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내 어린 시절의 천사(1) (118/120)

외전 1. 내 어린 시절의 천사(1)

결혼식이 끝나고 홀로 남은 방 안. 힐레인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멍한 얼굴로 침대 위에 다소곳이 앉았다.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결혼식 당일, 원래라면 황자님을 지키기 위한 고민에 휩싸여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살아 있는 유디트 황후, 온화한 아인, 그림자 기사가 아닌 나.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꿈같은 현실 속에서 더는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행복하기만 하면 돼. 걱정 많은 첩자 힐레인이 아닌, 제레미의 행복한 신부 힐레인으로.

하지만 삐걱거리며 입력된 그 사실이 지금은 어색하기만 했다. 이 행복을 온전히 누려도 되는 걸까.

생각에 잠긴 채 침대 위로 벌러덩 몸을 누였다. 그런데 문득 옆으로 돌아누운 시야 사이로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잠옷이 들어왔다. 무심결에 잠옷을 집어 들자 레이스가 잔뜩 달린, 실용성을 상실한 잠옷이 눈앞에 팔랑거렸다.

‘센…….’

하늘거리는 잠옷 위로 회심 가득한 센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상상하자 입술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옷에 대한 센의 집착은 이번 생에서도 유효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건 너무했잖아…….’

손수건으로 써도 좋을 조그만 천 조각을 침대 아래로 숨겼다.

센의 정성은 고맙지만 이런 걸 순수한 제레미 앞에 보일 수는 없잖아? 그나마 내가 먼저 발견한 게 다행이지.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을 때쯤. 잠옷이 준 강렬한 여운과 함께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생각이란 걸 할 틈이 없었던 성대한 결혼식, 거기에 과거의 기억까지 스민 탓에 잊고 말았다. 오늘이…… 제레미와 보내는 첫날밤이란 사실을.

힐레인의 볼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약지에 자리한 반지보다도 더 붉은 빛으로.

똑똑-.

때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에 새신부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힐레인이 후다닥 몸을 일으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지금 이 시각에 신방의 문을 두드릴 사람이라면 제레미밖엔 없지 않은가! 문 주변을 힐끔거리는 그녀의 흰자 위에 붉은 실핏줄이 돋아났다.

잠시 후 하얀 예복 차림으로 들어온 제레미는 아무것도 모른 채 꽃송이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힐레인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벌써 네 번째 첫날밤이었지만 오늘이 지난날과 다르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제레미와 내가…….’

힐레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사이 은은한 촛불 빛을 등진 제레미의 그림자가 하얀 드레스 위로 드리웠다.

“힐레인.”

“……느, 네!”

우렁찬 대답과 달리 고개는 아래로 푹 꺾였다. 제레미가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사이 문득 뺨 위로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부드럽게 볼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슬며시 그녀의 턱을 받쳤다.

“나를 봐주지 않을 거야?”

눈이 마주치자 연보랏빛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졌다. 은빛 속눈썹이 내리깔린 아름다운 눈이 힐레인의 붉어진 얼굴 위를 배회했다.

아래로 미끄러진 시선이 이내 하얀 드레스 자락에 닿았다. 살결이 드러난 동그란 어깨, 잘록한 허리가 강조된 라인, 눈을 어지럽히는 별처럼 촘촘한 비즈.

그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간지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선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진 힐레인은 그에게 붙잡힌 고개를 슬며시 틀었다.

갈 곳 없어 방황하던 그녀의 시선이 창문 가에 닿았을 무렵 장난기 섞인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으로 도망갈 생각은 말고. 이번 생에선 절대 놓아줄 마음이 없으니까.”

제레미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힐레인은 그제야 과거의 첫날밤, 창문을 통해 아인에게 보고를 갔다 왔던 일을 떠올렸다. 다소 허술했던 첩자의 첫날밤이 그녀를 더욱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아, 안 그럴 건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자 제레미가 쿡쿡 웃으며 곁에 다가와 앉았다. 어깨를 움찔거리며 몸을 살짝 옆으로 비키자 그가 그러지 말라는 듯 그녀의 허리를 와락 잡아챘다.

한순간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가 앉은 힐레인이 인형처럼 몸을 뻣뻣이 굳혔다.

반면 제레미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머리 장식을 풀어주었다. 모든 장식이 걷어질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자, 잠시 후 그가 잘했다는 듯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쓸었다.

