹인 입술에서는 조그만 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도저히 설명을…….”

어느덧 목까지 붉어진 그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결국 그는 내게 미안하다며 연신 사과를 남겼고, 잠시 후 헤나 아주머니를 데려왔다.

나는 눈물을 매단 채 헤나 아주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곧장 알아챘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레미부터 방을 나가게 했다.

“그, 그럼 잘 부탁해, 헤나.”

“황자님이 그걸 왜 부탁해요, 호호. 일단 나가계셔요.”

“그…… 알겠어.”

잠시 후 방문을 닫고 온 그녀는 애어른 같던 황자님이 저렇게 당황하는 건 처음 본다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헤나,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나는 심각한데 주변에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가볍게 여기니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안 그래도 말씀드려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헤나의 다정한 설명이 있고 난 후, 나는 조금 전 제레미와 똑같이 볼을 붉혔다.

“세상에 그런 건 줄도 모르고 난……! 앞으로 제레미를 어떻게 봐야 하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절규했다. 헤나는 옆에서 괜찮다며 다독여주었지만 사실 마음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그 후 나는 한동안 제레미를 피해 다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 전속력으로 자리를 피했다.

결국 그의 눈물을 보고 나서야 나는 도피의 마침표를 찍었다. 사춘기 시절엔 무척이나 심각한 고민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다 추억이지.

“황자님도 기억나죠? 쿡쿡.”

“응……. 그때 힐레인이 나를 피해 다녔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파.”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그를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미소를 바라보던 그가 따라서 웃음을 흘렸다. 첫날밤의 긴장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후였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 창문을 바라보다 제레미의 품에 뺨을 비볐다. 긴장한 신부를 보채지 않고 기다려주어서,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고개를 들자 제레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제레미의 입술을 바라보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맞추었다.

불시에 입술을 빼앗긴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닿은 몸을 통해 그의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지는 게 느껴졌다. 그 선명한 감촉에 나는 슬며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날이 밝아서…… 어떡하지?”

수줍게 미소를 짓자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른한 감각에 젖어 있던 연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레미가 손가락을 부딪쳤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이 일제히 어두워지고 테이블 위의 은은한 촛불이 우리를 감쌌다.

“문제 있어?”

고요한 불빛 아래로, 나는 숨을 죽인 채 제레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제비꽃을 닮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일렁이는 빛을 머금었다. 나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니.”

다급히 입술을 마주친 그가 내 작은 속삭임을 베어 물었다. 입술 위를 배회하던 자잘한 키스가 점차 짙어지고 따뜻한 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사랑해, 제레미.”

움직임을 멈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나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가에 예쁜 눈물이 맺혔다.

“사랑해, 영원히.”


작가의 말

오랜 시간 애정을 갖고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신 응원과 관심에 글을 쓰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제 작품이 독자님들께 미소와 힐링을 드렸길 바라며... 다른 작품으로 찾아뵐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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