얼마간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이 허리로 내려왔다. 허리의 움푹 들어간 부분을 감싼 그가 그녀의 몸을 조금 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심장 소리가 맞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지자 제레미가 복숭앗빛으로 물든 힐레인의 뺨에 키스했다.

보드라운 솜털이 느껴지는 여린 피부는 작은 접촉에도 금세 뜨거워졌다. 제레미는 그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인간 난로로 변하는 그녀가 귀엽고 어여뻤다.

자잘하게 이어지던 키스가 깊어질 무렵, 힐레인의 몸이 뻣뻣해졌다. 입술뿐만 아니라 손이 닿는 다른 곳도 똑같았다.

제레미는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바르르 떨고 있는 힐레인을 응시했다. 두려움으로 잠식된 그녀는 가엽다 여겨질 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긴장했구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힐레인을 오랫동안 옆에서 봐온 그에겐 숨 쉬는 것보다 쉽게 읽히는 것들이었다.

‘첫날밤이라서. 그래서 무서운 거야…….’

바르르 떨리는 어깨, 달싹이는 입술. 첫날밤을 앞둔 신부는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인 상태였다. 지금은 무엇을 해도 그녀에게 두려움밖엔 주지 못할 것 같았다.

18년 동안 기다려온 밤. 그러나 제레미는 과감하게 욕망을 접었다. 자신이 원한다고 이 밤을 함부로 다룰 생각은 없었다.

힐레인에게 어쩌면 영원히 기억될지 모를 시간이니까. 그런 순간에 두려움의 감정이 개입되는 걸 원치 않았다.

생각을 마친 제레미가 힐레인을 침대 위로 눕혔다.

“……?!”

부지불식간에 이불이 목 끝까지 덮이고, 어느새 팔베개까지 해준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가만가만 다독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힐레인이 눈을 깜빡였다.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안도감과 함께 미안함이 스몄다.

“조금 전엔 내가 너무 긴장해서……. 그, 근데 나 하, 하, 할 수 있어.”

힐레인이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전혀 할 수 없을 것 같은 얼굴로 오기를 부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괜찮아.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죽지 않아.”

아마도…….

제레미가 말꼬리를 흐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흘러내린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귀가 무척이나 빨갰다.

그 모습에 힐레인은 묘하게 긴장감이 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에게 미안해야 할 지금의 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 기쁘게 느껴졌다.

“웃었어……?”

“아, 아니. 쿡쿡. 18년을 기다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알 것 같아서.”

“지난 삶까지 3년, 그리고 이번 삶에서 15년이니까……. 긴 세월이었지. 하지만 재밌었어. 어릴 적 네 모습도 보고.”

서로의 온기에 기댄 채 두 사람은 두런두런 과거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맨 처음 리야 영지로 왔을 때 기억나?”

포근히 이어진 대화 속에서 힐레인은 회귀 후 제레미와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떨어진 동전을 주우며 숨죽여 울던 여자아이, 그 초라한 아이에게 손 내밀어준 다정한 소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지켜주었던 천사를 회상하며 힐레인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 * *

<15년 전 과거>

젖병의 우유를 몇 방울을 떨어뜨려 본 나는, 입술을 욤뇸뇸 움직이다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뜨겁나?”

이웃인 헤나 아주머니께서 가르쳐준 우유 온도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맛있게 우유를 받아먹던 테이를 보며 꼭 기억해둬야지 생각했었는데.

그사이 허기를 참지 못한 테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애…….”

부엌 의자에서 내려와 다급히 테이를 누인 침대로 다가갔다.

일주일 전까지 어머니가 계셨던 침대 위, 이제 그곳엔 테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침대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지만,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테이를 보자 아픈 기억도 조금은 흐려졌다.

“울지마, 테이야.”

테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은 테이와 같이 울어버리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테이는 내가 달래주면 되지만 나를 달래줄 사람은 이제 곁에 없으니까. 홀로 울음을 그친 후 찾아드는 그 공허함이 싫어 꾸역꾸역 눈물을 삼켜냈다.

“괜찮아, 우리 테이. 누나가 맘마 줄게.”

허덕이는 테이에게 젖병을 물렸다. 다행히 온도가 잘 맞았던지 테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 우유를 먹는 데 집중했다.

빠르게 줄어드는 우유를 보며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테이가 한 모금만 남겨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이 찾아들 무렵, 테이가 빈 병에서 입을 뗐다.

“맛있었쪄요?”

끔뻑끔뻑 조는 테이가 사랑스러워 뺨에 입을 맞추었다. 스르르 미소 짓는 동생을 보자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테이가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을 확인한 후 살금살금 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밖을 나섰다.

잠든 테이를 두고 홀로 집 밖에 나오는 건 꽤나 가슴 졸이는 일이었다. 혹여나 테이가 깨버리면 아버지를 찾아 나서야 하는 이 여정도 끝이 나버릴 테니 말이야.

그나저나 아버지는 대체 어디로 가신 걸까.

먹먹한 눈으로 잡초가 자라난 밭을, 부서진 벽돌로 이어진 길을, 그리고 그 너머로 울창한 숲을 훑었다. 몇 안 되는 사용인들마저 나가버린 작은 저택은 마녀가 사는 오두막처럼 황량해져 있었다.

그곳에 마녀가 아닌, 길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길에 두고 온 빵 부스러기를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뎠다. 혹시 모르지 그곳에서 아버지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는지.

“헤나 아주머니!”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어릴 적 나를 돌봐주었던 유모, 헤나 아주머니네 가게였다. 이미 몇 달 전 유모 일을 그만두었지만 그녀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흔쾌히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가씨, 한겨울인데 숄 한 장 달랑 두르고 오신 거예요?”

“괜찮아요, 하나도 안 추웠어.”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추위는 헤나가 가져다준 코코아 한 잔에 눈 녹듯 녹아내렸다.

코코아를 뒤이어 나온 따뜻한 빵과 계란 후라이. 그야말로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워버렸다. 값을 치르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이자 헤나가 손사래를 쳤다.

“아가씨! 돈을 왜 주셔요, 이건 그냥 제가 드리고 싶어서 드린 건데.”

언제까지 이렇게 헤나 아줌마의 도움만 받고 있을 수는 없는데……. 한사코 말리는 헤나를 보며 머뭇머뭇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미안한 마음이 커질수록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도 커졌다.

“아주머니, 혹시 아버지 소식은 없었나요?”

“수소문하고 있지만 쉽지 않네요, 대체 남작님은 어디로 가신 건지…….”

어머니를 차가운 땅속에 두고 돌아온 그 날 밤, 아버지는 홀로 술을 들이켰다.

술에 절어 잔뜩 흐트러진 모습, 물기에 젖은 벌건 눈동자.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무섭다고 생각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한 것 같은 두려움에 테이를 안고 도망치듯 방에 숨어버렸지.

그 후 아버지와 집사, 올리버의 대화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문에 귀를 댔을 땐, 두 아이를 부탁한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과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가지 마세요!]

그제야 뭔가가 잘못됐단 걸 느끼고 다급히 아버지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내가 나갔을 땐 이미 아버지의 모습은 점처럼 작아진 상태였다.

[나 버리지 마.]

엉엉 울며 온 마을 안을 맨발로 뛰어다녔다. 놀란 헤나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테이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테이는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리야가의 유일한 사용인이었던 올리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잘 돌보겠다고,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시라고 말했던 올리버는 몇 안 되는 귀중품과 돈을 들고 사라진 채였다.

남은 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계집뿐.

배고픔에 우는 테이를 업고서 나는 쥐처럼 집 안을 뒤졌다. 몇 시간 동안 헤맨 후 나온 건 고작 동전 십여 개. 청소를 잘했던 올리버는 뭐든 쓸어가는 데 재주를 가진 작자였다.

테이의 우유를 사는 것만으로도 주머니는 금세 홀쭉해졌다. 이마저도 다 써버리면 이제 남은 건 어머니의 반지를 파는 수밖엔 없었다. 부디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기를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일단은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야겠지. 아버지만 돌아온다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이다.

어머니가 아프신 이후 부쩍 무뚝뚝해졌지만 이렇게 쫄쫄 굶어본 적은 적어도 없었다. 허허벌판에 내던져지고 보니, 이제야 나를 둘러싼 울타리가 얼마나 든든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그 울타리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포근하고, 아무런 걱정도 없는 집으로.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빵부스러기를 뿌리는 거였다.

“혹시 저희 아버지를 보시게 되면 집으로 와달라고 꼭 말해주세요.”

아버지가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작고 초라한 흔적을 열심히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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